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맞아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대통령 후보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경제발전, 국가 안보, 군의 통수권, 강력한 리더쉽, 선거에서 이길 확률이 가장 높은 후보 들을 제치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이라고 답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공감을 대통령의 자질로 끌어올린 여론에 별다른 반응을 보인 정치학자들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듯 공감 확대는 내가 나 자신에 관해 알아낸 것이 진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너에게서 나의 일부를 확인하고 너는 내 안에서 너의 일부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찬궉 번의 이론이다. 공감의 확장은 갈수록 복잡해지는 사회적 교류와 인프라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접착제다. 공감이 없는 사회생활이나 사회적 조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 반사회적 이상성격자, 자폐적 불구자들로 가득 찬 사회인, 자폐증의 일종으로 공감을 보이지 않는, 공감을 상실한 의사소통적 장애가 만연된 사회를 생각할 수 있는가? 사회는 사교적이어야 하고 사교적이 되려면 공감이 확대되어야 한다. 즉, 당신이 어떤 관계에 있다면 그 관계는 당신의 일부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공감을 만들 수 있는가? 공감이란 가르치거나 훈계한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상대나 집단에 공감적 소통, 공감해 줌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다. 공감의 도구는 역시 언어가 대표적이며, 행동, 특히 억양, 목소리 톤, 언어의 리듬, 몸짓, 태도, 문자, 글, 정서적 반응 등 수없이 많다. 또한 전 세계적 네트워크화, 경제의 상호의존성, 국제화되는 라이프스타일, 다양한 사람과 문화의 접촉 등이 공감인식의 보편화에 기여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공동체와 자신이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인 사회적 존재가 될 수 있는 핵심적 요소들이며 그 범위를 빠르게 세계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교류한다는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을 위해 있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내면의 주권을 주장할 수 있는 영역은 없다. 인간은 전적으로 항상 주변 속에 있으면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다른 사람의 눈을 보고,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본다.

 

 

실제적 경험이라는 개념은 공감의 시대에 튼튼한 뼈대를 제공해준다. 그러므로 나는 참여한다. 그러므로 나는 공감(존재)한다 로 대전환하면서 공감은 인간 역사의 중심에 놓인다. 공감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 중심에 있었지만 사회는 이를 한 번도 인식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참여의 세계에 살고 있고 몸의 경험이 다른 사람과의 끊임없는 교류의 경험이라면, 공감은 서로의 삶에 깊이 들어갈 수 있는 수단이 된다. 공감은 또한 우리 자신의 공동의 현실을 만드는 수단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실에 뛰어 들어 공감적 교제를 만들어 가야 한다. 인간과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 좀더 깊이 공감할수록 참여의 정도가 강해지고 넓어지며 그럴수록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의 영역은 더 풍요로워지고 더 보편적이 된다. 얼마나 마음을 열고 참여하느냐에 따라 현실을 이해하는 폭도 달라진다.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 현실에 참여하여 실제적으로 접근하다 보면 현실에 대한 자각, 진리를 구성하는 요소, 자유와 평등을 정의하는 법을 포함하여 인간의 인식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참이라는 말은 가상과 대비되는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현실이라는 말과 통한다. 진리에 도달한다는 말은 실재(리얼리티)에 닿는다는 말과 동의어다. 우리는 종종 사실과 허구를 구분해서 사용하지만 사실은 현실 속에 존재한다. 현실은 공유된 경험을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객관적이고 자율적인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공유하는 공통의 이해에 관한 설명이다. 궁극적인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거대한 도식 속에서 모든 관계가 잘 들어맞는 방법을 통째로 알려고 한다는 것이고, 보다 더 큰 그림에 우리가 속해 있는 방법과 속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 것이다. 즉 진리는 자율적 사실이 아니라 만물이 서로 관계를 맺는 방법에 대한 설명이다. 진리란 주관적이거나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공통의 경험적 기반을 함께 만들기 위해 모이는 틈새 영역에 존재하는 이해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취약함과 고통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의 취약함과 고통에 공감할 수 없다. 모든 감정적 요소를 가두어 놓은 상태에선 실제로 자유로울 수 없다. 스스로 영혼을 가두고 본성을 묶어 놓은 상태에선 세상에 참여하여 의미 있는 표현을 할 수 없다. 확장된 공감은 사람들을 진정으로 평등한 위치에 올려놓는 유일한 인간적 표현이다. 다른 사람과 공감할 때 구별은 사라지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의 고군분투를 자신의 것처럼 동일시하는 바로 그런 행동이 평등 의식의 궁극적 표현이다. 한 사람의 존재가 다른 사람과 감정적으로 같은 지평위에 있지 않으면 진정한 공감은 불가능하다. 신분에서 상대방에게 우월하거나 열등하다고 느끼고 그래서 다르고 낯설다고 생각하면, 그들의 기쁨이나 슬픔을 자신의 것처럼 실감하기 어렵다. 상대방에게 동정을 느끼거나 안됐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사람과 진정으로 공감하려면 그들이 나같다는 느낌과 반응이 있어야 한다. 공감을 하는 순간에는 네 것과 내 것이 없고, 오직 나와 너만 있을 뿐이다. 공감은 같은 영혼이라는 공동 의식이며, 그것은 사회적 신분의 구별을 초월하는 시간과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요즘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는 공감을 확대하는 것이 평등을 보장하는 수단이다. 상대방에게 나 자신을 인식하고 내 안에서 상대방을 인식하는 능력이야말로 깊이 있는 민주적 경험이기 때문이다.

