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고츠키, 학이시습, 244쪽, 2009

 

또 다른 대가를 만나다!

세상에는 정말 똑똑한 사람도 많습니다. 러시아(구 소련)의 심리학자이면서, 교육이론가인 비고츠키입니다. 33살에 결핵으로 목숨을 잃었지만 그가 연구한 내용과 업적은 최근에 오면서 더욱 빛을 발하는 모양입니다. 피아제가 장수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계속 발전시킨 것과는 달리 비고츠키는 짧지만 매우 빛나는 연구 성과를 이룩했고, 루리아와 같은 훌륭한 제자를 통해 자신의 연구를 세계에 알리게 됩니다.

 

발달 이론을 제시하다!

피아제와 비슷하게도 비고츠키 역시 발달 이론을 통해 인지를 연구합니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의 심리학은 행동주의 심리학이 지배적인 시기였습니다. 즉 인간의 사고 과정을 내면적으로 살피기 보다는 자극에 대한 반응만을 객관적인 사실로 인정하는 행동주의에 경도된 면이 강했습니다. 반면 인간 사고 과정에 대한 연구는 주로 철학의 연구 주제였는데, 과학적인 검증보다는 지나치게 사변적으로 흘렀습니다.

 

비고츠키는 이러한 두 가지 경향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인간의 사고를 과정 중심에서 살펴야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잘 개선된 과학적인 실험 방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했습니다.

 

특히 비고츠키는 아동의 인지발달을 연구합니다. 위 두 가지 상반된 경향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기 위해서는 인지 발달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것만이 인지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한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말하기 발달 단계의 특별한 의미

비고츠키는 피아제와는 달리 말하기가 아동의 행동과 더불어 인지발달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며, 말하기의 발달에도 일정한 단계가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비고츠키의 연구원이었던 레비나의 실험에서 어려운 과제를 수행하는 아이들은 자기중심적 말하기를 통해 스스로 행동을 통제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말하기 다시 말해 언어의 출현은 바로 자기 통제적인 기능, 자기 계획적인 기능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합니다.

 

아주 어린 유아에게는 행동이 모든 것에 선행하지만 말하기가 점점 발전하면서 아동은 행동 이전에 점차 행동을 계획하게 됩니다. 언어는 행동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발전하면서, 환경에 속박되어 있던 아동이 환경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돕는다는 것입니다.

 

언어의 재발견

비고츠키에게 있어 언어는 인간의 고등심리가 출현하는 근본적인 수단입니다. 피아제가 언어보다는 언어 이전의 사고 원형을 탐구하려 했다면, 비고츠키는 사고의 원형이 언어를 통해 어떻게 고등심리로 발전하는지를 주로 살피고 있습니다.

 

말하기와 기호 습득으로 이어지는 언어의 발전은 인간의 심리 구조를 완전히 재조직합니다. 어떤 면에서 시각에 의존하던 원시적인 사고 형태가 새로운 문명적인 사고로 전환하는데 결정적인 작용은 바로 언어의 역할 때문입니다.

 

비고츠키는 시각과 언어를 비교합니다. 시각은 독립적인 요소등이 동시적으로 지각되는 '전체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고 합니다. 어떤 면에서 원시 인간의 지각은 시각에 의존하는 직접적인 지각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언어가 매개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말은 순차적입니다. 각 요소들이 각자 분리돼 이름 붙여지고 다음에 문장 구조로 연결되기 때문에 말은 근본적으로 '분석적'이라고 합니다.

 

말하기가 발전하게 되면서 인간은 전체적이고 즉각적인 시각에서 점차 순차적이고 분석적인 형태로 지각의 구조를 변화시키게 됩니다. 태고의 원시 지각은 점차 현대 언어에 오염된다고나 할까요? 직관과 통찰적인 사고는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과학의 언어에 희생된다고나 할까요?

 

언어는 아동의 행동에서 선택의 기능을 담당하게 됩니다. 여러 그림이 그려진 건반에서 행동을 지시하는 기호체계가 존재하면, 아동은 스스로 행동을 통제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기호체계는 아동의 심리 구조를 변화시켜 스스로의 행동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발전합니다.

 

아동의 행동 기능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기능은 주의 기능입니다. 여기서 단어나 기호 체계의 지시기능을 받아들인 아동의 주의는 스스로 속박된 지각의 구조로부터 독립해 자신의 심리구조를 재조직화할 수 있다고 합니다. 즉 자신의 주의를 통제해 새로운 구조적 중심을 만들게 됩니다.

