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빈 민스키 (Marvin Minsky)

 

20 세기를 움직인 사상가들 : Guy Sorman 지음, 강위석 옮김, 한국경제신문, 1991, Page 199~207

 

2 세대 후면 컴퓨터는 사람보다 더 지능적이 된다

기계는 기분이 나빠 있다

기계는 이데올로기의 희생물이다

과학자들은 다 어디로 갔나

두뇌기계

 

"인간은 생각하는 기계이다"

인공지능분야가 생겨난 때는 1956 년 다트머스 (Dartmouth) 회의부터라고 말해지는데, 이 회의에서 민스키와 매카시 (John McCarthy) 가 기계에 의한 사고의 기초를 제시했다.

그는 1927 년 뉴욕에서 태어나 하버드 대학에서 물리학, 유전학, 사회학, 수학, 음악, 신경학 등을 배웠다.

이때 행동주의 심리학자인 스키너 (B. F. Skinner) 의 강의가 마음을 사로잡아, 이후 30 년 동안을 오로지 지능연구에만 몰두하였다. 또한 그는 지능의 메커니즘을 기계에 적용함으로써 마침내 지능형 컴퓨터를 개발했다. 1958 년 그는 MIT 대학에서 인공지능 연구소를 창설해 어린이의 정신구조의 연구를 하기도 했다.

최근의 저서 「정신의 사회 (1988)」에서는 뇌가 기억, 지각, 감각이라는 여러 요소에 의해 서로 연락하여 발전하는 하나의 사회처럼 조직되어 있다는 생각을 피력했다.

주요 저서로 「로봇 (Robot, 1985)」등이 있다.

「커넥션 (Connection)」은 이 세상에서 가장 빠른 컴퓨터이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그렇지도 않다. 한 모서리의 길이가 2 미터씩인 육면체이다. 검은 플라스틱 상자 뒤에 1,000 개쯤 되는 전등이 당신을 향해 깜빡이고 있다. 그러나 이 깜박이들은 이 기계를 다소 덜 추상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 민스키 (Marvin Minsky) 는 설명한다. 사실 이것들이 없어도 「커넥션」은 아무 탈이 없다. 이 기계의 내부는 그것의 외부보다는 훨씬 더 황당스럽다. 민스키는 그 검은 상자를 열고 그 속이 실은 비었다고 말할 수 있음을 내게 보여 주었다. 그 속에 있는 64,000 개의 마이크로 프로세서는 거의 공간을 차지하지 않고 있다. 「커넥션」은 보스턴의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MIT) 내에 있는 민스키의 연구실에 주소를 두고 있다. 이 기계는 그것의 흐릿한 스크린 앞에서 밤을 새우는 지친 눈을 한 연구원들, 즉 민스키의 제자들의 작품이다. 이 남녀 연구원들은 아직도 30 대를 넘지 못했다. 민스키의 이야기는 이런 나이까지는 아직도 천재성이 막히지 않는다고 한다. 민스키는 온 세계로부터 컴퓨터 혁명의 아버지요, 인공지능 (artificial intelligence) 의 창시자로 여겨지고 있다. 그 이후 인공지능은 미국에서는 AI 라는 약자로 불리어지고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만일 어떤 작업을 사람이 했을 때 그 처리가 지능적이라고 불릴 만하다면, 같은 작업을 기계가 했다면 바로 그때부터 그 기계는 지능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세대 후면 컴퓨터는 사람보다 더 지능적이 된다

