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가 인간이 가진 고유한 영역이라고 생각돼 온 예술 분야도 넘보기 시작했다. 1946년 단순한 계산을 위해 개발된 컴퓨터는 1997년 세계 체스 챔피언 개리 카스파로프를 이기며 인간의 지적 능력에 도전하더니 이제는 미디어 아트의 영역에도 발을 내닫기 시작했다.

‘생성 예술’이라 불리는 이 장르는 컴퓨터가 수학적 계산을 통해 ‘무작위적이면서도 규칙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미디어 아트를 만드는 것이다. 수학적 계산은 단순한 방정식을 이용해 입체(3D) 그래프를 그리는 간단한 연산부터 ‘선형 방정식’이나 ‘위상 수학’처럼 인간의 능력으로는 쉽게 계산하기 힘든 것까지 다양하다.

그나마 예술 작품이 탄생할 수 있는 논리적인 수학 공식은 인간이 디자인했다는 것이 위안이지만 거꾸로 말하면 컴퓨터 없이는 생성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없다는 말도 된다. 게다가 컴퓨터 스스로 변수나 방정식을 조절할 수 있게 만든 작품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진화해 작가가 애초 예상하지 못했던 이미지를 창조해내기도 한다.

컴퓨터를 창조물로 볼 것인가, 창조자로 볼 것인가. 이를 논의하기 위해 세계의 생성 예술 작가 20명이 한국에 모였다. 이들은 20일 숭실대에서 ‘기계와 생명에 대한 확장된 시각으로 10년 뒤 융합예술 바라보기’라는 주제로 국제학술 심포지엄을 연다. 어쩌면 16일부터 서울 성북구 성북동 ‘스페이스 캔’과 숭실대 정보과학관에서 열리는 이들 작가의 전시회 ‘기계가 꾸는 꿈’은 창조자인 컴퓨터끼리의 ‘만남의 장’일 수도 있다.

무브먼트 시리즈(Movement series)



프랑스 작가 알라인 비틀러의 컴퓨터는 스스로가 인지하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컴퓨터는 시간을 사람과 다르게 느낀다. 컴퓨터에게 시간은 단순한 변수다. 사람의 시간처럼 일방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점이나 선으로도 인식할 수 있다. 비틀러의 작품은 컴퓨터가 인지하는 시간에 따라 그린 3D 이미지를 보여준다.

메이크시프트(Makeshift)


영국 작가 그레이엄 웨이크필드의 컴퓨터는 생물학적 진화를 연구하는 프로그램인 ‘시멘틱 네트워크 그래프’를 이용한 작품을 선보였다. 이 작품은 컴퓨터가 만든 하나의 생태계다. 수학적 그래프로 이뤄진 작품 속 ‘생명체’는 서로 만나서 사라지기도 하고 2세를 만들기도 한다. 물론 2세는 기존의 그래프와 다른 형태를 갖는다. 마치 부모의 유전자(DNA)를 조금씩 취한 자손처럼 말이다.

논커넥티비티(Nonconnectivity)


미국 작가 랜스 푸트남의 컴퓨터는 선형 방정식을 이용한 작품을 만들었다. 이 작품에서 점들은 선형 방정식이 만든 궤도를 따라 돌면서도 ‘그룹’ ‘개별’ ‘변화’라는 명령 속에서 독립된 움직임을 보이지만 사람의 눈에는 점들이 함께 만든 화려한 이미지가 보이게 된다.

비밀 도청(Subliminal Wiretapping)
미국 작가 숀 로슨의 컴퓨터는 수열을 활용해 작품을 만들었다. 컴퓨터는 수열로 무작위적인 숫자를 만든 뒤 이를 글자로 바꾼다. 글자는 다시 수열을 바꿔 다음 글자를 만드는데 영향을 미친다. 컴퓨터는 ‘자신만이 아는’ 단어를 만든 뒤 줄을 바꿔 다음 단어를 만든다. 친절하게 사람들을 위해 종이에 인쇄해주지만 이를 이해하는 사람은 애석하게도 없다.

아이 엡, 잇 플로우즈(I ebb, It flows)와 정보 vs 조직(Information vs Organization)


미국 작가 윌리엄 크레이그의 컴퓨터는 두 작품을 만들었다. 이 작품들은 변수에 따라 점 또는 선을 만든다. 변수는 컴퓨터가 무작위로 바꾸거나 관람객이 조절하는 마우스 포인터의 위치에 따라 변한다. 변수는 색, 점의 크기 등을 바꾸게 된다.

어 글랜스 투 프리모디얼 카오스 오브더 시(A Glance to Primordial Chaos of UnderSea)


한국 정문열 작가의 컴퓨터는 인간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심해의 사진을 알아보기 힘든 형태로 바꾼다. 컴퓨터는 스스로 진화하는 알고리즘을 사용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이미지는 점점 정형화된 형태를 잃어간다.

전동혁 동아사이언스 기자 jerme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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