 

아까 언어는 순차적이라고 했습니다. 주의를 통해 구조적인 중심을 만든 아동이 순차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순간, 아동의 지각에는 새로운 시간장이 펼쳐집니다. 말을 하는 아동은 역동적인 방식으로 주의를 기울일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즉 과거 활동의 견지에서 현재 상황의 변화를 바라볼 수 있고, 미래의 관점에서 현재의 행동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뇌과학자 이나스가 주장하듯 동물이나 어린 유아의 지각은 '기억된 현재'에 불과하다면, 언어의 등장으로 인간의 지각은 시간속에서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고등 심리구조를 갖게되는 것이죠.

 

여기서 비고츠키는 매우 철학적인 견해가 피력합니다.

"주의장은 지각장으로부터 독립해 역동적인 심리 활동의 한 요소인 시간 위에 자신을 펼칠 수 있다."

 

더 나아가 비고츠키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발달한 지성보다 의도적 활동이 인간과 동물을 더 명확하게 구별해 주는 특성"이라고. 목적지향성이라는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동물이나 어린 유아는 환경에 속박되어 있습니다. 환경의 자극에 반응하는 것이 일반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성장하고 언어를 사용함에 따라 내적인 통제 수단을 갖게 됩니다. 즉 환경에 단지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적 동기와 목표에 따라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동물과 인간의 가장 큰 차이라는 주장입니다.

 

 

기억에 대한 놀라운 견해

생각할수록, 곱씹을수록 놀랍다는 생각뿐입니다.

기억의 발달을 이야기하면서 비고츠키는 언어는 기억을 위한 매듭이라는 견해를 피력합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고등심리를 갖게 되는데, 이때 기억의 기능이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특히 언어를 매개로  기억은 새롭게 조직화되는데, 이것은 마치 어떤 것을 기억하기 위해 매듭이나 표시를 해놓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거죠.

 

기억의 발달에는 3가지 단계가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유아 시기 발달하는 단계로서 직접적으로 환경을 모사하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기호를 보조적인 기억 수단으로 삼는 단계로 아동 시기가 이에 해당합니다. 마지막 단계는 기호가 내면화되어 보조적인 수단없이도 기억하는 성인의 단계입니다.

 

기호와 언어를 이용해 인간은 기억을 재조직합니다. 마치 잊지 않기 위해 우리가 메모를 하는 것처럼 인간은 기호를 보조적인 수단 또는 직접적인 수단으로 삼아 기억을 조직합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 이미 기호 사용이 숙달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보조 수단을 사용하지 않아도 기억을 조직할 수 있습니다.

 

이게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보조적인 수단으로 사용하던 표식이란 뇌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조건입니다. <기억을 찾아서>(뇌과학이야기)에서 파블로프의 조건화 반응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조건화 반응을 말하면서 큰 자극과 작은 자극이 상호연결되면 매우 강력한 기억이 형성된다는 사실을 말한 바 있습니다. 인간이 기억의 수단으로 보조적인 매듭이나 표식 등을 사용하는 것은 기억의 일시적인 연결을 증폭시키는 조건화 반응과 같은 것입니다. 언어가 바로 인간 기억의 매개 기능을 담당하는 매개체라는 사실입니다.

 

사물에 대한 명명이든 동작을 나타내거나 속성을 묘사하는 언어나 기호는 모두 결국 기억을 위한 매개체라는 것이죠. 사실 뇌의 입장에서 언어나 기호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단지 어떤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서 연결된 그 무엇일뿐입니다. 이때 이러한 뇌의 반응 과정에서 언어가 중개되어 있다면 이것은 단서나 조건처럼 기억을 저장하거나 불러오는 수단으로 작용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기억하기 위해 메모하거나 문명이 발달되지 못한 원시 부족들이 표식을 남기는 것은 바로 고도의 고등언어를 사용하기 전단계의 기억 과정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현대 성인의 경우에는 언어를 내면화하는 능력을 구비하고 있기에 굳이 이러한 보조적인 수단을 사용할 필요가 없죠. 참으로 놀라운 견해입니다.

 

사회성과 제스처

언어는 처음에는 보조적인 수단으로 이용되다가 점차 내면화 과정을 통해 성숙된다고 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내면화 단계로 비고츠키는 아동의 제스처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특히 가리킴이 등장하는 것이 바로 언어의 내면화와 비슷한 발달 단계를 갖는다고 합니다.

