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인간 닮은 로봇을 생각했을까? 차페크의 창의적인 희곡 ‘로섬의 만능로봇’에서 시작 2009년 06월 17일(수)

▲ 상상 속의 로봇들이 이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이제 단순히 로봇기술에만 안주할 것이 아니라 로봇과 인간과의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인간과 비슷하게 생긴 로봇만이 꼭 로봇이 아니다. 공장에서 용접을 전담하는 기계, 그리고 자동차와 같은 복잡한 공정 가운데 조립만 담당하는 기계들도 다 로봇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과 비슷한 형상을 가진 기계를 로봇이라고 부르는 데 익숙해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이러한 인간과 비슷한 모습의 로봇을 생각하게 되었을까? 어린 시절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정의의 사도 로봇 태권V뿐만이 아니다. TV 시청이 여의치 않았던 시절에는 아톰과 철인이라는 로봇들이 만화 속의 흑기사로 어린이들의 단골 메뉴였다.

그러나 이러한 로봇들이 나오기 훨씬 이전부터 로봇은 인간의 상상 속에 계속 그려져 왔다. 상상 속의 인간과 닮은 로봇은 이제 현실에서 점차 분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로봇기술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로봇산업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 가지로 여기에 사활(死活)을 걸고 있을 정도다. 심지어 2007년 말 전 세계에서 최초로 로봇윤리헌장을 발표하는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

과연 로봇은 인간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것인가? 기본적인 삶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노동이 필요했다. 인구가 늘어나고 더 나은 삶을 추구하면서 더 많은 욕망이 생겨나고 더 많은 욕망은 더 많은 노동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도구와 기계를 발명해냈으며 이들이 인간의 노동을 줄여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기계로 인해 생산성이 향상되기는 했지만 편안해진 것은 아니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여전히 다른 형태의 노동에 시달려야만 했다.

로봇은 노동을 의미, 부려먹기 위해 만든 인조인간

급기야 인간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인조인간, 즉 로봇을 상상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그 이전에도 자동화된 인형(automata)들이 선을 보이기는 했지만, 인간의 기능을 대신하고, 노동을 전제로 하는 로봇의 개념은 없었다.

로봇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체코어 로보타(robota)에서 온 말이다. 일하다, 노예, 고된 일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로봇은 육체적 노동을 싫어하는 인간이 노예처럼 일을 부려먹기 위해 만들어낸 인조인간을 의미한다.

영국의 웹스터(Webster) 사전은 로봇을 “An automatic device that performs functions normally ascribed to humans or a machine in the form of a human.”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보통 인간이 해야 할 기능들을 수행하는 자동장치, 또는 인간의 모습을 한 기계”라는 말이다.

▲ 체코 출신의 카렐 차페크는 그의 희곡 <로섬의 만능 로봇>에서 로봇이라는 처음 사용했다. 
이처럼 로봇에는 두 가지 키워드가 있다. 인간의 모습을 닮아 인간과 유사한 기능을 한다는 것, 그리고 인간을 대신해 노동을 한다는 것이다.

상상 속의 로봇을 구체적인 현실 속으로 끄집어 낸 사람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작가 카렐 차페크(Karel Capek, 1890~1938)이다. 그는 1920년에 발표한 희곡 <로섬의 만능로봇(R.U.R., Rossum's Universal Robot)>에서 로봇이라는 이름을 처음 지어냈다. 그러나 그는 형이 처음 사용했다며 공을 형에게 돌린다.

창의적인 희곡으로 손꼽히는 이 작품에서 차페크가 만들어낸 로봇은 육체노동 능력면에서 인간보다 훨씬 뛰어나다. 그러나 인간만이 갖고 있는 사랑, 증오와 같은 감정이나 혼을 갖지는 못하는 인조인간으로 그리고 있다.

