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나이 어느덧 50하고도 6을 더 먹었다.

그리고 1988년도에 한의대를 졸업하고 원대광주한방병원과 동신대학교 광주한방병원의 전신인 기독한방병원에서 근무하고 1994년도에 개원을 한지가 25년이 되어가고 있다.

書卷氣 文字香(서권기 문자향)의 기치아래 책을 가까이 하면서 나를 다잡으려 노력한다.

이순신장군께서 책의 이론에서 끝나지 않고 현실에 적용시키는 삶을 살고 싶다. 장군께서 그리 하셨듯이 잘 못된점을 늘 반성하고 한탄하고 탄식하셨듯이 奈何奈何! 何關乎! 何恨焉!

공자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자신은 서른 살에 인생관을 확고하게 세웠고而立, 마흔 살에는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고不惑, 쉰 살에는 하늘이 자신에게 부여한 소명을 알았다知天命 말했다. 성인聖人 공자와 비교할 수 있는 삶이 아니 라도, 공자가 말한때에 따른 삶의 화두를 돌이켜 보면 그 동안의 삶은 어리석음 그 자체다.

두려움 때문에 오히려 무모했던 스무 살, 원칙 없이 우왕좌왕했던 서른 살, 작은 욕심 눈이 멀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렸던 마흔살, 그리고 아직도 오리무중인 천명 天命.

어리석게 살았던 이유는 멀리 않았다. 진실을 말해 주고 깨달음을 주고 조금이라도 더 현명하게 살도록 도와줄 스승을 멀리했고, 찾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럴수록 나이라는 계급장과 지위라는 자리에 의존해야 했다. 주름살 하나하나에 오만함을 덧붙여 스스로 고립시켰다.

나잇값도 못하는 지혜가 드러날수록 얄팍한 지식으로 땜질하기 바빴다. 빈 수레만 요란하게 흔들어야 했다. 발 밑의 작은 이익에만 눈을 맞춰 따라다녔기에 실속 없이 바쁘기만 했다.

그러나 알면서도 외면했다. 진실을 마 주치는 것이 두려웠고, 자신과 다른 사람이 덧칠한 모습에 게으르게 안주했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끊임없이 욕구불만에 가득 차 갈등하고 아파하고 시기하면서 내 탓이 아닌 '남 탓으로 돌렸다.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알았지만, 또 문제의 원인을 알았지만 계속 외면했다. 온갖 이유를 들이대며 진실을 마주하는 것을 피했다. 쓸데없는 자존심의 굴레를 벗지 못했기 때문이다. ! 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은 삶인가!

그런 즈음, 이순신이 남긴 기록의 어느 한 문장에서 번쩍 하듯 해방감을 맛 볼 수 있었다. 지독한 낙관주의자였고 강철 같은 자존심을 지닌 이순신이었지만, 그는 나와는 완전히 달랐다. 때와 장소, 신분 고하,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모든 사물과 사람들에게 배우려고 노력한 사람이었다.

奈何奈何! 何關乎! 何恨焉! 이순신이 온갖 풍파를 겪으면서 그의 일기에 기록한 말이다.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 깊이 새겨 놓았을지 모를 헛된 욕망, 세상이 묻히는 때를 버리고 씻으려는 비움의 언어이다.

[흔들리는 마흔, 이순신을 만나다]에서




이순신을 군신軍神으로 만들어준 스승은

중국 최고의 병법가들인 손자, 오자, 태공망, 사마양저, 위료자다.

 또 백성과 아픔을 함께하고 백성의 삶을 돌보는

지혜를 나눠준 스승은 장량, 제갈공명,

전단, 조충, 악비, 이목, 이강, 유기다.

압축적이면서 핵심을 찌르는 통찰력으로

리더십의 본질을 가르쳐 준 사람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 순자다.







이순신과 관련되어 남아 있는 주요 기록이

48세 이후의 것이라는 점은 불혹에 이른 사람이나

지천명에 이른 사람 모두에게 많은 것을 깨우쳐 준다.

 , 이순신은 쉰이 다 된 나이, 쉰이 넘은 나이에

 최고의 자리에 있었음에도 언제나 끊임없이 배웠고,

 자신의 내면을 갈고 닦았다.

우리가 독서를 하면서 상상으로 지은이와 대화를 하듯,

 이순신은 책을 통해 스승들과 토론하고

고민을 나누며 지혜를 쌓았다.

책속의 인물만이 아닌 현실의 인물도 있었다.

 류성룡은 이순신의 친구였고 후원자였으며

탁월한 행정가로 이순신과 같이 호흡했고,

이순신의 지혜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 스승들은 이순신에게 불패不敗의 병법과

불태不殆의 전쟁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들에게 그런 기술만 배우지 않았다.

