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기억과 단기기억은 전혀 딴판 2006.01.26 ⓒScience Times

인간의 기억에는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이 있다. 뇌는 단기적으로 기억한 것 중 불필요한 것은 삭제하고 꼭 필요한 것만 장기기억으로 저장한다.

장기기억은 단기기억과 비교해 기억의 지속 시간 외에는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뇌세포와 분자 수준으로 내려가 보면 두 종류의 기억은 완전히 딴판이다. 단기기억 때는 뇌세포와 뇌세포 사이에 새로운 회로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단지 뇌세포 회로의 말단에서 신경전달물질이 좀 더 많이 나와 일시적인 잔상으로 기억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단기기억이 장기기억으로 바뀔 때에는 뇌세포에서 회로를 만드는 유전자의 스위치가 켜져 새로운 신경 회로망이 생긴다. 이 과정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과학자가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신경생리학자인 에릭 칸델 교수이다. 오스트리아 출생인 그는 장기기억의 메커니즘을 밝혀낸 공로로 2000년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칸델 교수는 1970년대부터 바다에 사는 민달팽이로 학습과 기억의 원리를 연구해 왔다. 처음에는 포유동물로 연구를 했으나 포유동물로 복잡한 기억과 학습 과정을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된 그는 뇌세포가 크고 수는 적은 민달팽이로 실험 모델을 바꾸었다.

칸델은 민달팽이를 학습시키면서 생물학적으로 기억은 단기기억과 장기기억 두 종류가 있고, 장기기억이 생성될 때에는 신경세포 사이에 새로운 신경 회로망이 생긴다는 것을 알아냈다.

칸델의 실험은 이랬다. 껍질이 없는 민달팽이는 호흡관으로 물을 빨아들여 산소를 뽑아 쓴다. 호흡관을 툭 건드리면 달팽이는 아가미를 잠시 동안 몸 속에 숨긴다. 칸델 교수가 달팽이의 꼬리에 약간의 전기 자극을 가한 뒤 호흡관을 건드리자 달팽이는 위험을 느끼고 아가미를 몸 속에 숨기는 시간이 길어졌다. 전기 자극을 감지하는 신경세포와 아가미를 움직이는 운동 신경세포 사이에 새로운 회로망이 만들어져 아가미를 내보내지 않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기기억이었다.

칸델은 민달팽이의 꼬리에 전기적 자극을 줄 때 신경세포에서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기에 장기기억이 생기는지 관찰했다. 전기 자극을 아주 조금만 가하자 신경세포의 끝 부분에서 세로토닌이란 신경전달물질이 방출됐다. 세로토닌은 회로 표면의 수용체에 붙어 신경세포를 흥분시켰다. 그 결과 세포 안에서 cAMP라는 물질의 농도가 증가됐고 연쇄적으로 프로틴 키나아제 A라는 물질이 활성화돼 신경전달물질의 분비량이 늘어났다. 이것이 단기기억이다. 신경전달물질이 늘어나면 전기 신호가 신경세포 사이의 접속 지점을 훨씬 더 쉽게 통과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잠시 기억을 하게 되는 것이다.

민달팽이의 꼬리에 전기적 자극을 반복적으로 가하면 장기기억이 형성된다. 전기 자극을 줄수록 신경세포 내부의 cAMP 농도는 계속 높은 상태가 된다. 그러면 활성화된 프로틴 키나아제 A가 신경세포의 핵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핵 속에 있는 크렙(CREB) 단백질을 인산화시킨다. 인산화된 크렙 단백질은 뇌세포 사이에 회로를 만드는 10여 가지 유전자의 조절 부위에 결합해 스위치를 켜게 된다. 그래서 뇌세포 사이에 새로운 회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장기기억이다. 새로운 회로가 생기면 그 회로가 몇 시간에서 몇 주까지도 지속돼 기억이 장기간 저장되는 것이다. 그러나 뇌는 쓰지 않는 회로를 자꾸 없앤다.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반복 학습을 통해 이 회로를 더 강하고 두껍게 만들어야 한다.

칸델 교수가 밝혀낸 가장 중요한 사실은 크렙 단백질이 ‘기억 유전자의 스위치’이며 이 스위치가 뇌의 해마라는 부위에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바꾸는 가장 중요한 기관은 해마이다. 해마가 망가진 쥐는 기억력이 뒤떨어져 미로 찾기 같은 일을 여러 번 반복해도 탈출구를 잘 찾지 못한다.

크렙 단백질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기억을 촉진하지만 다른 하나는 기억에 제동 장치 역할을 한다. 기억을 촉진하는 크렙 단백질과 기억을 삭제하는 크렙 단백질은 보통 때에는 균형을 이룬다. 열심히 공부를 하면 기억 촉진 단백질이 더 강해져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바꾼다. 반대로 멍청한 상태로 있으면 해마는 일시 저장된 단기기억을 지워 버린다.

크렙 단백질의 존재는 머리를 쓰면 쓸수록 영리해진다는 것을 분자 수준에서 증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대로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신경세포에 자극을 주지 않으면 멍청이가 된다. 어린이를 아무런 자극을 주지 않고 키우면 뇌가 수축되는 것이 바로 그런 현상이다. /신동호 뉴스와이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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