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의지, 나의 사상, 나의 열정 문장속의 책(Old)

2009/01/16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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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는 자신의 전임자들이 인간에게 투사해놓았던 모든 관념적인 것을 가혹할 정도로 매몰차게 지워 없앴고,  동시에 부정적인 감정들을 전면에 부각시켰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이러한 철학적인 태도는 전쟁의 경험에서 파생된 것이었고,  오로지 이러한 관점에서 그 의미를 파악함에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태와 공허함에 대한 사르트르의 저항정신도 이에 못지않게 강력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나치 사회주의자에 대한 저항 그리고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구축하고자 하는 시도로 나타났다.    "인간의 실체는 그가 행동으로 옮겨놓은 것에서 찾아야 한다."    또는   "현실은 오로지 행위 속에 있을 뿐" 이라는 철학적인 요청은 그의 철학 이곳저곳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자주 등장하였다.  허무함이라는 관념적 몽상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사르트르의 비판은 무자비한 것이었다.  이들은 자기 자신과 책임의식으로부터 도피를 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행위는 결국 자기기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바로 이와 같은 문제점에서 야심만만한 과제를 새롭게 찾아내었다.  [존재와 무]에 이어 발표된 저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그는 철학자를 계몽주의자로 정의하고,  그들의 새로운 임무는 인간들이 자유를 향유하고 이를 통하여 자기 스스로를 인간으로 실현해내도록 촉구하는 데에 있음을 밝혀놓았다.    지금까지 이 세계에 이미 내던져진 존재라는 의미에서 인간의 피투성(被投性)이 실존적인 필연성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인간이 자기 자신의 열린 미래를 위하여 자기 스스로를 만들어나가는 기투성(企投性)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주목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의 기투이다.  이러한 기투가 전제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없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입안해놓은 것과 동격이 되는 것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의 의지는 이러한 기투성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결과에 불과하며,  인간이 미래에 대한 구상을 세우면 인간의 의지는 거기에 맞추어서 부수적으로 따라붙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의식적인 결단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리는 결단은 결국 자기 자신의 미래에 대한 기투로부터 파생된다."  는 주장은 나의 여자친구 로잘리를 사로잡았을 뿐만이 아니라,  전후의 지성인들의 삶에서도 일종의 좌표가 되었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기투는 매우 개별적인 개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일종의 유행풍조가 되어 엇비슷한 모습으로 거리에 등장하였다.  검은색 계통의 옷을 입고 음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실존주의자들의 하루는 지하실의 재즈 카페와 대학교,  영화관과 커피숍 사이를 전전하며 지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의 삶은 1980년에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흥미진진한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는 20세기 프랑스의 지성인들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으며 그 자신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도덕적인 심급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에 대한 사르트르의 주장이 과연 현실성이 있는지,  이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한 사람의 개인이 내적 외적인 압박에서 완전히 벗어나 마치 예술가가 작품을 만들어내듯이 자기 스스로를 완벽하게 기투해낼 수 있을까?  자기 스스로의 미래에 대한 '기획'을 자신의 의지에 앞서서 만들어낸다는 사르트르의 주장이 옳다면 인간은 모든 사회적인 압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그야말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완전한 지배자가 될 것이다.  자신의 충동,  관습, 열망, 도덕관념, 어린시절부터 몸에 밴 습관들을 자유자재로 제어할 수 있고,  외적 또는 내적인 상황을 판단하고 이를 변화시키는 데에는 단지 용기만 있으면 된다는 말이 된다.  사르트르의 철학에서 '자기실현' 이라는 의미는 따라서 우리의 영혼을 구성하는 재고로 관리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팔다 남은 물건을 진열대에서 깨끗이 걷어내고 보다 흥미로운 물건들로 채워넣으면 해결되는 식이다.  예를 들면 내가 받았던 소민적인 교육이 혹시 걸림돌이 된다면?  그렇다면 이를 벗어던져 버리고 예술가 또는 플레이보이로서 내일을 생각하지 말고 매 순간 긴장이 넘치는 삶을 선택하면 된다.  이미 칸트도 자기 스스로의 문제에 대해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단을 내리는 엄청난 힘을 인간의 의지가 행사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자유의지에 따르는 행동은 동시에 모두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 사르트르의 태도는 칸트와 유사하였다.  사르트르는 칸트의 '도덕 법칙'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는 자기결단의 산물이고 자기결단은 선한 것이라는 칸트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가 지닌 자유에 관한 문제는 그 자체를 별도의 사안으로 다루어야 할 만큼 복잡하다.  이미 앞서서 살펴본 것처럼 오늘날 대부분의 뇌 연구자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사르트르와는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자유스러운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타고난 성향,  자신이 겪은 경험 그리고 자신이 받은 교육의 산물이라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것은 명확하게 전면에 드러나 있는 의식이 아니라,  어둠에 숨겨져 있는 무의식이라는 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   예를  들어보면 내가 수많은 외부적인 강요들로부터 벗어났다고 해도 내가 마음속 깊이 간직한 소망, 목표 그리고 동경들까지 벗어던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달리 말해서 내가 나의 욕망을 마음대로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나의 욕망이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뇌 연구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바로 이런 이유에서 내가 나를 '새롭게 창안해내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자유 철학이 아직도 매력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뇌 연구가들의 위와 같은 견해는 나에게 결코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로베르트 무질의 소설 [특성 없는 남자]의 첫머리는 '현실 감각'이외에도 '가능성 감각'이라는 것도 깊이 생각하도록 만들었는데,  수많은 대안을 찾아낼 수 있는 안목을 기르는 것은 사실상 나의 유년 시절부터 지속되어 온 열망이었다.  그러나 실현시킬 수 있는 자유의지라는 것이 사실상 없다고 한다면 가능성 감각이란 것도 결국 말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내가 겪은 경험,  내가 받은 교육,  내가 쌓은 학식을 통해서 내가 이미 사회적인 부자유를 겪을 운명에 처해 있다고 한다면,  나는 결국 나의 행위를 통해서 사회적인 프로그램을 부지불식간에 반복하고,  그 과정에서 나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규범을 충족시키고 그리고 사회에서 나에게 부여해준 각본을 성공적으로 따르고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내가 나의 의지,  나의 사상,  나의 열정의 산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알고 보니,  이데올로기와 각종 문화적인 표본이 반영된 결과물에 지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바꾸어보면 나에게는 나의 의지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고,  나의 독자적 상상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것들의 명의만 살짝 바꾸어서 마치 나의 것이나 되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뇌 연구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나의 의지 또는 나의 사상이라는 것은 별다른 것이 아니었다.  브레멘의 뇌 연구자 게르하르트 로트에 의하면 내가 행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유의지는 사실상 내가 목표로 하고 있는 자유의지에 불과하다.    우리의 의식이 우리 스스로를 터무니 없이 과대평가하는 것이 그 반증이다.  우리의 이마 뒤에 있는 전두렵 피질이 자신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이루어낸 독자적인 업적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을 따져보아도 그 역할은 그저 보조자에 지나지 않았다.   "행동을 제어하는 대뇌변연계를 전문가라고 한다면 우리의 이성이라는 것은 이를 보조해주는 스태프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행동을 '촉발시키는'  근원적인 결정권자는 간뇌에 위치한다.   간뇌는 복잡한 사고나 가치평가의 능력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경험과 각종 정서를 관장하는 전문가이자 동시에 감정의 제국을 핵심적으로 조율해주는 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정서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것' 인지 여부를 판단하여 최종적인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대뇌 변연계이다. 