이 희곡은 1921년 1월 프라하 국민극장에서 처음으로 공연된 이후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그 후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 공연됐다. 차페크는 어느 날 전차 속에서 사람들로 빽빽하게 가득 차 서로 너무나 불편하게 부대끼면서도 얼굴은 완전히 굳어 있는 무표정한 사람들을 보면서 로봇을 떠올렸다고 한다. 작가의 기발한 영감이 떠오른 것이다.

일제시대를 생각한다면 우리나라에도 비교적 빨리 들어온 편이다. 1920년에 발표된 이 작품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불과 6년 후인 1926년이다. 프롤레타리아 계급문학 작가로 잘 알려진 소설가 박영희가 <인조 노동자>라는 제목으로 번역해서 당시 사회주의운동에 앞장서고 있던 <개벽>誌에 소개했다.

프롤레타리아 작가 김영희가 1926년 <개벽>에 처음 소개

<로섬의 만능로봇>은 외딴 섬에 있는 로봇 공장의 총책임자인 도메인이 편지를 보내기 위해 비서 로봇 마리우스에게 내용을 불러주고 타이핑을 치게 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며, 그 때 헬레나라는 여인이 도메인을 찾아와 공장을 보여줄 것을 부탁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인권연맹의 회원인 헬레나가 공장을 방문한 것은 로봇에 대해 인권을 유린했다며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공장 대표와 결혼하게 된다.

이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로봇은 유럽 각지로 팔려나간다. 로봇이 일상화되자 로봇 해방운동도 함께 일어난다. 로봇은 마모되면 폐품이 되어 신품과 교환하게 되고 인간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로봇은 노동을 통해 점차 지능이 발달하고 인간에 대해 반감을 키우게 돼 결국 인간을 멸망시킨다는 스토리다.

비인간화되어 가는 기계문명 속에서 생산의 효율과 능률만 따지게 된 인간, 또한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문명에 인간이 다시 끌려가고 지배 받는 상황. 이런 것들을 생각하며 작가는 로봇을 상상 속에서 만들어냈다.

극심한 노동과 학대에 반감 품어 인류를 멸망시켜

기계문명에 대한 반발로 로봇을 가공하게 되고, 로봇과 인간의 충돌을 예견하는 줄거리가 흥미롭다. 사실 그동안 많은 공상과학 소설가들이 인간이 로봇에게 지배당하는 비극적인 결말을 예견하면서 기계문명에 빠진 인간사회를 통렬하게 꼬집었다.

로봇에 의해 인간이 멸망하는 비극을 상상한 차페크의 염려에 미리 선을 긋고 나선 이가 있다. 바로 SF소설가 아이작 아시모프(Issac Asimov, 1920~1992)다. 그는 1950년 발간한 장편소설 <아이 로봇(I, Robot)>에서 우리가 잘 아는 로봇 행동에 관한 3가지 원칙을 제안했다.

▲ SF작가 아시모프는 이미 1950년대 로봇을 경계하면서 로봇3원칙을 주장했다. 그 주장이 현실적인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인간을 위협할지도 모를 로봇의 등장에 대비하기 위한 염려가 담겨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로봇 입장에서 보면 노예계약이나 다름 없다.

이러한 문제에 도전장을 낸 사람이 바로 미래학자 짐 데이토(Jim Dator) 하와이 대학 교수다. 그는 로봇에게도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하는 로봇권리장전을 주장했다. 이미 1970년대의 일이다. 그는 로봇과 인간이 상생하고 화합하는 길을 제시한다.

이제 인간은 로봇에게 지능을 심어주는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인간의 지능을 뛰어 넘는 인공지능의 출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아인슈타인과 같은 천재 로봇이 곧 탄생한다는 이야기가 외신에서 끊일 날이 없다.

로봇이 인간과 동등한 지능을 갖게 될 때 로봇공학적인 측면을 뛰어넘어 인간과 로봇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해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할 때다.

이제 로봇에 대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들은 상상이 아니라 바로 현실이라는 점이다. SF작가들에게만 맡길 일이 전혀 아니다.

김형근 편집위원 | hgkim54@naver.com

저작권자 2009.06.17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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