 

 

공감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존재를 긍정한다는 것이고, 그들의 인생을 예찬한다는 것이다. 공감의 순간은 살면서 누릴 수 있는 경험 가운데 가장 밀도가 높고 높은 생생한 경험이다. 실체화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공감적 행위에서는 신체적 한계를 초월하여 잠깐이나마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주변의 생활에 연결시켜 주는 하나의 비신체적 수준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누구나 살아 있다는 것을 더욱 실감한다. 공감의식이 성숙할수록 삶의 참여도는 더 막역하고 보편적이 되고 경험의 현실감은 더 깊어진다. 공감할 줄 몰라 경험을 제한받는 사람의 인생은 그만큼 충만하지 못하다. 인생을 구가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단단히 묶여 산다는 것이다. 격리된 혼자만의 삶은 그만큼 부족한 삶일 수밖에 없다. 공감은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초월한다. 삶에서 도망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최대화하려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죽음에 맞서는 투쟁에 공감한다. 타자의 연약함과 취약함을 보고 그들을 지지하고 위로하고 그들에게 다가가 도움의 손길을 뻗는 것은 그들의 살아있는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다. 유대감을 공유할 때 살아 있다는 느낌은 강렬해진다. 공감하며 받아들일 때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성숙한 공감은 살아있고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유일한 존재만이 겪을 수 있는 현상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이렇게 썼다.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칭송하는 자, 삶을 넓힌다."

 

 