 

 

 

무의식의 어두운 힘이 여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은 굳이 부인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무의식으로부터 무엇이 파생되는가에 있다.  게르하르트 로트의 입장에서 보면 자유는 위에서도 서술한 것처럼 완전한 환상이다.  그러나 내가 나의 행동 동기를 완벽하게 꿰뚫어보는 경우는 자유의지가 사실상 개입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내가 나 자신을 제대로 통찰하고 제어할 수 있다면,  나는 그만큼 무의식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고 동시에 나에게 일정한 자유의지가 제대로 행사되고 있다는 의미가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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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율적으로 자기 자신을 통제하기 때문에 어느 면에서는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인 삶의 역사에 포위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곧 우리의 경험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자신의 경험이라는 틀 속에 갇힌 존재이지만 동시에 그 틀 안에서의 변화는 충분히 가능하고,  따라서 스스로의 자유를 지나치게 크게 또는 작게 설정해 놓을 필요는 없다.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평가하는 것이 자기 발전을 위한 확실한 첫걸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르트르가 설정해 놓은 내면적인 자유를 최대한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과도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될 것이다.  실존주의적 인간은 계획의 주체가 아니라 실존주의 철학에서 요구하는 의지에 자기 자신을 무차별적으로 맞추어 나가야 하는 객체가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윤리적 요청과 마찬가지로 실존주의의 요청은 무차별적이고 지나치게 과도한 면이 있는 것이다.

 

 

 

이성과 감정은 매우 강한 상호의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미리 예측한 그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고,  이는 좋은 뜻을 지닌 수많은 사상들이 현실화되지 못하고 사장되는 이유가 된다.    알코올 중독자가 술을 끊겠다는 결심을 내놓고,  직장인이 상사에게 직언을 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하지만,  막상 때가 되면 유야무야가 되어버리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이다.  현실화되지 못하고 꿈에 머물고 만 소망들이 어디 한둘일까?   이러한 일은 한 개인에게는 분명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지만,  그러나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반드시 나쁜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인간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개인적인 모든 소망을 스스로 실현하겠다고 나서는 세상은 분명 파라다이스는 아닐 것이다.  또한 외적인 강요들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는 점도 역시 염두에 두어야만 할 것이다.  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복원력과 안정성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가족의 속박,  고향에 대한 애증,  소중한 회상으로부터 벗어나서 얻은 자유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으로 가는 길을 보장해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심리적인 특성이 행동을 규정하는가,  아니면 그 반대로 행동이 심리적인 특성을 규정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양자택일이 아니다.  행동과 뇌의 상태는 서로서로 활기차게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이다.   행동과 존재,  존재와 행동이 끊임없이 연속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두 비 두 비 두(Do be do be do)!     존재와 삶의 끊임없는 이중주의 내용이 얼마나 풍부한가는 사람에 따라서 상이하고,  또 그 사람의 삶의 형편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내가 나 자신의 꿈을 현실화할 수 있는지 그 여부는 내가 물질적인 자유,  즉 경제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에 달려 있기도 하다. 

 

 

 

-[나는 누구인가?]  p.428~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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