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에는 경기 외에도 흥미있는 요소들이 얼마든지 있다. '주전부리'에서는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만 한번쯤 궁금한 점이 생길 법한 여러가지 사소한 것들을 주제로 한다. 이번에는 '축구선수의 키'에 관해 살펴보겠다.
 한국 올림픽대표팀의 박성화 감독은 지난달 우즈베키스탄, 바레인과 최종예선 5~6차전을 앞두고 192㎝의 장신 수비수 김근환(경희대)을 긴급수혈했다. 그는 실제 경기에서는 본래 포지션과 달리 최전방 공격수로 나섰다. 기존 공격수들이 죄다 빠져나가며 공격이 부진하자 어쩔 수 없이 그의 큰 키를 이용하기 위한 박 감독의 고육지책이었다.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이 96애틀랜타올림픽 대표팀을 구성하면서 한국 축구대표팀에는 신체조건이 또 하나의 커다란 요소로 작용하게 됐다. 이전의 한국축구는 스피드와 근성, 체력을 바탕으로 '많이 뛰는 축구'를 추구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비쇼베츠 감독은 '국제용' 체격을 갖춘 선수를 지나칠 정도로 선호하며 평균 180㎝를 넘는 장신 팀을 만들었다. 힘과 높이로 먼저 수비를 안정적으로 가져간다는 전략이었다. 그때 이후 한국 축구는 신체적 수치상으로 유럽에 그다지 뒤지지 않는 선수구성을 이뤘다. 현재의 국가대표와 올림픽대표팀 명단을 봐도 선수들의 신체 조건이 뛰어나다.
 
 ◇축구선수와 키

 체코의 얀 콜러(202㎝)나 잉글랜드의 피터 크라우치(198㎝), 세르비아의 니콜라 지기치(202㎝)처럼 2m에 이르는 신장을 갖고 있는 장신 공격수들은 키 자체가 하나의 축구 기술이다. 공중을 제압할 수 있는 선수들은 감독에게 작전의 폭을 넓혀준다. 경기가 잘 풀리지 않거나 시간이 없을 때 길고 높게 띄우는 볼도 이런 선수들이 있음으로 해서 또다른 기회가 될 수 있다. 올해 여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카를로스 테베스를 영입했을 때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판단을 두고 말이 많았다. 테베스와 짝이 될 웨인 루니 모두 단신 공격수였기 때문이다. 언론은 맨유에 필요한 존재는 루드 반 니스텔루이 스타일의 '타깃맨'이라고 입을 모았다. 일반적으로 작은 선수 둘보다는 높이와 스피드의 균형을 갖춘 '빅 앤 스몰' 조합이 더욱 쓰이는 편이다. 그래서 각 팀은 크라우치(리버풀) 에마뉴엘 아데바요르(아스널) 디디에 드록바(첼시)처럼 확실하게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는 선수를 갖고 싶어한다.
 골키퍼들은 일반적으로 키가 크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180㎝ 이하인 골키퍼를 프로 레벨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다. 키 큰 골키퍼는 그만큼 리치가 길다. 최고점에 빠르게 도달할 수 있다. 잔루이지 부폰(191㎝) 에드윈 반 데 사르(197㎝) 페트르 체흐(196㎝)처럼 유럽 정상급 골키퍼들의 신장은 팀내에서 1~2위를 다툰다. 한국대표팀의 김용대(188㎝) 정성룡(189㎝) 등도 훤칠한 키를 자랑한다. 오히려 이운재(182㎝)의 키가 작아보일 정도다. 그러나 작은 키의 골키퍼들은 그만큼 낮은 볼에 더 빨리 반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도 하다. 한국과 98프랑월드컵 때 맞붙었던 멕시코의 호르헤 캄포스는 168㎝이라는 작은 신장을 운동 신경으로 극복하며 세계적인 골키퍼로 이름을 날렸다. 이런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골키퍼는 장신들을 위한 포지션임에 틀림없다.
 수비수 역시 키가 중요한 조건이 되는 포지션이다. 수비수들은 상대 공격수들과 경기 내내 끊임없는 몸싸움을 펼쳐야 하고 공중볼 다툼을 벌여야 한다. 국가대표와 올림픽 대표팀의 중앙 수비를 책임지는 김진규(182㎝)-강민수(184㎝)는 건장한 체격의 소유자들이다. 맨유의 리오 퍼디낸드(189㎝)-네마냐 비디치(189㎝), 리버풀의 새미 히피아(195㎝)-제이미 캐러거(185㎝), 첼시의 존 테리(186㎝)-히카르두 카르발류(183㎝)처럼 해외 유명클럽들도 중앙수비에는 확실한 '높이의 벽'을 쌓는다. 레알 마드리드도 올시즌 신체조건이 좋은 크리스토퍼 메첼더(193㎝)와 페페(187㎝)를 영입함으로써 기존의 세르히오 라모스(183㎝)와 파비오 칸나바로(176㎝) 라인에서 약간은 부족해 보였던 점을 보강했다.
 
