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의 명언과 영어공부(42)
막스 플랑크
▲ 막스 플랑크.  ⓒ
Science cannot solve the ultimate mystery of nature. And that is because, in the last analysis, we ourselves are a part of the mystery that we are trying to solve.

과학은 궁극적으로 자연의 신비를 풀 수 없다. (자연을) 마지막으로 해석하는 순간에도 우리 자신은 결국 우리가 풀려고 하는 그 신비의 한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막스 플랑크(1858~1947) : 독일 이론물리학자, 양자론 창시자 -

위대한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Max Karl Ernst Ludwig Planck)를 기리기 위해 설립된 막스 플랑크 재단이 작년(2005년)에 16번째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습니다. 산하 기관인 양자광학 연구소의 테어도어 헨슈(Theodor Hansch) 박사가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습니다. 헨슈 박사의 연구 분야가 양자이론을 창시한 막스 플랑크의 연구를 이어 받은 것으로 더욱 의미가 있었던 거죠.

“No burden is so heavy for a man to bear as a succession of happy days. 행복한 나날을 계속해야 하겠다는 것만큼 무거운 짐은 없다.” “Ego is the immediate dictate of human consciousness. 이기주의란 인간의 의식 속에서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독재자다.”

전쟁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옵니다. 물리학과 같은 기초과학도 그렇고 응용과학도 2차대전 전까지만 해도 유럽이 중심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독일이 있었던 거죠. 그러나 2차대전 이후 과학기술의 중심지는 미국으로 이동합니다. 히틀러 집권 후 독일은 기초과학과 과학자에 대한 홀대로 많은 사람들이 조국 독일을 등져 미국으로 이주하거나 망명합니다. 이탈리아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집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아인슈타인 박사입니다. 물리학의 천재 아인슈타인 박사가 물체의 질량이 엄청난 에너지로 변할 수 있다는 E=mc2의 공식을 발견한 것도 막스 플랑크 재단의 전신인 카이저 빌헬름 재단의 한 연구소에서 이루어 낸 업적입니다. 히틀러는 무기개발 경쟁에 많은 관심을 가졌지만 어렵고 난해한 기초과학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을 못했죠. 더구나 까다로운 과학자들은 질색이었습니다. 독일이 패망할 무렵에야 비로소 신무기 개발에서 기초과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감합니다. 그러나 때는 늦은 거죠.

▲ 막스 플랑크는 독일 과학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킨 학자다. 그래서 그는 비운의 과학자가 됐는지도 모른다.  ⓒ
191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막스 플랑크는 많은 독일의 과학자들이 학문의 자유를 위해 줄줄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거나 망명을 하는데도 조국 독일에 남아 연구를 합니다. 그렇다고 히틀러의 과학정책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많은 언쟁을 벌입니다. 그 결과 그의 명성과 명예와는 전혀 다른 불행한 삶을 살아갑니다.

막스 플랑크 재단은 산하에 생물학과 의학 분야 32개, 화학과 물리학 분야 30개, 그리고 예술과 인문학 분야 17개 등 81개 연구소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응용과학을 주로 전담하고 있는 브라운호퍼 재단과 함께 과학기술 강국 독일을 이끌고 있는 기초과학 연구소입니다. 독일의 자존심이기도 합니다.

“All matter originates and exists only by virtue of a force. We must assume behind this force the existence of a conscious and intelligent Mind. This Mind is matrix of all matter.” 해석해 보면 “모든 사물(삼라만상)은 힘의 작용에 의해 만들어지고 존재한다… 이러한 힘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의식적이고 지적인 ‘마음’을 가정해야 한다. 이러한 ‘마음’이 바로 삼라만상의 모태(母胎)다.” 번역이 깔끔하지 못한 것 같네요. 그래도 이해하시죠?

“A new scientific truth does not triumph by convincing its opponents and making them see the light, rather because its opponents eventually die, and a new generation grows up that is familiar with it.”이라는 말도 남겼습니다.

해석하자면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그 사실을 상대방에게 보도록 하고 확인시킴으로써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결국 사라지고(죽고) 새로운 세대가 자라나 그 진리에 친숙해질 때 승리하는 것이다.” 선각자의 외로움과 고독을 이야기하는 건가요, 아니면 각기 다른 과학자는 각기 다른 자신의 연구에 너무 집착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잘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이야긴가요. 둘 다 맞는다고 생각하면서 음미해도 좋을 것 같네요.

비슷한 명언으로 이런 말도 있습니다. “An important scientific innovation rarely makes its way by gradually winning over and converting its opponents : What does happen is that the opponents gradually die out. 중요한 과학의 혁신은 상대방의 마음을 점차 변하게 하고 굴복시킨다고 해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그 성공은 상대방이 점차 사라지는 것이다.”

과학을 종교로 믿었던 막스 플랑크는 종교와 과학 사이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한 학자이기도 합니다. 과학의 종교적인 혁명가입니다. 창조냐 진화냐? 성서는 과학과 위배된다? 무신론이냐 유신론이냐? 그런 부류가 아닙니다. 사실 이런 문제를 갖고 이마에 핏줄을 세워가며 자기 주장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겁니다.

