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뇌가 긁을 읽게 된 역사
책읽는 뇌라고 하는 다소 생경한 표현을 접하고 우선 책이란 단어에 강한 끌림을 받았고 뇌라는 말은 다소 수수께끼라는 의미로 나의 뇌가 반응했음을 기억한다.
이 책의 세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첫번째는 뇌가 책을 읽게된 역사 두번째는 실제적인 방법론 세번째는 뇌가 책을 읽지 못하게 될 때 무슨일이 일어나는지.
          
1.  독서와 독서하는 뇌의 지향점
 첫번째 나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가소성(plasticity)이라는 말이다. 추석 귀향표를 끊기 위해 수원역 역사에서 줄을 서서 책을 처음 보았던 관계로 약간은 무심하게 나의 뇌리를 스쳤던 느낌은 뭔가 회반죽을 하여 사람의 Dead Mask를 뜰 때 회반죽이 얼굴에 엉겨붙어 얼굴의 굴곡을 구석구석 반영하며 제 멋대로 모습을 바꾸며 Copy하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하지만 좀 더 진행하니 Dynamic한 뉴런들의 행동학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생리적 인지적인 변화 그것도 돌이킬 수 없는 변화 말이다. 가소성의 두가지 측면은 처음에 가소적이나 굳으면 가소성이 사라진다는 다소 모순적인 속성을 같이 가진 말인데 이 책의 저자는 뉴련의 연결행위는 돌이킬 수 없다는 강한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그 굳어진 패턴들은 문화와 언어에 따라 다른 문양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프루스트의 독서에 관한 단편을 인용한 부분을 통하여 나의 글자에 대한 최초의 기억을 더듬어 나가니 철수 영희 이런 단어가 떠 올랐다. 하지만 프루스트의 감흥이 가슴을 타고 올라오지는 않았다. 오히려 초등학교 때 백부댁에서 두꺼운 판지에 그림이 그려진 그림책 동화를 통하여 잠자는 숲속의 공주니 아브라람 링컨의 전기를 접했던 기억의 단편들이 담담하게 떠올랐다 가라앉을 뿐이었다. 그리고 책을 많이 사지 못하여 애타하면서 보냈던 사춘기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의 첫번째 페이지를 보면서 현상학적인 개관의 첫귀를 알아먹지 못하여 모골이 송연했던 고교시절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읽으며 음율한 결핵요양원의 기억과 이외수의 "겨울나기"의 나비 한 마리와 해골 등이 휙 휙 지나가면서 책은 나에게 무엇이었던가에 대한 되돌아 봄이 되었다.
          John Dunne 의 passing over라는 개념을 나에게 가장 강하게 다가오게 했던 책은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였다. 일종의 성장소설(Bildungsroman)로 "차륜밑에서" 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을유문화사인가 어떤 출판사의 책을 읽은 것 같은데 학업이라는 무게때문에 동화되기가 쉬웠던 책이었다. 어딘가로 유월(逾越)한다는 것은 책의 경제학에서 볼 때 굉장한 매력이다.비록 간접경험이긴 하지만 경험의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제거하는 굉장한 효과를 지닌 부분이 틀림없다. 물론  느낌 감성지수가 높아야 그 효율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에 독서의 전제는 단계적인 감정의 성장이 분명하다. 이 책의 작가도 그 점을 자주 강조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어휘의 레퍼토리를 형성할 때 독자인 뇌는 어휘와 그 의미의 조합에서 일 대 다의 의미를 생성하고 찾아낸다는  David Swinney의 이론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상식적으로 체득하고 있으며 특히 영어학습을 할 때 가장 고민하는 부분중의 하나인데 이런 스트레스를 통하여 우리안의 reaction은 "이해하기"라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안의 모든 가능한 의미의 극단을 추구하고 그런 작업의 역동성이 뇌의 가소성을 이용하여 굴곡하고 우회하는 뇌의 패턴을 그린다는 사실은 독서에 가끔 어려움을 느꼈던 과거 현재의 모든 기억들에게 용기를 주기에 충분하였다. working memory가 충분하지 못한 나로서는 책을 읽는 중 인물들의 이름이 헛갈려 자주 책의 앞 부분을 들쳐보곤 했던 기억이 새록 새록하다. 그것은 순간적인 당황이었지만 그런 행위들이 결국 나의 독서 스파링을 강화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뉴런은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에 의해 확립되고 지배를 받는다" 고 하는 측면에서 나의 유전자는 결코 우수하지 않았던 모양인데 환경을 통한 고군분투도 의미가 았었던 모양이다.
          최초의 독서는 뮬체인지에 사용된 시각부위가 "특화의 특화" 즉 시각적으로 외부 사물의 차이를 판별하여 생존과 연결하던 능력이 문자라고 하는 또 다른 상징을 분별하는 특화를 통하여 인류는 문명 탄생의 배앓이를 했던 모양이다. 이것은 기존의 뇌의 구조를 새로이 연결하고 정보의 패턴을 세밀하게 인지하기 위해 특화영역을 형성하고 이를 자동화 시키는 뇌의 메카니즘 이 갖는 그 능력을 통하여 가능하였다 한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하바드 대학의 Stephen Kosslyn이 즘명한 것처럼 세포망이 오랫동안 세포망을 형성하기를 계속하면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표상을 생성해 낸다는 것이다. 이 표상을 자동처리 영역안에서 처리하면서 속사포처럼 발화(rapid fire)하는 능력이 형성되고 나아가서 text의 한계를 뛰어 넘게된다. 이것은 마치 코마네치에게 지도받은 어린아이가 코마네치를 능가하는 선수가 되는 것처럼 다이나믹하고 생산적인 과정이다. 
          "독서란 뉴런과 지성이 회로처럼 에두르는 행위다. 독서는 눈에 들어온 텍스트가 전달해 주는 직접적인 메시지뿐만 아니라 독자의 추론과 생각에서 비롯된 예측불허의 간접적 에두름으로 인해 보다 풍성해 진다." 이 말을 통하여 직접 메시지에  많이 의존하는 독서 습관을 되돌아 보게 된다. 해리 포터가 호그와트에서 생활하는 재미있는 장면들을 즐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이지 않는 작가가 그리지 않는 부분들을 상상하고 즐긴다면 독서가 더 풍성해 진다는 말이다. 여기서 다시 가소성의 한가지 의미를 저자는 추가하고 있는데 뇌이든 독서의 생성적 역량이든 주어진 것이 고유성를 뛰어 넘을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지적 도약인데 독서는 인지적 도약이 가능한 뇌의 역량을 반영하기도 하고 재현도 한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결국 독서라 그 경험이 최종 목적이 아니라 변형된 사고 방식이 목적이면 이것은
비유적인 측면에서 변화된 뇌로 가는 지향점이 있다고 한다.