 ◇신체조건이 주는 선입견

 이탈리아 세리에A 명문 유벤투스의 수석코치로 일했던 장 방스보 덴마크 코펜하겐 대학 교수는 지난 달 27일 '2007청소년(U-17)월드컵 한국대표팀 전술 분석과 청소년 축구 육성 방안' 세미나를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여기에서 1∼3월생 6명, 4∼6월생 12명, 7∼9월생 2명, 10∼12월생 1명인 한국청소년팀 출생 월별 분포도를 보여줬다. 그러면서 "어째서 지도자들이 1~6월생만 뽑는가. 7~12월생은 재능이 없는가"라고 반문했다. 이러한 결과가 나온 이유는 지도자들이 신체적 성장이 보다 잘 된 선수만을 고집하기 때문이라 분석했다.
 이런 결과가 한국에서만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방스보 교수는 지난 해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비슷한 분석결과를 들고 왔다. 유럽 엘리트 축구선수들의 생일 분포도를 조사한 결과 1~3월생이 전체의 45%를 차지하는 반면 10~12월 생은 간신히 5%를 넘는다고 발표했다. 국적과 관계없이 신체발육이 빠른 선수들은 지도자들의 눈에 쉽게 띄지만 결국 이는 잘못된 선입견에서 비롯된다는 게 방스보 교수의 주장이다.
 방스보 교수는 특히 훌륭한 수비수들에게 요구되는 항목으로 스피드, 한 동작에 순간적인 큰 힘을 쓰는 능력, 빠른 방향전환, 이동성 및 유연성을 꼽았다. 또한 인성과 기술, 전술 이해도 및 강한 정신력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신체 능력은 이런 항목 중 하나에 불과할 뿐 한 축구선수의 미래를 결정짓는 요소는 아니다. 그는 현 레알 마드리드 소속인 파비오 칸나바로(34)를 예로 들었다. 칸나바로는 나폴리 유스팀 시절 키가 작은데다 별다른 특기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게다가 등과 가슴이 굽어있는 등 전통적인 축구선수의 몸매가 아니라는 이유로 간신히 연습생 신분으로 입단할 수 있다. 그러나 칸나바로는 약점을 극복하고 훌륭한 수비수로 성장해 인테르밀란과 유벤투스 등 명문팀을 거쳤다. 2006년 이탈리아의 독일월드컵 우승 때 주전멤버로 활약하며 국제축구연맹(FIFA) 올해의 선수상과 유럽 올해의 선수상을 석권하며 선수로 최고의 영예를 안았다.
 