민스키는 「커넥션」이 자신의 감정을 지니고 있음을 확언했다. 대단히 강력하지만 그것은 과소 가동되고 있다. 아직도 이 기계에 걸맞는 프로그램이 제대로 개발되어 있지 않으나 이 기계는 미국 신문을 모두 읽고 그것을 메모리 안에 저장한다. 민스키는 그의 기계 이야기를 마치 사람에 관한 이야기처럼 한다. 거기에는 조금도 해학적인 뜻이 숨겨져 있지 않다. 그는 이 기계의 지능을 진정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인공적이기는 하지만 사람의 지능에 비교될 만하다는 것이다.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만일 어떤 사람이 「커넥션」만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천재로 불릴 것이라고 한다. 만일 우리가 선험적으로 (a priori) 「커넥션」은 인간보다 덜 지능적이라고 여긴다면, 그건 우리가 기계를 과소평가하고 기계가 할 수 있는 일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일 것이다. 민스키는 기계의 물리적 능력은 아직도 매우 빈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기계는 아직도 그다지 시력이 좋지 않으며 사람을 알아보는 데는 큰 어려움을 겪는다. 그리고 어린이들에 대해서는 그 말을 알아듣는 데도 문제가 있다. 기계는 말을 할 수 있지만 그다지 잘하는 것은 아니다. 기계는 1 만 단어 정도를 이해할 수 있는데 다만 발음을 정확하게 들려주어야 하고 두운법 따위는 없어야 한다. 그러나 또 한 가지 고려해야 할 것은 이들 지능기계는 아직 나이가 15 살밖에 안되었지만 인간은 수백만년간의 진화의 산물이란 점이다.

민스키는 기계가 결국에 가서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한 세대 또는 어쩌면 두 세대 정도가 걸릴 것이라고 보고 있다. 지능기계가 이 기계보다 지능이 낮은 인간에 의해서 사용되는 날이 올 것이다. 컴퓨터에 문외한인 나 같은 사람도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기계와 말을 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도록 시키게 될 것이다. 기계는 스스로 프로그램을 짜게 될 것이다. 다만 간단한 예를 몇 가지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거기에는 전문적 언어도 필요없고 엔지니어의 도움 같은 것도 필요없을 것이다.

기계는 기분이 나빠 있다

지능기계의 물리적 감각적 능력은 아직 매우 낮다. 그러나 이들의 지적 능력은 그렇지 않다. 몇 가지 부문에서는 인간을 능가한다. 전통적 체스경기를 예로 든다면 6 수를 내다보고 계산하는 오토맷 (automat) 을 이겨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민스키의 설명에 따르면 이론상으로는 경기의 모든 생각할 수 있는 수를 둘 수 있는 오토맷을 조립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가능한 경우의 수는 거의 무한 대에 가깝기 때문에 광속으로 움직이는 기계라 할지라도 이 모든 가능성을 다 쓰는데는 50 억년이 걸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야심적인 로봇을 만드는 것은 삼가해야 할 일이다.

기계는 열정을 가질 수 있다고 민스키는 나에게 확언한다. 기계도 알거지가 되는 수도 있고 엔지니어도 왠지 모를 이유 때문에 전혀 알지 못할 자료를 내놓기도 한다. 이것을 기술적인 오기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인지, 사람에게나 있는 발작증이라고 보아야 할지는 모를 일이다. 지금은 과학자도 일반 사람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짐작해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기계는 기계를 위하여 마련된 프로그램에 따라서만 움직인다는 관념도 불식되어야 한다. 이것처럼 잘못된 생각도 없다. 지능기계는 기계 자신이 자기의 프로그램을 작성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그렇게 되면 엔지니어로부터 독립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대체로 복잡한 기계에 대하여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기계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납득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그렇다면 기계도 자신의 의지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 민스키는 의심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커브릭 (Stanley Kubrick) 의 영화 「2001 년 우주의 오디세이 (2001 Space Odyssey)」에서 나오는 것과 같이 자기 주인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로봇을 설계하는 것을 그만 두지는 않는다. AI 를 악한 것으로 보이게 만든 사람은 민스키가 아니라 크브릭이었다. 지금으로 보아서는 기계가 선하거나 악한지를 알아낼 수는 없다. 그러니 장래에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고 있다.

기계는 이데올로기의 희생물이다

기계에게 지능이 진정으로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보일 뿐인가. 민스키의 대답은 진화론적이다. 기계는 아직도 초기단계에 있다. 기계가 현재 달성한 복잡도는 곤충의 그것에 비교할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기계는 계속 발달할 것이다. 지금은 겉보기로만 지능적인 듯한 기계가 장차는 진정으로 그렇게 될 것이다. 많이 걸려도 한두 세대만 지나면 기계가 인간의 두뇌와 비슷한 작업을 하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민스키는 느끼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기계 하나가 인간의 뇌에 견줄 만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뜻하지 않는다. 단일 기계로서는 인간의 두뇌에 필적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마도 기계를 여러 개를 함께 결합시키면 인간의 두뇌와 유사한 기능을 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과정은 반드시 똑같다고는 볼 수 없을지라도 인간의 진화와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기계의 경우는 다른 역사적 과정을 밟게 되는데, 그것은 100 만년씩이나 소요되는 것이 아니라 겨우 몇십년에 불과할 것이다. 지금부터 100 년 후에 지능기계가 어떤 것이 될지 누가 알고 있겠는가.