                2. 아동의 독서 학습과 그 변화
          알파벳을 통한 인지적 혁신에 걸린 2000년은 오늘날 아이들이 문자문화를 통하여 그 식견에 이르는 날 수와 동일하다. 이것은 천일야화에서 생존을 위하여 매일밤 왕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샤라자데가 이야기 하였던 날 수의 두 배이다. 생 후 5년동안 수 많은 청각 지각 시각을 통하여 들어가는 미가공 재료들이 후일 아이의 독서능력을 예견하는 척도가 된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상식이지만 정연한 학적 논리로 접한 것은 처음이다. 역시 인류의 경험치는 일리가 있는 것이 많다.
유대인의 bed side story효과는 단지 bed side에서만 이루진 것이 아니라 토라를 외우게 하는 그들이 습성이 굉장한 지적 파괴력을 가지고 그들 가운데 역량을 키워 주었던 모양이다. 우리 서당이 구술음 노출과 그 문자와의 접점이 되었던 것은 참 좋은 문화이었는데 오늘날 유치원 문화는 너무너무 약한 것이라 사료된다. 나도 우리 아이들에게 많이 소홀했던 과거가 뼈아프게 다가온다. 극성그럽게 읽어주고 이야기 해주고 밥상 머리에서 대화하는 이 모든 것이 주효하다. 밥 먹을 때 조용히 하라는 유교적인 발상은 서당문화와 오히려 배치되는 모순을 안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발명가 예술과 건축가 컴퓨터 전문가들이 어릴 적 난독증을 겪었다는 새로운 계시와도 같은 사실이다. 토마스 에디슨, 아인슈타인, 레오나르드다빈치, 오위스트 로댕 등이다. 이것은 창조성과의 접점인데 저자는 아직은 미지의 세계이며 자신도 잘 모름을 인정한다. 그리고 아울러 구굴이 가져다 주는 순간적이고 동시 다발적인 정보의 전달이 가져다 주는 미지의 위험을 느끼기는 하지만 아직을 명확히 손에 잡히지 위험이다. 이것은 테크닉이 지적능력을 대치할 것인가 하는 심각한 질문이다. 내가 보기엔 TV나 인터넷이 가져다 주는 지식의 수동성이 책을 읽는다고 하는 능동성의 행위와는 전혀 다른 행위양식이기 때문에 뇌에도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리지 않을까 짐작해 보고 말았다. 뇌는 뿌리깊은 생산성(generativity)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앞으로의 문명이 이를 역행하는 방향으로 갈 때 시금석으로 삼아 그 문화를 시험해 보는 바로메터가 되어야 한다고 느낀다. 