 ◇키가 전부가 아니다

 리오넬 메시는 아디다스 광고에서 11살 때 자신의 성장 호르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키가 작은 만큼 더 날쌨고 공을 절대 공중에 띄우지 않는 나만의 축구 기술을 터득했어"라고 고백했다. 메시의 말처럼 축구에서 신체적 불리함을 극복하고 이름을 남긴 선수는 수없이 많다. 펠레(170㎝) 마라도나(168㎝) 게르트 뮬러(173㎝) 파올로 로시(169㎝) 등 축구와 월드컵 역사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이들은 평균적인 키의 소유자였다.
국제축구연맹(FIFA)에서 '명예 국가 지도자'상을 받은 라우레아노 루이스 전 바르셀로나 감독은 자신의 칼럼에서 축구는 큰 선수들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했다. 루이스는 요즘 감독이나 구단주들은 큰 체격의 선수들을 선호한다면서 그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리그에는 특별할 것 없이 키만 큰 선수들이 넘쳐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특별한 재주를 지닌 작은 선수들은 풋살 경기에서나 찾아보게 될 것"이라며 이는 결국 진정한 축구의 세계를 훼손시키게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루이스는 키 작은 선수들이 최고의 팀을 구성한 예로 프랭크 레이카르트 감독이 이끄는 바르셀로나를 꼽았다. 바르셀로나 선수들은 대체로 라이벌팀의 스쿼드보다 덩치가 작다. 앞에 나온 메시 외에도 호나우디뉴(178㎝) 사비 에르난데스(168㎝) 데코(174㎝) 안드레스 이니에스타(170㎝) 등의 주전선수나 보얀 크르키치(170㎝) 지오바니 도스 산토스(174㎝)와 같은 유망한 신예들은 일반인의 평균키 정도에 불과하다. 팀 내에서 상대적으로 키가 큰 편인 수비수 카를레스 푸욜(179㎝)과 가브리엘 밀리토(178㎝)도 맞상대하는 공격수들에 비해서 체격조건이 불리한 편이다. 그러나 바르셀로나는 선수들의 키와 상관없이 여전히 유럽 최고의 명문구단으로 자리잡고 있다. 티에리 앙리나 야야 투레, 에릭 아비달과 같은 큰 선수가 없던 2004~2007의 바르셀로나의 평균 신장은 더 낮아진다. 그러나 이 기간에 바르셀로나는 2회의 리그 우승과 1회의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아름다운 축구'의 진수를 보여줬다.

 ◇축구선수에게 키보다 중요한 것은

 루이스는 좋은 축구선수가 되는 데는 키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키 작은 선수들이 중앙에서의 세밀한 플레이, 그라운드에 밀착한 개인플레이, 방향전환, 순발력을 이용한 위치 선점 및 변경, 숏패스에 우위를 보일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키 큰 선수들은 고공플레이, 헤딩, 긴 패스에 이은 약속된 플레이, 장거리를 뛰는 능력이 앞선다. 힘을 이용해 상대 선수로부터 볼을 쉽게 지켜낼 수 있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체격조건이 아니다. 축구에 대한 이해와 느낌, 축구선수로서의 지능이다. 그리고 작은 선수들은 불리한 신체 조건을 극복하는 과정 속에 이런 감각을 몸에 익힐 수 있다.
 체육과학연구원의 김광준 박사는 "축구선수에게 이상적인 체격조건은 따로 없다"고 말했다. 김 박사는 "일순간 폭발적인 힘을 낼 수 있는 순발력과 경기 내내 경기력을 유지할 수 있는 지구력, 무엇보다 이를 뒷받침하는 심폐 능력이 오히려 키보다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일반인의 경우 1분당 심박수가 60~80이면 마라톤 선수의 심폐 능력은 30대 초반이다. 그리고 키가 175㎝로 일반인과 별다를 바 없는 박지성은 30대 중반으로 마라톤 선수급 심폐능력을 자랑한다.
 메시는 광고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제 나는 알아. 때로는 아주 나쁜 일이 아주 좋은 결과를 낳기도 한다는 걸"이라고 했다. 메시의 말처럼 키, 그것은 축구선수에게 아무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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