이러한 진화가 가져올 명백한 결과의 하나는 사람에게 남아있을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 과정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인간은 그렇게 되면 다른 일거리를 찾아내야 된다. 민스키가 상기시키는 바에 따르면 인간은 200 년전만 해도 95 % 의 시간을 먹을 것을 얻는데 보냈다. 오늘날에는 5 % 도 채 못된다. 기계가 만들어준 이런 공백 시간을 메우기 위해 텔레비전이 출현한 것은 아닐까. 평균적인 미국인은 하루에 5 시간을 TV 스크린 앞에서 보낸다. 민스키의 관찰에 따르면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는 이 시간 수에 2 를 곱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시간이 남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는 해결된다. 우리가 중세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전쟁이 여가를 메워주는 방법은 못된다.

만일 정치가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완벽한 지능기계를 향한 진화는 불가피하다. 민스키에게는 이 미래학적 비전이 희망도 주지만 그만큼 공포도 준다. 그는 여론이나 종교가 컴퓨터 연구에 반대하고 나올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유전공학의 경우에는 이런 반대가 이미 팽배하여 있다. 그렇게 되면 기계는 신비주의와 이데올로기의 봉기에 의하여 파괴당하게 될 것이다.

과학자들은 다 어디로 갔나

민스키는 과학자의 점진적 감소가 정치만큼이나 기계의 성장에 대해서는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민스키는 MIT 학생의 절반은 중국ㆍ일본ㆍ한국 등지에서 온 아시아계라는 점을 지적한다. 나는 그의 연구실에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머지 절반은 거의 전부 유대계입니다. 그렇지만 유대계는 이 이상 더는 없을 것입니다.』그의 말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은 중부유럽적 환경과 미국의 만남에서 탄생한 사상가 세대 ㅡ 민스키 자신도 그 가운데 하나이거니와 ㅡ 는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유대계가 다른 인종보다 더 지능이 높다는 얘기가 아니라 유대계는 학문과 연구를 장려하고 우주적 차원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추구하기 좋아하는 문화속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유대계는 기성사회가 던지고 있는 질문에 부름을 받고 있으나 『이 점은 일본계 학자들에게는 불행하게도 그렇지 아니하다.』

나는 이 기회를 잡아 민스키에게 프랑스의 연구가들을 어떻게 보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가 보기로는 프랑스 학계는 인공지능 방면에는 그리 뛰어나지 않다고 한다. 그 이유는 프랑스에서는 수학자의 힘이 너무 세고 그들은 미리 증명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모험을 걸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평균적인 미국인들은 연구에는 흥미가 없다. 대학교수들은 학생들에게 문화는 어떤 것이든 동일하며 어떤 문화라도 수긍이 간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학생들은 이렇게 되자 공부를 중단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민스키는 자기의 기계를 인간보다 더 낫게 취급하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그에게는 기계가 사람보다 크게 나은 점이 적어도 한 가지는 있다. 기계는 기계 이상으로 잘난 체하지 않는다. 역으로 인간이란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 기계이다.

두뇌기계

자기 인생에서 30 년간을 지능기계 연구에 바친 다음, 민스키는 지능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만일에 기계가 이른바 인간의 지능이라 할 만한 것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면 인간의 두뇌가 기계와 다름 없음이 입증될 것입니다. 인간의 두뇌는 복잡한 기계이고 기나긴 진화과정을 거친 것이지요.』인간의 두뇌는 불완전한 부품이 결합된 것에 불과하다. 이들 부품은 각각의 정해진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들 부품은 일정한 장소에 배치가 가능하며 파괴될 수도 있고 자극을 받기도 한다. 각 부품 ㅡ 민스키는 작용요소 (agent) 라고 부른다 ㅡ 은 사고력이 필요없는 단편적인 기계작용만 수행한다. 그러나 모든 부품이 합쳐지게 되면 마치 하나의 사회처럼 기능하게 된다. 우리가 정신 (mind) 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결합 내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관계들의 총칭이다.