  
3. 뇌가 독서에 적응한 방법 ,최초의 문자체계
  "독서는 언어적 대발견(breakthrough)의 총합이다."  뇌가 독서에 적응한 역사적 추이를 밝힌 이 장은 좀 까다롭기도 하였지만 상당히 흥미로웠다.
문자의 발생의 의미론적 결론은

첫번째 추상적인 것은 모두 표상화 할 수 있다,

두번째 상징체계가 문화전반을 보전할 수 있다는 믿음

세번 째 음성과 상징의 대응관계대한 인식이다.
 상징 읽기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뇌는 인지영역과 언어적 연결이 연결되어야 하고 또 하나는 대뇌의(cerebral)의 연결이라고 한다. 그리고 의미있는 상징으로 해석을 하는 능력은 레이셜이 말하는 대로 인접부위  즉 대뇌의 측두엽(temporal lobe: 청각 및 언어 프로세스에 개입), 두정엽(parietal lobe :언어에 관련된 다양한 프로세스와 공간 및  연산기능 참여)에 연결시켜 일을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상징화는 인간의 뇌에서 가장 중요한 특성 두 가지 즉 특화의 역량과 연합 영역들 사이에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 내는 역량을 이용하고확장한다. 결국 인간및 영장류는 뇌의 연합영역이 매우 넓은 샘이 되는데 이 개념은 한 가지 중요한 힌트를 내게 주었다. 독서의 방법론도 특화적인 것만 배양해서는 뇌의 발달을 저해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자신이 잘하는 분야 혹은 관심있는 분야만 보기보다 일반적인 두루두루 섭렵하는 바탕위 그런 특화된 독서를 해야 그 특화성이 배가 된다는 깨달음이다. 장한나가 첼리스트로서 그 음악적 연습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독서를 통하여 그 음악성을 돕는 원리와 비슷하다 하겠다.
 쐐기문자 신성문자 수메르인들의 독서 교수법 등은 요즈음의 포닉스(phonics)로서 수렴된다 하겠다. 윤성생 파닉스를 깔보았던 나였는데 이 책을 읽고 영어나 언어 학습시 포닉스(phonics)학습을 무시하면 안되겠다는 생각를 강하게 갖게되는 계기가 되었다.
 아카드어와 이집트 신성문자는 형태음소적 의미가 강조된다 하겠다. 즉 스펠링안에 형태소와 음소가 모두 내포되었다는 점 이것은 우리가 음소 위주의 한국어를 배우고 표의적인 중국어를 배울 때 나오는 뇌의 구조를 갖게 되는데 이것은 역사의 통시적 반복이라 하겠다. 개인적으로는 한자 학습을 계속하여 뇌의 의미를 활성화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이 되었다 논어나 중용에 한 번 도전해 볼 일이다.

