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인의 인간실험, 기억인가 기질인가 <다크씨티, 1998>에 나타난 외계인의 과학체계 2009년 07월 01일(수)

과학미디어로 읽는 미래 인간은 끊임없이 생물실험을 수행한다. 의약품 개발이나 생물학적 현상을 살펴보기 위한 실험들이다. 인간은 저마다 생각한 다양한 가설에 따라 다양한 배합의 약을 만든다.

배합율을 조금씩 바꿔 각각 다른 마우스들의 사료에 섞어 먹여본다. 혹은 주사를 통해 병균을 직접 투입시켜 보기도 한다. 천천히 죽어가는 마우스나 원숭이들을 살펴보면서 인간을 위한 치료제를 개발한다. 생명을 다루는 과학은 생물을 통하지 않은 실험으로 지식을 얻을 수 없다.

▲ 인간실험을 은유한 마우스 실험 

현대 과학과 함께 인권의 문제가 제기되기 전까지 생물실험에는 암암리에 인간이 대상이 되기도 했다. 과거 계급사회에서는 물론이거니와 근래에도 임상실험의 하나로 인간에게 확신할 수 없는 약물을 투여하고 신체변화를 살피기도 했다.

특히나 전쟁 중에는 반인권적인 인간 실험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수많은 양민들이 데이터를 남기고 이름 없이 죽어갔다. 대형 다국적 제약회사들은 원조라는 명목으로 극빈 국민들에게 실험용약을 주기도 한다.

동물실험, 과학의 명암

많은 과학자들은 고통에 신음하며 죽어간 마우스들에게 고귀한 생명 대신 데이터를 남겨준 데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를 갖춰 뜻을 기린다. 그러나 동물실험은 어느 생명종에게나 대상이 되는 집단에게는 아무리 의미를 되새겨준다 해도 재앙에 가까운 일이다.

자신은 알지 못한 채 다양한 질병이 자신의 몸 속에서 똬리를 틀고, 누구도 알지 못하는 부작용이 자신을 갉아먹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를 위해 헌신했다 해도 생명은 두 번 살지 않는다.

과학에서 소외되는 집단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어두운 그늘에 놓이는 집단은 생명을 버려야 하는 실험대상이다. 죽거나 치유할 수 없는 질환을 얻게 되는 실험대상은 정작 과학의 밝은 면을 향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맹점에도 과학실험, 특히 동물실험은 계속된다. 그 어느 실험보다 실제 동물을 대상으로 한 실험은 유효한 데이터를 풍부하게 제공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복용할 약이라면 그 가치는 보다 유용하다.

<다크씨티(Dark City, 1998)>는 대표적인 느와르 과학영화(Science fiction film noir)다. 이 장르는 과학적 상상력으로 구성된 사회를 어둡고 침울하게 그려내는 것이 특징이다. 과학 역시 사회적 산물이고 인간이 만들어낸 ―혹은 발견해낸―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듯 과학에도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과학이 인간에게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한편, 소외되거나 헌신하는 존재는 있기 마련이다. 느와르는 후자에 주목해 과학의 이면을 들춘다.

느와르, 과학의 그늘 조명

▲ 다크씨티, 1998 
영화는 “태초에 암흑이 있었다. 그리고 이방인이 찾아왔다. 그들은 시간이 존재하기 시작한 오래 전부터 있었다. 그들은 의식(will)으로 물질 세계를 관장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문명이 몰락하면서 죽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별을 버리고 자신들의 도덕성을 치유하기 위해 끝임없는 여행을 했다. 그래서 도달한 곳은 작고 푸른 세계, 우주의 먼 곳이었다. 그들은 드디어 찾던 별을 찾았다고 했다”는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다크씨티>는 의식(will)으로 물리적 현상을 지배할 수 있는 어떤 외계 종족의 실험을 다루고 있다. 이들은 '튜닝(Tuning)'이라고 부르는 이 능력으로 자정에 시간을 멈춘다. 멈춰진 시간 동안 외계인은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에 나선다.
 
마치 마우스를 이용한 미로찾기 실험처럼 우주에 떠 있는 수레바퀴 형태의 행성에 인간 군상들을 모아 넣은 것이다. 외계인은 인간의 기질과 성향을 구분한 뒤, 여러 기억을 주입해 행동변화를 관찰한다.