▲ 막스 플랑크 재단은 과학기술 강국 독일을 이끌고 있는 대표적인 연구소다.  ⓒ
위대한 과학자는 위대한 종교가입니다. 너무나 독실합니다. 엄숙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의 대상은 자연이고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 자연과 자연의 이치를 유형의 창조주나 하나님과 연결시킬 것이냐, 무형의 신으로 연결시킬 것이냐는 다릅니다. 좁은 달팽이 집에서 사는 인간들의 다툼이기도 합니다.

‘와우각상(蝸牛角上)’이라는 명언이 있습니다. 장자에 나오는 말입니다. 옛날 한 달팽이가 있었는데 왼쪽 뿔에 촉(觸)이라는 나라가 있었고 오른쪽 뿔에는 만(蠻)이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서로 영토를 차지하려고 늘 싸워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조그마한 달팽이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부싯돌에 번쩍하고 끝나는 불꽃 같은 인생에서 서로 길고 짧음을 다툰들 그 세월이 얼마나 되겠는가. 달팽이 뿔만큼 작은 세상에서 서로 잘 났다고 겨룬들 그 세상이 얼마나 되겠는가.” 중국의 유명한 학자 채근담(菜根譚)의 해석이자 주석입니다. 옛날에는 ‘마음을 다스리는 글’로 이 분이 유명했고 책도 많이 읽었는데 요즘은 잘 읽지 않는 것 같아요. 짬이 나면 한 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과학을 종교로 승화시킨 막스 플랑크는 이런 명언도 남겼습니다. “Anybody who has been seriously engaged in scientific work of any kind realizes that over the entrance to the gates of the temple of science are written the words : ‘Ye must have faith.’ It is a quality which the scientist cannot dispense with.”

“어떤 종류든 간에 과학적 작업에 열심히 종사하는 사람들은 과학의 사원(寺院)을 들어가는 현관에 이와 같은 말이 쓰여 있다는 걸 깨달아라. ‘신념을 가져야 한다.’ 과학자가 반드시 지녀야 할 성품이다.” 멋있는 말이죠? 막스 플랑크의 철학이 담겨 있는 듯합니다. 학문에 대한 신념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We have no right to assume that any physical laws exist, or if they have existed up until now, that they will continue to exist in a similar manner in the future. 우리는 어떤 (특별한) 물리학적 법칙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권한이 없다. 설사 이제까지 존재한 법칙이라도 그 법칙이 미래에도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할 권리가 없다.” 자연은 심오해서 탐구하고 연구해야 할 게 무궁무진하게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물리학적 이론이나 가설도 시간이 지나면 다 수정되고 변한다는 이야기가 아닌가요?

▲ 막스 플랑크는 아인슈타인과 교류도 많았다. 아인슈타인(오른쪽)에게 막스 플랑크 메달을 수여한 뒤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막스 플랑크의 양자론은 아인슈타인 박사의 상대성 이론만큼이나 중요하고 또 아인슈타인 박사의 이론에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그의 제자고 그를 가르쳤다”라는 말은 심할지 모르겠지만 많은 접촉을 가졌고 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같은 시대에 같은 나라에서 같은 분야에 근무했으니까 당연한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막스 플랑크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학자입니다. 그는 히틀러의 파괴적인 인종정책에 반대해 이를 말리려고 히틀러를 직접 찾아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미국이나 영국 등 여러 나라에서 망명하라고 권유하지만 생을 다할 때까지 독일에 계속 남습니다. 히틀러에게 외면당한 그가 뭣 때문에 남겠습니까? 그는 히틀러의 독일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독일의 과학을 지키기 위한 길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위대한 과학자입니다. 말년에 철학, 미학, 종교에 많은 관심을 갖고 저술도 많이 합니다.

아마 그가 덜 금욕적이고 덜 철학적이었다면 50세 이후에 그에게 불어 닥친 여러 가지 불행들을 막을 수가 있었을 거라고 말 많은 후세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막스 플랑크는 뮌헨 은행가의 딸인 첫째 부인 M.메르크와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M.메르크는 결혼한 지 22년 만에 죽습니다.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막스 플랑크는 첫째 부인 사이에 두 아들과 쌍둥이 딸이 있었습니다. 첫 아들 카를(카를 플랑크)은 1916년 전투에서 사망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에 두 딸 가운데 마르가르테는 출산 중에 죽었고 1919년에는 똑 같은 일이 남은 마지막 딸 에마에게도 일어납니다.

2차 대전은 그에게 더 큰 비극을 안겨줍니다. 베를린에 있던 막스 플랑크의 집은 1944년 폭탄 투하로 완전히 파괴됐고 마지막 남은 둘째 아들 에르빈은 같은 해 7월 히틀러의 목숨을 노렸다는 이유로 체포돼 전쟁 막바지에 이른 1945년 초 게슈타포에 의해 무참히 살해됩니다. 자식 모두가 죽은 거죠. 그의 삶과 의식조차 파괴됩니다.

2차대전이 끝나자 미군 장교들이 1910년 재혼한 M. 폰 회슬린과 막스 플랑크를 괴팅겐으로 데려갑니다. 전쟁 중에 적국의 과학자는 아주 중요한 사찰 대상, 요주의 인물이라는 거 아시죠? 1947년 9월 89세 나이로 괴팅겐에서 파란만장 했던 세상을 하직합니다. 죽음은 그에게 구원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김형근 편집위원  hgkim5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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