공감의식은 존재와 당위의 간극을 극복한다. 공감적 행동은 실체적이고 경외감으로 차 있으며 이성에 호소한다. 실제의 모습과 그래야 하는 모습 사이에 어떤 구분도 없다. 이 둘은 하나이고 같은 것이다. 다른 사람의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나의 모습인 것처럼 여기고, 그들의 노력을 격려하고 지지해줌으로써 내 삶도 진지해지고 충만해지는 것이다. 그때 자아는 넘치고 확장되어 보다 넓고 포괄적인 동정적 참여 사회로 들어가기에 공감은 도덕적 영역을 넓힌다. 오바마는 특히 공감을 자신의 정치철학의 핵심으로 삼고 대외정책으로부터 대법관 임명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내릴 때마다 공감을 강조했다. 대화를 하려면 어떤 식이든 자신의 입장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야 한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몰두할수록 나 자신을 더 잘 알게 되고 나의 정체성도 더욱 확실해진다. 그때 대화는 서로의 감정을 교환하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대화를 통해 우리는 관계를 만들고 이런 관계가 우리만의 독특한 개인적 스토리와 정체성을 형성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삶을 경험하는 방식을 놓고 서로의 느낌을 나누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관계를 맺으며 그 관계는 생존의 핵심이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잉태된다. 태어나면서 관계를 시작하고,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관계 속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렇게 인간은 속속들이 사회적 동물이다. 세계는 좁아졌고, 사람들은 사이버공간에서 얼굴을 맞대다시피 살고 있다. 세계화 시대에 거리는 의미 없는 개념이 되어가고 있다. 사이버주소가 지리적 주소를 무색하게 만든다. 시간은 거의 동시적으로 압축되고, 멀티태스킹이 표준이 되고, 시간은 그 자체로 최고의 상품이 되었다. 전 세계적 다중들의 인터넷을 통한 유사 사회적 관계는 공감의 공유를 근간으로 한다. 이제 보편적 광장이 된 세계에서 각양각색의 다른 사람들이 만나 공간을 확장할 기회는 더 많아졌다. 인류의 역사를 고찰할 때, 생존의 가치에서 물질적 가치로, 그리고 삶의 질로 가치가 변화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경제적 안정을 위해 지구의 엄청난 양의 에너지와 자원을 착취했고, 그 여파로 지구의 위기에 대한 공감의식이 증대했다. 경제적 형평이 좋아지고 안정감을 얻게 되면 사람들은 같은 인간을 보다 신뢰하고 자연에 대한 관심도 커진다. 불행한 사실이지만 지구적 공감의식이 갑자기 확대되는 현상은 지구 곳곳을 황무지로 만들고 많은 인류를 더욱 가난하게 빠뜨린 결과다. 이러한 물결을 타고 탈 물질주의 가치를 더욱 전파하여 더 늦기 전에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지구 공동체를 보다 지속가능하고 안정적인 미래로 향하도록 미리 손을 써야 한다는 점이다.

 

 

디아스포라 소수 집단인 동성애자, 장애자, 소수민족, 피부색, 여성 등 사회적 약자와 디아스포라 소수 집단에 대한 전통적인 차별의 경계가 서서히 물러가고 코스모폴리탄적인 감성이 전명에 등장하고 있으며, 공감 의식이 확대되고 있으며, 이런 공감의 영역은 다른 생물종에까지 넓혀지고 있다. 인간의 편의를 위한 자원의 착취로 인해 발생되는 지구생명체의 멸종위기는 동물보호와 환경보호를 넘어 식물과 곤충 등 지구와 함께해온 모든 생명체에 대한 관심과 공감으로 확산되고 있으며,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 대한 공감의 확장은 인류에게 의미 있는 획기적 사건이다. 첨단 사회연결망이론을 연구하는 IT전문가들은 페이스북, 마이 스페이스, 위키디피아와 같은 교육적 네트워크, 리눅스 같은 업무용 네트워크 등 사회적 네트워크는 소위 좁은 세상 이론을 과감히 실현시키고 있다. 좁은 세상 이론은 지구상에는 서로 모르는 두 사람을 겨우 여섯 단계만 떨어져 있을 뿐이라고 가정한다.

 

 