 

4. 알파벳을 싫어한 소크라테스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를 외우며 고대 그리이스를 방랑했던 음유시인 호메로스가 그 긴 이야기를 외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뇌의 구조가  흥부가를 완창하는 소리꾼들의 뇌와 같을 것이다. 그들은 소리를 통하여 소리를 외우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뇌는 이 경우에도 아주 적응성이 좋다 물론 그 과정이 힘들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데 왜 알파벳이 타났을까?

독서에 적응하는 뇌의 요건을 가지기 위해 반드시 알파벳이 될 수 있는 요건과 뇌가 알파벳을 읽기 위해서 고유한 지적자원이 필요한가를 따져야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알파벳의 요건은 앗시리아 학자인 요리 코헨이 언급했듯이 " 네이티브 스피커가 들었을 때 모호하지 않는 구어로 표시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문자적 표시"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음절을 구분하여 뇌가 인식하는 것이 구술언어가 문자화 될 때 최소 구성요소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고대 그리이스에서 음성의 보조역으로 존재했던 알파벳이 그 폭발적 잠재력으로 기억과 인지의 새로운 차원을 개발할 줄 어떻게 알았으랴. 이것이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는 사항이다. 카드모스(Cadmos)왕이 셈계쪽에서 알파벳을 처음 들여왔다는 신화는 그 진위와는 관계없이 그 의미는 매우 심각했다는 것이 현재의 상황은 말해 주고 있다.

알파벳의 발명이 뇌의 구조를 바꿔왔다는 것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알파벳간의 효율성문제는 어느 알파벳이 더 우위에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밝혀져 있는 듯 하다. 요즘 인터넷에 떠 다니는 "영어 못하는 한국인의 뇌"라는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그 광고의 허위성을 이번에 알게되었다. 한국어를 사용하여 살아온 사람들의 뇌의 활용 구조가 다를 뿐임을 무시한 광고였던 것이다. 영어를 사용하는 같은 부위를 사용해야 영어를 잘하는 것일까 이 책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뇌의 가소성은 어떤 한계든 제한을 넘어서는 힘이 있음을 이번에 배우게 되었다. 물론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개인의 책임이 되는 것이다. 뇌의 구조를 탓할 게 아니라 뇌의 구조를 바꾸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 뿐이란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심지어는 민주화의 발전 뿐 아니라 그리이스의 알파벳이 보급된 시기에 문화,예술, 철학,과학이 심오하고 왕성하게  개화되었다는 사실은 강력한 상호연관적 증거를 제공해 준다.그리이스는 이 문자와 더불어 위대한 고전문화를 꽃 피웠는데 우리의 한글 고전문화는 어떤지 한 번 돌아보게 된다. 민담이나 구술문학들이 체계적으로 채집되어 갈고 닭아 천자문을 읽어 학동들에게 체계적으로 제공되고 발전시켜 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기술서들을 한글로 기록하여 비격진천뢰니 거북선등의 설계서가 한글로 기록되어 문서로 남겨졌다면 그리고 동의보감이 국어로 기록되었다면 우리의 기술 ,의학,문학 등 발전할 수 있는 부분이 너무 너무 많았음을 생각하여 본다. 그 한글의 효용성이 뇌를 자극하고 또 전수되는 선순환을 겪었다면 비록 쇄국을 했을지라도 우리 자체 속에서 굉장한 수준을 구가했을 것이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생각이 좀 많이 다르다고 한다.  구술 언어를 통하여 전달되는 단어와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 아래 숨겨진 믿음과 전제를 궤뚫어 볼 수 있어야 하며 호메로스의 시 구절, 정치적 이슈, 단어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의문에 부치고 원칙적인 사고의 본질을 명확하게 이해하라고 했던 것이다. 한 권의 책도 남기지 않았던 소크라테스는 뭘 말하려고 했을까? 심지어는 문자화된 말이 사회에 심각한 해를 끼친다고 한 저의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은 레르 비고츠기의 "사고와 언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말하는 선생과 학생과의 강력한 생성적 관계를 이야기하였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요즈음 온라인 강의가 활성화 되어있지만 많은 선생님들이 인정하시는 대로 오프라인에서 서로 공감하면서 지식을 전달할 때 오는 그 강력한 영향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같은 학습이지만 그 효율성을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까지는 연구는 글을 통하여 더욱 강력한 새로운 사고의 체계가 형성되고 또 사고 체계를 변형할 수 있다는 강력한 역사적 반증을 제공하고 있기에 소크라테스의 염려는 글쓰기가 시작된지 얼마되지 않은 상황의 짧은 경험에서 추론한 사실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현금의 네이버나 구글에서 물어봐서 아는 아이들이나 네티즌의 지식들이 피상적이고 거짓된 느낌을 가져다 주어 지식을 실제로 일구어 발효된 소주를 받아내듯 씨를 뿌려 가을에 거두는 수확처럼 책을 백번 읽어 뜻이 나타나기를 기다려 체득하는 지식이 아닌 장식적인 지식이 되어 그 사람을 변화 시키고 사고의 체계를 발전키는 지식에 이를기가 심히 어렵다는 사실이다. 즉 글이냐 말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경로이든지 나를 변화시키고 나의 뇌를 발전시키고 나를 변화시키는 지식이냐 아니냐의 문제라는 점에서 소크라테스의 염려를 받아 드려야 할 것이라고 본다.