민스키의 이러한 발견이 지능기계를 만드는 기초가 된다. 어떻게 해서 이것이 가능해지는가. 단편적 활동의 분석을 통해서이다. 주사위 (cube) 를 가지고 노는 어린이의 활동 같은 것 말이다. 이것은 마치 뉴턴과 갈릴레오가 단편적 현상을 관찰해서 일반적 법칙을 발견해 낸 것과 같다. 지능의 작용방법은 하나의 기본단위를 집중 분석함으로써 이해될 수 있다. 정신은 개별적 선택의 총화이다. 결국 인간의 두뇌는 언어와 사상을 생각하는 기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부 신경생물학자 (neuro-biologist) 와는 달리 민스키는 정신을 기초적 화학 및 물리학적 원리로 축약시키지는 않는다. 앞으로 당분간은 두뇌의 작용요소들간의 복잡한 상호관계는 파악되지 못한 채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도구가 출현하여 인간의 두뇌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되고 사고의 순환을 관찰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우리가 관습상 지능이라고 부르는 전류와 화학물질의 결합인 사고란 것을 말이다.

실제로는 지능이라고 불릴 만한 측정가능한 단편적 사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능이란 것은 소속되는 문화에 따라 광범한 정도의 차이를 두고 일어나는 매우 다양한 기능의 총화이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민스키는 지능에 관한 모든 현존 이론을 붕괴시켜 버리고 만다. 그의 생각으로는 정신이 작동하는 데는 신의 섬광이 필요없다는 것이다. 두뇌기계로 충분한 것이다. 물질과 마음을 가르는 이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음을 만드는 것은 물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질에서 정신이 생겨나는 법칙은 아직은 발견되지 못했다.

민스키는 그 어느 누구도 자기가 기계와 비교되는 것을 용인하지는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시대에 뒤떨어진 물질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언어는 고풍스런 기발함을 만들어내는 요술을 피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이제서야 겨우 기계시대의 여명에 들어섰다. 그리고 기계시대의 장래가 어떤 것이 될런지는 상상해내지 못하고 있다. 만일 어떤 외계인이 몇십억년전에 첫 양서류를 보았더라면, 이 양서류가 어떻게 발전해 나갈지 전혀 단서를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민스키는 덧붙여 말하기를 자기가 인간을 생각하는 기계라고 말한다고 해서 자기가 환원주의자 (reductionist ; 생명현상은 물리학적ㆍ화학적으로 설명된다고 주장하는 사람) 는 아니라고 한다. 다만 장차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과학자는 지금 철학자에게 양보하고 있다. 그의 철학은 아마도 엔지니어의 철학인 듯하다. 아메리카의 꿈의 절정은 기계에 의하여 길들여진 자연이다. 거기에다 고뇌의 빛깔이 약간 스며있는 것, 이것도 매우 미국적이다. 보스턴의 기술광장 (Technology Square) 에 아침 햇살이 비치면 민스키와 그의 제자들은 전등을 끈다. 그리고 그들의 키보드 (keyboard) 를 떠나서 낡은 자전거에 올라탄다. 다시 황혼이 커튼을 물들일 때까지 그들은 잠시 눈을 붙인다. 민스키의 집은 그의 MIT 연구실과는 좋은 대조를 이룰 만큼 지저분하다. 낡은 책, 기념품, 여행을 갔을 때 사온 작은 장식품, 플라스틱제 놀이기구, 헝겊인형, 헌 신문, 여러 가지 형태와 크기가 다양한 악기들, 이런 것들이 형언할 수 없는 모양으로 구색을 갖추고 있다. 이 잡동사니속에 서있는 것은 컴퓨터가 아닌 그랜드 피아노다. 민스키는 블루진과 낡은 스웨터를 입고 있는데 하루에 몇 시간씩이나 연주도 하고 작곡도 한다. 푸가 (fuga) 를 작곡하는데 이 과학자는 진정한 열정을 쏟는다. 푸가는 그를 그의 지능기계보다 한 걸음 앞서게 한다. 지능기계는 바흐 (Bach) 와 모차르트 (Mozart) 를 구별하지 못하니까…. 그러나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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