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기억을 믿느냐

유도심문·암시로 엉뚱하게 왜곡 가능

사건 목격자 100% 믿었다 큰코 다칠 수도

기억은 얼마나 정확할까? 우리는 기억해 낸 내용이 경험한 사실 그대로일 것이라고 흔히 믿지만,실은 직접 경험하지 않고 단지 추론한 내용에 의해 기억이 왜곡되는 경우가 매우 흔하다.

이를 확인하는 실험으로 사람들에게 여러 장의 그림을 잠깐씩 보여주고 "이것은 ○○을 닮았다"고 말해주는 것이 있다. 그리고 나서 그림을 기억해 그리도록 하면, 먼저 무엇과 닮았다고 했는지에 따라 기억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림1>을 보여주고 '안경'이라고 하면, 나중에 왼쪽 같은 그림을 많이 그리고, '아령'이라고 하면 오른쪽의 것을 그려내는 경우가 많다. 그림을 보며 함께 들은 설명에 따라 기억이 왜곡된 것이다. 이처럼 기억이 다른 정보와 추론의 영향을 받는 것을 '기억의 구성적 특성'이라고 한다.

기억의 구성적 특성은 현실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목격자의 증언이 법정의 판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경우가 있는데, 목격자가 거짓말하려는 의도가 없는 경우에도 기억의 왜곡 때문에 틀린 증언을 할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

미국의 인지심리학자 로프터스는,목격한 사건에 관한 기억이 사건 후에 제공된 정보에 따라 쉽게 왜곡될 수 있음을 밝혔다.

예를 들어,자동차 충돌 사고를 담은 비디오 필름을 보여준 후 자동차 속도를 추정하는 질문을 하였는데, 어떤 참가자들에게는 "자동차가 서로 부딪쳐 박살났을 (smash) 때 속도는?"이라고 물었고, 다른 참가자들에게는 "자동차가 서로 부딪쳤을(hit) 때 속도는?"이라고 질문하였다.

일주일 후 같은 참가자들에게 필름에서 유리창이 깨졌었는지를 물었는데, 깨졌다고 대답한 참가자들이 'smash'했을 때의 속도를 물어본 그룹에서 더 많았다.

하지만 실제 필름에서는 유리창이 깨지지 않았다. 목격한(필름을 본) 뒤 들은 단어(smash) 때문에 기억이 왜곡된 것이다. 즉, 이런 연구는 유도 심문에 따라 기억이 왜곡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수전 네이슨 사건'은 더 유명한 경우다.1968년 캘리포니아에서 수전 네이슨이라는 8세짜리 여자 아이가 살해됐는데, 진범을 찾지 못했다.

20년이 넘은 1989년 수전의 친구였던 아이린이 심리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수전을 죽이는 것을 봤다고 증언했다. 아이린의 아버지는 1급 살인죄로 기소돼 1심에서 종신형을 받았지만 재심에서 증언에 의혹이 생겨 무죄 방면됐다.

아이린의 경우도 TV에서 아동 살해 등을 자주 접한 데다가 심리치료 도중 치료자의 유도심문과 암시로 인해 엉뚱한 기억을 갖게 됐을 가능성이 있다.

최면 역시 기억의 왜곡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최면 상태에서는 암시에 걸릴 확률이 커서, 최면시술자가 제공하는 사소한 단서도 기억의 왜곡을 일으킬 가능성이 매우 크다. 따라서 범죄수사에 최면을 이용할 때는 심리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조심스러운 접근이 요구된다.

정확한 기억을 할 때와 왜곡된 기억을 할 때 나오는 뇌파가 다르다는 연구도 있다.

그림들을 보여주고 나중에 본 것인지 아닌지 대답하는 연구에서, 본 것을 봤다고 판단한 경우에는, 보지 않은 것을 봤다고 잘못 판단한 경우에 비해 이른바 'P300'이라는 뇌파 성분이 약간 늦게 발생한다.

<그림2 참조>

그러나 두뇌의 어느 부분이 기억 왜곡과 관련있는지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뇌의 구조와 기능이 워낙 복잡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머지않아 기억의 본질이 규명되고 아울러 기억이 왜곡될 때 두뇌 속에서 일어나는 과정도 낱낱이 밝혀질 날이 올 것이다.

박태진 교수 <전남대.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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