 

 

Part II 뇌가 독서를 배우는 방법

 코르네이 추곱스키(Kornei Chukovsky)가 아이의 천재성이라 부른 개념은 대학에서 언어학개론 시간에 Chomsky가 주장한 LAD (Language Acquisition Device)를 생각나게 한다. 12세 이전의(물론 정확한 경계는 여러 이론이 있겠지만) 아이들에게는 언어에 관한한 폭발적인 학습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론이다. LAD가 있기 때문에 어느 문화권에 접촉하여도 언어를 배워내며 Native가 될 수 있다는 것인데 저자는 이에 더하여 좀 더 상세한 뇌의 언어 습득 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이 언어 습득장치 혹은 언어의 천재성은 구술언어에서 고스란히 발휘된다고 하니 아이들에게 늘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얼마나 긴요한지...유대인들이 모세오경을 14세까지 모두 외우게 하는데 공교롭게도 그 경계가 이 학자들이 주장하는 나이의 경계와 흡사하다. 유대인의 천재성은 결코 우연이나 DNA 의 산물이 아님을 다시 알게되었다. 그리고 시니고그(유대인 회당)에서 랍비들이 서로 큰 소리로 아이들과 토론하는 학통이 있는데 이런 방법론들이 새삼스러이 마음에 다가온다. 이러한 모든 행위들이 의미론적 발달 통사론적 발달로 이어진다는데 이것들이 바로 생성되어야 될 때 적절하게 민족적으로 생성되니 그 저력이야 말 해 무엇하리.

 또 하나 장 피아.(Jean Piaget)가 말 했듯이 '자기중심적'이 감정의 발달단계의 아이들이  문자학습을 통하여 사회적,정서적, 인지적 능력의 하나인 타인의 입장에 서는 토대를 구축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책의 언어는 개념적이고 관념적인 언어인데 이런 구술언어와의 차이에 내가 모르는 비밀이 있었다. "유추능력" 이 그것인데 단순히 일 대 일 대응이 아닌 문자와의 대응 한 단어를 문어적인 비유로 바꾸었을 때 뇌가 따라가는 과정을 통하여 문자학습은 스키마타(schemata)를 구조화 시켜 간다고 한다. Storytelling이 주는 유형의 정형성이 비슷한 패턴에 익숙하게 하여 같은 흐름을 만날 때 쉽게 유추하고 정보를 섭취하고 인지하게 되는 원리이다. 옛날 옛날에 하고 인물 몇 명만 말하면 이야기가 뻔하게 머리에 그려지는 것은 우리 성인들이 머리에 스크마타가 형성되었기 때문인데 그런 과정을 겪는 것이 뇌를 바꾸게 하는데 큰 기여를 하고 유추능력을 키우는 단초가 된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아이들에게도 무조건 이야가를 읽혀줄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패턴을 따라 골고루 읽혀주는 것이 독서능력을 배가 시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성인들도 같은 쟝르만 읽는 것 보다는 여러 쟝르를 접하는 것이 더 이로울 것이라 여겨진다. 중요한 점이다.