 

예컨데 어린 아동이 높은 곳에 있는 무엇인가를 집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동은 그것이 손에 닿지 않습니다. 피아제도 비슷한 예를 언급한 바 있는데, 이때 피아제는 이것을 중단된 행동의 반복으로 묘사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비고츠키는 여기서 새로운 견해를 피력합니다. 바로 사회성입니다. 무엇인가를 집으려는 아이는 닿지 않은 물건에 대한 행위를 반복합니다. 이때 현실에서는 이 중단된 행동을 어른이 매개합니다. 바로 어른이 그 물건을 집어줍니다. 바로 사회성이 투영되는 순간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아동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아동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어떤 대상을 가리키면 됩니다. 가리킴, 즉 지시기능은 바로 언어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아동은 가리키는 제스처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언어의 전조적인 형태를 배웁니다. 이때 아이는 대인관계 즉 사회적인 관계를 또 다른 수단으로 하여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킵니다. 문화라는 수단은 아동이 지시기능을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지점입니다.

 

근접발달영역

비고츠키는 크게 발달과 학습의 관계에 있어서 '발달>학습'이라는 입장입니다.

 

일반적인 교육과정이 발달의 목표에만 매달려,  발달의 동태적인 측면, 즉 어떤 조건에서 학습은 발달을 촉진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다시말해 아동의 발달은 자기주도적인 능력만으로 평가할 수 없으며, 외부적인 조건 예를들면 교사의 지도나 또래집단의 협조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도 발달은 이루어진다는 견해를 피력합니다.

 

근접발달영역 개념은 아동의 발달과 학습에 있어서 학습이 갖는 유의미성을 강조하는 주의입니다만 너무 간략해서 좀더 많은 사례나 연구 등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놀이의 재발견

놀이를 비고츠키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물론 아동 시기에 놀이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이 중요한 것인지 정확히 말할 사람 또한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동 발달 시기에서 놀이는 사물과 의미, 행동과 의미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오는 매개체입니다.

시각장에 속박되어 있던 아동은 놀이 과정에서 사물의 속성만을 이용해 의미를 분리시키기 시작합니다. 예를들어 막대기를 이용해 말타기 놀이를 한다고 가정하면, 이때 막대기는 말의 속성을 갖는 그 무엇입니다. 막대기는 말의 속성을 가진 상상의 사물이 됩니다. 놀이를 통해 아이는 시각장의 속박에서 벗어나 의미를 가지고 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도 발달단계가 존재합니다. 아직 아동은 그 의미 뒤에서 사물을 봅니다. 예를들어 막대기 뒤에 있는 말을 상상한다는 거죠. 다른 사물이 말을 대체하는 것에 대해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물의 속성 어디에도 말을 상징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겠죠. 그런 의미에서 아직 아동의 인지 발달은 성인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놀이는 바로 사물과 행동의 구속에 제약되어 있던 아동의 인지 능력을 자유롭게 만드는 과정입니다. 아주 어린 시기에 아동은 사물이나 행동에서 의미를 분리할 수 없습니다. 유치원에 가는 나이 정도는 되어야 의미를 분리해 상상의 나래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때 놀이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합니다.

 

놀이는 또한 아동의 욕망을 자기주도적으로 푸는 과정입니다. 현실에서는 풀 수 없는 욕구도 놀이에서는 자유롭게 발산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이 과정에서 아동은 놀이가 갖는 기본적인 규칙을 준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규칙은 현실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수동적인 규칙과는 다릅니다. 자신이 동의하고 창조하는 스스로가 동의한 규칙입니다. 규칙에 대한 자발적인 동의는 아이의 사회성을 강화시킴은 물론 자신의 욕구를 해소하는 분출구 역할을 수행하도록 돕습니다.

 

결론을 대신하여

비고츠키의 인지발달이론은 전반적으로 매우 의미있고 심도있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러번 곱씹어서 읽어야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 책은 비고츠키 사후 비고츠키가 공식적으로 발표하거나 발표하지 못한 논문이나 자료들을 모아 새롭게 편집한 것입니다. 비록 1900년대 초반 작품들이지만 그 의미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교육학이나 기타 인지과학에 관심있는 분들이 보시면 매우 흥미로워하실 부분이 많습니다. 저도 물론 여러번 숙독해야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그럼 즐겁게 감상하시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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