 그들의 삶을 배우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을 뛰어넘으려 했다.

그들은 모두 각기 다른 시대의 인물이었고

 재능도 처한 위치도 달랐지 만,

온갖 시련을 겪으며 난세를 살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만의 부귀영화를

꿈꾸기보다 어지러운 세상, 죽음이 만연한 세상을

극복해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만들겠다는 꿈을 꾸었다.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갔기에

어느 한 사람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가시밭길과 시련이 예고되어 있었다.

때로는 높은 지위에서 천하를 호령하기도 했지만,

견제와 모략, 질투를 받아 삶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오르내리며 고통스럽게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어려움에 처해도

결코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일이 어렵고 복잡할수록 더 치열하게 고민했고,

인간으로서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을 참아내며

 끝내 목표를 이루었다.







이순신은 그들의 피눈물 속에서 고난의 의미를 배웠고,

 인내의 과실을 깨우치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드는 지혜로 성숙시켰다.

 

신에게 전선이 아직도 12척이 있습니다.

죽을힘으로 막아 지키면 오히려 해낼 수 있습니다.

비록 전선은 적지만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를 무시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


시작과 끝을 항상 같은 마음으로 해야 한다

 

이순신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그렇게 어떤 두려움도 없이 당당하게 소리칠 수

있었던 것은 가슴 저 밑바닥을 채운 스승들의 삶에서

얻은 지혜와 열정, 열망 때문이다.

고통으로 비명이 터져나올수록 가슴은 고요해졌고,

 삶에 대한 열망이 불타오를수록 눈빛은 더욱 빛났다.

자신만이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아님을

스승들의 삶을 통해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어떤 상황에서도 언제나 담담할 수 있었고,

미리 대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만함을 버리고 겸손하고 뜨겁게,

불혹의 이순신과 지천명의 이순신처럼

스승을 찾고 만난다면,

어제의 실패와 잘못은 작은 상처 에 불과할 뿐이다.

또 그런 이유로 생긴 고난은 멋진 훈장이 될 수 있다.

불혹도 지천명도 이순도 종심의 나이도 늦지 않았다.

 우리 매일 새로운 태양 아래 살고 있고,

 매순간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새롭게 태어났는데 무엇을 포기한단 말인가!

 포기하지 않는 자세는 삶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유효하다.



[흔들리는마흔, 이순신을 만나다] 박종평에서 따온 글이다.



난중일기(亂中日記) 1594년(甲午年)

음력 9월 3일 밤의 공의 일기를 보면

不可輕進 불가경진
경솔(輕率)히 나아갈 수 없다.
결코 가볍게(소홀하게,함부로)

출진(出陣,출전出戰,진격進擊)할 수 없다.
況知己知彼 百戰不殆云乎 황지기지피 백전불태운호
하물며 나를(자기 자신을) 알고 상대방(적敵)을

 알면 백 번을(여러 차례를) 싸워도

위태(危殆)롭지 않다고 하지 아니하였는가!
더구나 ('손자병법'에 이르기를) 아군의 전력을

알고 적에 관한 정보를 알면 여러 번 전투를

벌여도 위태롭지(위험하지) 않을 것이라

하지 않았는가!
初昏 明燭獨坐 초혼 명촉독좌
초저녁에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날이 저물어 어두워질 무렵 촛불을 켜놓고 홀로 앉아 
自念國事顚沛 內無濟策 자념국사전패 내무제책
스스로 생각하니 국사(國事)가(나라 전체에 상관되는 일이)

엎드러지고 자빠졌지만 안(국내적國內的)으로

구제(救濟)할 계책(計策)이 없는 것 같으니

곰곰히 생각해봐도 곤궁(困窮)에 빠진

국사(國事,전쟁 중의 혼란한 정치)를

조정(朝廷) 내(안)에서는 해결할

방법(구제책救濟策)이 없으니
奈何 奈何 나하 나하
어찌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어찌하리오, 장차 이 일(난국難局)을 어떻게 해야 하리오!


손자병법에는 知彼知己百戰百勝라 표현했지만

공은 知己知彼 百戰不殆라하셨다.

이는 공은 적보다는 먼저 나를 알아야 한다고

늘 생각했으며 그후에 적을 척후斥候하고

료망暸望하여 아군을 위태롭지 않게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단순히 이기는 것보다는 휘하의 군졸들의

생명을 아까히 하는 마음에서라고 느껴진다.


나도 공을 진정 닮고 싶다.

초심을 생각하며

시작과 끝이 같기를 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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