<다크씨티>는 지구에서 인간이 생각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물리현상과 철학적 관습을 뒤집고 있다. 지구 세계 역시 물질과 의식으로 나눠져 있으며, 물질이 이 의식을 지배하는 것이 보편적인 해석이다.

의식으로는 물질이 생성되거나 물리적인 힘이 만들어질 수 없지만, 물질의 변화에 따라 의식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의식이 물리 현상을 관장하면 가장 핵심적인 물리현상인 시간 역시 자유롭게 정지되거나 진행될 수 있다고 상상했다.

많은 과학영화가 묘사해왔던 것―즉 시간여행이나 초능력 등―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이처럼 뒤집혀진 물리체계를 외계인의 특수한 능력을 빌어 표현하고 있다. 이에 따라 기이하게 달라진 현상을 영상으로 그려줌으로써 의식이 물질을 지배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지를 역설하고 있다. 인간의 물리체계에서 인간은 외계인의 다른 물리체계를 느낄 수 없으며,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러나 외계인은 두 시스템을 모두 보고, 이해할 수 있다.

동물 실험을 하는 동안 미로를 찾아 헤메는 마우스는 알 수 없지만, 실험을 지켜보는 과학자는 마우스의 상황과 그 결과를 알 수 있다. 과학영화는 종종 이 같은 상황을 상정하고, 보다 우주적 관점에서 지구를 바라본다.

지구 속에서 생활하는 인간은 인간의 물리체계라는 한정된 인식의 범주에서만 다양한 생각을 전개할 수 있다. 그 범주 안에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일들이 이를 포함하는 더욱 넓은 범주에서는 알 수 있고 관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영화가 주로 사용하는 이 같은 인식의 확장은 언제나 한정된 인식에 놓여 있는 인간에게 불편하다. 스스로의 합리적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고 상상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 역시 인간의 인식 범주에 머물러 왔던 사람이에 이런 류의 영화는 불편할 수 있다.

좋은 과학 영화는 인식의 지평을 확대하면서 이를 설득력 있게 전개해 관객의 인식을 확장시켜 준다. 그런 의미에서 <다크씨티>는 불편한 것을 친절하게 그려주는 수작이다.
 
▲ 다크씨티의 외계인들 

<다크씨티>의 외계인과 그들을 조력하는 다니엘 슈리버 박사는 자정마다 시간을 정지시킨다. 여러 가지 약물을 섞어 정지된 시간에 사람들에게 주사를 한다. 이들이 만든 약물은 추억을 관장한다.

유년의 즐거운 기억과 집이 불에 탄 기억, 부모가 사망한 기억, 연인과의 즐거운 시간 등을 각각의 약물에 담아 섞어 창조된 기억을 주입하는 식이다. 과거에 살인자였던 사람의 추억을 바꿔 형사로 만들기도 하고, 가수였던 사람을 점원으로 만드는 등 기억을 관리한다.

기질이냐 기억이냐

외계인들은 기질과 기억에 따라 인간이 어떻게 다른 행동을 보이는지 관찰한다. 사람마다 천부적인 기질이 있고, 그러한 기질에 따라 사람들은 직업을 선택해 다양한 계층을 형성한다.

한편 살아가면서 겪은 교육과 기억 등을 통해 기질을 발현하거나, 기질이 바뀔 수도 있다. 좁은 아파트에서 노동자로 사는 사람이 자정의 실험 이후 넓은 아파트에서 사용자로 살게되면 “노동자들을 해고시켜 버려야겠어”라고 익숙한 듯 쉽게 말해버린다는 것이다.

영화는, 실험으로 입장이 바뀐 사람은 과거 길렀던 자신의 기질과 전혀 무관한 혹은 정반대의 모습으로 바뀔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애초부터 사이코패스 같은 연쇄 살인범이 뛰어난 능력을 가진 형사가 돼 범인들을 잡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세계에서 흔히 말하는 것처럼 “저 자는 원래 저런 기질을 타고났기 때문에 저런 일을 할 수밖에 없다”라는 유추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의식도 정보―기억, 물질―에 따른다는 것을 암시한다.

