꿈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의무 수행에 매어 있다면 지금의 당신은 최선의 자아가 아니다.
인간의 본성은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게 설계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의미를 원한다. 행복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행복은 우리의 가장 깊은 갈망을 채워 주기에 역부족이다.
우리는 그 이상의 초월적인 무엇, 즉 행복의 이유를 찾고 있다.
자살하려는 환지들을 치료하여 살려낸 이력과 나치 수용소에서 직접 겪은 일을 토대로 프랭클은 삶에 의미를 주는 것 세 가지가 있음을 배웠다.
첫째는 뭔가 해야 할 일이고,
둘째는 중요한 관계이고,
셋째는 고난에 대한 구속(救贖)적 관점이다.
그가 깨달았듯이 상황이 아무리 암담해도 내일 할 일이 있는 사람은 하루를 더 살 이유가 있다.
프랭클의 목숨을 유지하 세 한 것은 수용소에 들어가기 전부터 쓰고 있던 책의 원고였고,
아내를 다시 보리라는 희망이었다.
시간이 가면서 그는 자신의 고통의 목적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뭔가 할 일이 있었고, 자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믿었고,
고난에 대한 특정한 태도를 품었다.
덕분에 그는 다른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는 곳에서 살아남았다.
그의 회고록 [죽음의 수용소에서] 는 20세기 최고의 인기 서적 중 하나가 되어 무수히 많은 사람의 삶에 영향올 미쳤다.
흔히 우리가 종종 인식하지 못하지만, 내 이야기의 관건을 나 자신으로 삼는 것은 잘못된 접근이다. 나자신의 고통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과거에 연연하거나 미래에 칩착하면 성취감을 얻는 데 도움이 안 된다.
프랭클 에 따르면 무의미감을 떨치려면 문제에 촛점을 맞출게 아니라 더 나은 낙을 찾아야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행복해지려고 더는 애쓰지 말라는 뜻이다.
하지만 누구나 행복을 원하지 않는가?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
인생은 중요하지 않은 일을 하기에는 너무짧다. 별것도 아닌 일에 당신의 시간을 낭비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우리가 모두 알고 싶어히는 것은 이 땅에서 보낸 나의 시간어 뭔가 의미 있었다는 사실이다.
쾌락에서 얻는 낙은 한도 있어 머잖아 이게 무슨 소용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참된 만족을 원한다면 하찮은 갈망을 초월해 나에게 요구되는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소명은고통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일 때 찾아온다.

안타깝게도 비극을 피할 수는 없다.
원하든 원치 않든 착한 사람에게도 내쁜 일이 벌어진다.
그러나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고생을 얼마나 잘 피하느냐가 아니라 고생이 닥쳐올 때 어떻게 하느냐이다.
고통과 고난은 무서운 걸림돌이지만 우리의 목적을 방해할 만큼 강하지는 못하다.
사실 어떤때는 고통이 오히려 귀한 깨달음의 촉매제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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