 발터 벤야민이 naming(이름 붙이기)이 인간의 본질적인 활동이라고 확신한 것은 예지였다. 시각적으로 표상된 추상적 문자를 상징의 이름으로 재생산하는 능력은 브레인 스캔닝시 같은 영역에서 이루어지며 이 활동은 독서할 준비가 되었다고 하는 강력한 예측도구라고 한다.

그리고 이 활동은뉴련의 축색의 마이엘린화(myelination)을 촉진하여 뉴련의 전도성을 생리적으로 높이고 독서력을 가속화 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사람은 5세 이전에 운동부위가 모두 마이엘린화 되므로 독서의 시작시기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잣대가 되겠다. 오래전에 보았던 "렌조 오일"이라는 영화가 생각이 난다. 뇌와 신경의 회백색 수축증이라는 병에 걸린 주인공이 외부와의 소통경로를 서서히 잃어버리게 되는데 그의 아버지가 비 전문가로서 이 분야에 뛰어들어 이 병의 중요한 원인 가운데 마이엘린이 소멸된다는 사실을 나중에 발견하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운동영역의 뉴런의 마이엘린이 5세에 형성이 완료된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결국 저자는 독서는저절로 이루어 질 수 없다는 소 결론을 내린다. 태어나서 2000일 동안 신경의 형성과  뇌의 자연 형성과 더불어 이에 상응하는 부모님들이 구성해줘야 하는 독서에 적합한 환경에의 노출이 없으면 독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독서초기 발달 과정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중용한 사실은 감정(feeling)의 문제이다. 문자속에 문장속에 있는 유추를 발견할 뿐 아니라 그 속에 자신을 이입시켜 재미를 느끼는 과정 이것은 감정의 개발 과정이다. 책을 읽는 일이 가져다 주는 행복에 빠지는 것 이것이 이 단계에서 아이들이 체득해야 하는 중요한 결실이며 이것은 향 후 평생독서에 큰 밑 거름이 된다고 한다. 이 감정이에서 전략적 독서가로 되어가는 과정에서 마이클 프레슬리(Mchael Pressley)가 말하는 교사의 명시적 지도 자신의 독서의욕이 계속되면서  안나마리 팰팰린사(Annemarie Palincsar)의 소크라테스적인 상호 교수법이 가미되면 예상 추론 능력이 배가되는 것이다. 이것을 뇌의 관점에서 정리하면 데이빗 로즈(David Rese)의 표현대로 패턴인지. 전략기획, 감정을 느끼는 것이라고 축약하여 표현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시간이다. 순간적으로 느끼는 양이 감정,유추의 양이 점 점 더  배가되는 것이다.

 기억의 종류는 일화기억(episidic memory), 의미기억(semantic memory), 서술기억(declarative memory), 절차기억(procedual memeory)등이 있는데 특히 독서와 관련된 메모리는 작동기억이라고 한다.독서하는 동안 단어에 대한 시각인지 후 단어에 관련된 정보를 잡아두는 능력이다.이 때 이웃하는 단어들이 많을 수록 이 기억은 강력해 진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단어학습을 시킬 때 유사어 반의어등 관련 사항을 많이 엮어 주는 것이 그 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자 이렇게 하여 독서는 마침내 무슨 일을 하는가.