기억은 물리적인 현상인 소리나 영상, 온도 따위를 오감이 느끼고 뇌가 이를 유지하면서 생긴다. 당연히 물리적인 현상이 없다면 기억은 만들어질 수 없다. 기억이라는 정보는 각 개인의 기질에 따라 각기 다른 행동으로 발현되거나, 기질에 따라 정보가 어긋나게 기억될 수도 있다. 체벌이라는 정보를 받고도 이를 폭력으로 인식하기도 하고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기질보다 기억에 촛점을 맞춰 인간 행동의 근원을 설명하려고 한다.

수레바퀴 형태의 인공 행성

<다크씨티>에서 실험장이 된 인공적인 행성은 수레바퀴 모습이다. 넓은 도심을 원반의 위에 만든 뒤 높은 건물들을 빼곡하게 심은 것이다. 아래편에는 이들 건물들을 다양하게 바꿀 수 있는 재료들이 달라붙어 있다.

수레바퀴는 회전하며 우주상에서 선회한다. 모든 에너지는 외계인이 만든 에너지원으로 운영된다. 수레바퀴의 끝은 다크씨티의 끝이며 우주로 통하게 돼 있다. 태양계 밖인 행성에는 태양이 없다. 그래서 이 행성은 언제나 밤이며 어둡(dark)다.

▲ 수레바퀴 모양의 행성 

일반 자연 행성들은 물질이 압축적으로 뭉쳐진 구의 형태를 보인다. 행성들은 구심이 당기는 강한 만유인력을 통해 중력을 느낄 수 있다. 파고 들어가보지 않아 알 수는 없지만, 지구의 안쪽은 뜨거운 핵이 있고 층층이 온도에 따라 나눠진 층들이 서로 다른 속도로 회전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지표에서는 건물들이 만들어지고, 사람은 걸어다닐 수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 외계인이 만든 행성은 구가 아니다. 인간이 구상한 우주정거장과 비슷한 모습이다.

인간이 생활할 만큼 큰 도심을 우주에 띄운다고 가정했을 때 수레바퀴 형태의 행성은 구현하기 복잡하다. 중심이 수레바퀴의 한 가운데 있고 이를 중심으로 적절하게 회전을 해야 구심력을 얻을 수 있다.

구심력이 있어야 좌표를 정할 수 없는 우주공간 상에서 힘의 균형을 잡아 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구가 아닌 이상 이 행성은 여러 방향으로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하게 회전하거나 폭주할 수 있다. 물론 알 수 없는 물리체계가 이를 교정해 줘 안정적일 뿐이다.

무자비한 실험, 인간이 실험대상이 된다면...

인간은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강력하게 전체 지구를 지배한 종족이다. 그리고 그 패권을 가장 무자비하게 사용하는 종족이다. 자연의 지배자를 자임하면서 ‘인류를 위한’이라는 수식어를 달아 거의 모든 자연을 실험의 대상으로 삼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거의 모든 동물을 채집해 해부를 한 뒤 표본화하고 이들을 분류했다. 사실 논문 한 줄 더 적기 위해 수많은 동물들을 실험하는 종족이다. 인간을 위한 일이기 때문에 이런 행위는 정당화됐다.

외계인을 다루는 여러 과학영화는 외계인의 인간실험을 단골소재로 쓴다.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 주는 잔인한 상상이 과학의 공포감과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지구의 패권을 쥔 인간이 해왔던 것과 같이 보다 뛰어난 종족인 외계인 역시 과학을 위한 실험욕구가 클 것이라고 상상했기 때문이다.

실험은 반드시 필요한 지식을 얻기 위해 큰 비용을 치르는 작업이기 때문에 외계인이 인간실험을 통해 알고자 하는 것 역시 중요하고 아직 모르는 지식이어야 한다.

인간실험을 다루는 과학영화에서 눈여겨볼 만한 것은 영화의 이미지가 주는 끔찍함, 그에 따른 동물실험에 대한 반성만이 아니다. 과연 인간실험을 통해 영화 작가나 감독은 인간의 어떤 것을 알고 싶었을까 하는 것이다.

실제로 실험이 이뤄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머리 속에서 사고 실험을 해볼 만한 논제에 주목해볼 만하다는 것이다. 사실 외계인의 실험들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인간인 작가가 인간에 대한 질문을 외계인을 통해 할 뿐이다.

Dark City | Directed by Alex Proyas | Written by Alex Proyas, David S. Goyer, Lem Dobbs | Running time 100 min. | 1998

박상주 객원기자 | utopiapeople@naver.com

저작권자 2009.07.01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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