행복신드롬에 대한 조사 결과를 보자. 결과는 소득격차가 작을수록 행복지수는 높아진다는 것이다. 미국의 소득격차는 OECD 30개 국가 중 27위다. 유럽 국가의 평균소득보다 29% 더 많이 버는 미국인들이 행복지수가 낮게 나오는 이유는 미국이 개인적 가치를 중시하는 아메리칸 드림에 기반하고 있는데 유러피언드림은 삶의 가치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인들 소득의 상당 부분은 공공서비스를 위한 세금으로 나간다. 이러한 공공서비스는 사회 전체의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 미국이 시장모델을 강조하는 데 반해 유럽은 사회적 모델을 강조하기 때문에 빈부 격차는 줄어든다. 결국 세금을 통해 부를 재분배하고 공공서비스에 투입하여 사회 전체에 혜택을 주면 사람들 사이의 신분격차를 상당 부분 줄일 수 있다. 이 결과를 보면 부의 지향은 어느 한계에 다다르면 오히려 행복지수는 떨어진다. 부의 격차가 심화되는 사회는 행복지수도 낮을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나 공동체 의식이나 공감 의식을 확장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가진 자의 발걸음을 가볍게 하고, 갖지 못한 자의 환경을 개선하여 함께 안락의 문에 도달할 수 있을까? 우리가 공감 의식을 최대화하고 지속 가능한 글로벌 사회를 만들기 위한 재생 가능한 에너지 체계와 에너지 혁명을 상상하는 일이다. 2차 산업혁명이 지나고 우리는 3차 산업혁명으로 접어들었다. 분산 에너지는 3차 산업혁명의 핵심이다. 분산 에너지는 우리의 앞마당에서 찾을 수 있는 에너지다. 햇볕은 온 세상을 두루 비춘다. 바람은 매일 지국 곳곳에서 분다. 우리는 쉬지 않고 쓰레기를 만들어 낸다. 시골에 사는 사람은 농업과 임업 폐기물을 이용할 수 있다. 해안 지역에 사는 사람은 밀물에서 생산되는 에너지가 있다. 이들 에너지를 우리는 분산 에너지라 부른다. 이러한 에너지는 모두 재생 가능한 에너지로서 어디서나 다양한 규모로 발견된다. IT기술은 세계의 파워그리드의 형태를 바꾸어 놓고 있다. 기업들은 분산자본주의를 위한 시장과 인프라의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태양, 바람, 물, 지열, 파도, 바이오메스 등의 재생 가능한 에너지는 3차 산업혁명을 떠받치는 기둥이다. 전 세계 에너지의 40%를 소비하는 빌딩은 앞으로 에너지를 생산하는 발전소로서의 개념으로 변화할 것이다. 가장 풍부한 에너지는 수소다. 물을 전기분해하여 에너지를 만들더라도 환경에 무해한 수소와 산소로 분해될 뿐이다. 캐나다 금광 회사 골드코프의 리눅스에 기반한 오픈 소스 공유 네트워크의 예를 들면 정보의 공유를 통한 금광 채굴지 공모는 사용자생산이라는 모델을 만들어 냈다. 협업이라는 대표적인 공감의 사례다. 위키디피아도 마찬가지다. 무료 오픈 소스 온라인 백과시전인 위키디피아는 정식 직원이 다섯 명 뿐이지만 그 내용은 280만 개의 항목을 자랑한다. 글을 올리는 사람은 모두 공짜로 내용을 제공한다. 놀라운 사실은 전문가들에 의해 집필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과 비교해 일반인들이 올리는 정보인 위키디피아의 오류는 브리태니커에 비해 약간만 높을 뿐이다.

 

 

이러한 공감개념의 확장은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게임이 빛을 잃고 상호 윈윈 시나리오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그간 인류의 경제적 역사는 내 것과 네 것이라는 간단한 공식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러한 인간의 개인적 소유욕은 국가 단위에도 예외는 없었다. 광신에 가까운 사적 재산의 소유에 대한 집착은 내 것과 네 것이라는 경계를 확실히 하고 특권층과 소외 계층 사이에 새로운 사회적 장벽을 만들고, 담을 쌓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제 사유재산의 이론적 근거는 다시 한 번 우리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의식을 바꾸고 있는 새로운 기술의 성과로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인터넷과 사회적관계망이라는 기술로 인간의 중추신경계는 지구의 다른 인간과의 동시 접촉을 가속화하면서 우리를 글로벌 공간과 시간의 동시적 시장으로 이끌고 있다. 사유재산에 대한 애착이 줄어든다는 것은 글로벌 상업의 미래와 집단적 영혼 모두를 위해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새로운 정보와 소통의 기술은 선형적이 아니라 인공 두뇌적이다. 이것을 사용하는 시간동안 시장 교환의 시작과 정지 매커니즘은 당사자가 시간을 매개로 지속적인 상업적 관계를 수립한다는 개념으로 바뀐다. 즉 미국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40%가 소유의 대상에서 임대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즉, 소유에서 서비스로 우리의 생활과 경제와 개인의 정체성이 중심이 된 시대에 전통적인 재산관계의 개념은 극적인 변화를 시사한다. 이제 충만한 인생에서 배제되지 않을 권리, 즉 접속의 권리는 가장 중요한 재산가치가 되고 있다. 새로운 시대의 재산은 개인이 충만한 삶을 꾸려 갈 수 있도록 해 줄 탄탄한 관계에 참여할 권리가 되어야 한다. 이렇듯 3차 산업혁명은 보다 통합적이고, 복합적인 인간 조직에서 개인화를 재촉하는 한편,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생활을 관리하는 위계적 형태는 수직적에서 급속히 수평적으로 평준화되고 있다. 인터넷과 사회적연결망은 문자 그대로 수십억의 사람들이 동시에 실시간으로 접속하고 협력하고 가치를 함께 창출할 수 있는 거대한 글로벌 광장으로 바뀌고 있다. 서열을 하찮게 여기고, 네트워킹 방식으로 사람과 세상과 관계를 맺고, 협력이 체질화되어 있고, 자율과 배척보다는 접속과 포함에 관심이 있고, 인간의 다양성에 감수성이 강한 N세대는 구세대에 비해 역사상 가장 공감적인 세대가 될 확률이 높다. 분산적이고, 협동적이고, 비위계적인 사회가 곧 공감적인 사회이다. 공감적인 사람은 직장 생활의 모든 사회적 효용성에 반드시 필요한 핵심요소다. 공감적인 사람은 고객과 하급자가 원하는 것을 전파하고 충족시키는 능력이 남다르다. 그들은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 듣고, 사람들이 진정으로 관심을 갖는 것을 찾아내고, 상대방의 의도에 정확히 반응한다. 따라서 공감이란 가장 중요한 요소다.