저자는 독서는 삶을 바꾼다고 일갈하고 있다. 그것도 다양한 한 개체의 일생에서 다양한 삶의 변화가 독서하는 연령에 따라 다 달라진다는 것이다. 하여 알베를토 망구엘의 말처럼 " 텍스트와 인생의 경험의 사이의 역동적 상호작용은 양방향적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뇌는 좌뇌와 우뇌의 브로카영역, 우뇌의 각회 영역, 소뇌의 우측 반구를 포함하여 다양한 측두 영역과 두정 영역들이 보다 많이 개입하는 관록있는 뇌가 되는 것이다.

 

PART III 뇌가 독서를  배우지 못하는 경우

 

" 독서를 하느니 차라리 욕조 틀 청소를 하겠어요 " 라고 한 난독증을 겪는 아이가 있었다.

난독증의 정의는 폴 쉴더( Paul Schilder) " 문자와 음성을 연결시키지 못하고 말로 표현된 낱말에서 그 안에 든 음성을 구별해 내지 못하는 사람" 이라고 했다. 난독증은 노먼 게슈윈드는  단절증후군(disconnexion syndrome)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시각체계와 독서회로 연결에 방해가 일어났다는 뜻이다. 이런 기존 체계의 손상외에도 선천적으로 시각정보를 처리하는 속도가 일반 독서가와 상당히 다른 점인데 뇌 구조들 사이에 자동성이 달성 되지 못하여 독서회로에 참여하는 각 부분에 충분한 시간이 할당되지 못한다는 것이 기본 전제다켐브리지 대학의 우샤 고스와미는 그들이 평상시 말을 할 때 리듬에 둔감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은 청각과 시각사이에는 '비동시성'이라는 부르는 시간상의 Gap이 존재하는데 이것을 동기화 시키는 영역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아 독서에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또 하나의 가설은 구조간 회로의 연결장애라고 보는 것으로 브로드만 영역 37이라고 부르는 영역이 일반인과 동일한 방식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관찰되었다. 그러나 난독증을 가장 포괄적이고 독특하게 표현한 사무엘 T. 오튼(Samuel T. Orton)은 난독증을 '스트레포심볼리아(strephosymbolia ,상징도착증,대칭인지)리고 불렀다. 좌뇌와 우뇌의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아 시각 공간적 혼동, 문자반전 및 독서, 스펠링, 글자쓰기에 문제들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설들은 많지만 난독증의 현상은 더 많다는 것이 문제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러나 어른이든 아이이든 독서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지능이 낮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더욱이 종합적인 지원시스템이  처음 문제가 나타났을 때 부터 그 아이가 자립적이고 유창한 독서가가 될 때까지 종합적인 지원시스템이 가동되지 않으면 장애 때문에 겪은 좌절감은 학습장애, 심지어는 범죄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무서운 잠재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잠재력이 헛되이 낭비되어 시회에 큰 손실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우리가 우스갯 소리로 아인슈타인이 한국에 오면 다른 과목 때문에 힘을 쓰지 못하여 짜장면 배달이나 해야 된다고 말하는 것이 사실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는 셈이 된다.

 그러나 난독증의 놀라만한 비밀은 여기에 있다. 앤디 워호르피카소 ,아인슈타인, 대니 글로버, 키이라 나이틀리. 우피 골드버그 등에서 보듯 난독증을 겼었던 인사들이  우수한 사고력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는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천적이냐 뇌의 가소성으로 말미암는 후천적인 것이냐는 문제가 있지만 짐작키로는 두 가지가 다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저자도 아직 확답을 내리고 있지 못한는 부분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신천지라 말하기도 한다. 난도증 아이들의 잠재적 기여를 보호하는 것을 중대한 사회적 이익을 도모하는 관점에서 저자는 보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에 대한 준비가 되었는가? 길노암(Gil Noam)의 말대로 차세대 전구가 발명될 때까지 그들이 난관을 이겨내고 회복하는 힘을 기를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하는데 우리는 너무 무지한 가운데 있는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독서의 가장 커다란 덕 소크라테스같은 위대한 철인도 미처 알지 못했던 것 즉 기존의 생각보다 더 심오한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뇌를 자유롭게 해방기켜 준다는 사실을 마음에 담는다. 프루스트는 이 비밀을 알고 있었다 우리도 잘 알고 있다. 갑자기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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