 

 

개인의 복지를 강조하던 분위기가 사회의 복지를 강조하는 쪽으로 바뀌는 것의 대표적 현상은 오바마를 미국 대통령으로 뽑은 미국을 보아도 확실히 실감할 수 있다. 더욱이 최근에는 경제적 국가 부의 총량인 GDP라는 용어대신 지속가능한 경제복지지수(ISEW), 참진보지표(GPI). 사회건강지수(HDI), 경제적 웰빙지수(IEWE) 등이 대표적으로 인용된다. 삶의 질을 중시하는 사회를 만들려면 두 가지 차원에서 협력적 참여가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는 민간 차원의 공동체 참여이고, 또 하나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복지를 증진시킬 수 있도록 개인의 세금을 공적 창의력과 서비스를 추진하는 데 투입하겠다는 의지이다. 시민사회에서 사회적 자본을 부활시키고 공공부문에서 공적자본을 활성화시키는 것은 모든 나라에서 질적인 삶의 꿈을 성취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삶의 질을 강조하는 사회는 지속 가능한 사회를 창조하기 위한 집단적 참여의식과 함께 개인의 경제적 기회를 강조하기 때문에 사회적 모델과 시장 모델을 동시에 추진시킨다. 경쟁보다 협동이 대세를 이루고 접속권이 재산권만큼이나 중요해지고 삶의 질이 개인의 재정적 성공에 대한 갈망만큼이나 두드러지게 생각되는 분산 자본주의 경제가 자리를 잡으면 공감적 감수성도 번성할 여지를 마련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탐욕, 사리사욕, 실익을 인간 경험의 중심에 놓는 인간 본성의 개념과 배타성의 경계, 그리고 위계질서는 더 이상 공감적 감수성을 위축시키지 못할 것이다.

 

 

공감의 뿌리는 세계 시민을 만들어내는 수업이다. 또한 공감적 참여는 철저히 협동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공감 본성을 끌어내려는 협동적인 학습 모델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 교육시스템은 철저하게 경쟁을 통해 지식을 습득시키는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새로운 공감시대의 지식은 사람들을 구분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공유하는 경험의 장이어야 한다. 그 학습 모델의 특징은 훈련을 통해 사람들의 두뇌에 전적인 지식을 주입하고 답을 찾아가는 능력의 배양이 아니라 협력하고 비판하며 다수가 토론에 참여하여 답을 추론해내는 과정을 가리킨다. 집단의 모든 구성원들이 서로를 존중해주고 상대방의 관점과 견해에 귀를 기울이고, 기탄없이 비판하고 서로의 지식을 공유하고, 전체 집단 앞에서 자신의 견해를 마음 놓고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출처 : 체 게바라님의 플래닛입니다.
글쓴이 : 체 게바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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