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miR) 이야기 1991년 윌리암스와 네세가 진화의학에 관한 개론서를 편찬할 때만 하더라도, 암의 발생에 관한 진화적 사고는 의사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지 않았다. 그리고 18년이 지난 지금에도 상황은 개선된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암이란 피할 수 없는 불길한 운명의 그림자로, 꾸준한 종합검진과 조기치료 이외에는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그런 질병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젠 거의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암보험에 가입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하고 또 절실한 것은 되도록이면 암에 걸리지 않는 것, 혹은 암을 조기에 치료하는 것일 뿐, 암 발생의 진화적 기원이 무엇이냐는 학구적인 질문은 아니다.
다윈의학의 여섯 가지 설명 범위
1991년 윌리암스와 네세는 다윈의학의 프로그램이 다루는 질병에 대한 진화적 설명의 범위를 6가지로 제시했다. 그 중 첫 번째는 '방어'로, 기침과 같이 우리 몸이 외부물질로부터의 손상에 대항하기 위해 고안해 낸 적응적 결과물을 말한다. 그들은 현대의학에서 가끔 우리 몸의 방어기제가 질병과 혼동되어 이해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기침이나 재채기는 병원균이나 독소에 대한 자연적인 방어기제일 수 있는데 의사들이 기침과 재채기 자체를 질병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감기에 걸렸을 때 열이 나는 현상이 병원균에 의한 것인지, 혹은 병원균을 몸에서 제거하기 위해 우리 몸의 방어체계가 작동하는 것인지를 구분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이러한 차이를 적절한 수준에서 구분하고 치료에 적용하는 것이 다윈의학이 현대의학에 던지는 메시지 중 하나다.
두 번째 주제는 '감염'이다. 전염병학자 폴 이왈드가 숙주와 기생체 간의 진화적 군비경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류는 진화과정에서 수 많은 기생체들과 군비경쟁을 치러왔으며, 그 흔적은 우리의 유전체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을 것이라는 게 다윈의학의 예측이다.
세 번째 주제는 '새로운 환경'이다. 윌리암스와 네세는 이 주제를 우리가 '현대사회에 내동댕이쳐진 석기시대인'이라는 말로 요약한다. 홍적세의 아프리카에서 200만년 동안 진화한 우리의 몸이, 진화적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극히 최근에 이루어진 문명의 급속한 진보로 인해 창조된 현대인의 생활습관과 마찰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구석기 시대인의 몸을 지닌 채 태어나는 우리의 몸과, 구석기 시대인의 생활환경과는 판이하게 다른 현대 문명 사이의 괴리에서 나타나는 부적응이 많은 질병의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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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암스와 네세는 1991년의 저작에서 알러지와 아토피에 대한 가설로 마지 프라핏의 '적응 가설'을 선호했다. 하지만 면역학자들의 연구는 알러지가 기생충에 대항해 진화한 우리 몸의 IgE 체계가 항원이 사라지면서 과도하게 반응하는 것이라는 '위생 가설'을 지지한다. 진화의학의 적용은 실용적인 학문인 의학이 가진 조심스러움을 극복해야 한다. 그것이 이론중심적인 진화학과 실험중심적인 의학 사이에 내재하는 학문적 갈등의 한 축이다. | 네 번째 주제는 '유전자'다. 윌리암스는 개체를 중심으로 연구되던 자연선택의 단위를 '유전자'로 끌어내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다윈의학에 그의 '유전자 선택설'을 적용시키기 위해 그는 홀데인(J.B.S Haldane)과 메다워(Peter Medawar)의 노화와 유전자에 관한 논문들을 기반으로 ‘부정적 다면 발현(negative pleiotropy)'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유전자가 '다면적'이라는 뜻은, 하나의 유전자가 여러 가지 표현형의 발현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젊은 시절에는 큰 이익을 주기 때문에 선택된 유전자가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우리 몸에 해로운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다. 우리의 유전체 속에 들어 있는 유전자들 중 일부는 노년기에 이르러 분명 우리의 몸에 해가 될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제거되지 않고 선택된다.
윌리암스의 부정적 다면 발현은 '노화(aging)'라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되었고, 노화와 관련된 유전자와 질병들에 관한 진화적 설명에 가장 잘 적용된다. 뒤에 설명하겠지만, 암이라는 질병도 노화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다면 발현'은 암의 진화적 설명을 이해하는 데에도 필수적인 개념이 된다.
다윈의학이 다루는 유전자라는 존재의 성격은 한 마디로 역설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다면 발현'처럼 한 유전자가 우리에게 착할 수도 나쁠 수도 있다. 또한 다윈의학의 두 번째 주제인 '새로운 환경'에 유전자를 대입해 보면, 어떤 유전자는 과거에는 전혀 해롭지 않다가 새로운 환경을 만나 질병을 유발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유동인자에 대한 연구에서 살펴보았듯이, 어떤 유전자들은 개체의 안위는 돌보지 않은 채 자신의 복제에만 신경을 쓰기도 한다.
다윈의학의 다섯 번째 주제는 '설계상의 절충'이라 불린다. 이 개념은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 혹은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는 말과 통한다. 자연선택에 의해 보존된 일부 형질들의 구조적 변화는 완벽한 설계일 수 없다. 자연선택은 눈먼 시계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류가 직립보행으로 인해 두 손이 자유롭게 되는 이득을 취했지만 그로 인해 인류는 척추질환으로 고통 받게 된 것이다.
다윈의학이 다루는 마지막 주제는 '진화적 유산'이다. 이 주제는 앞에서 다룬 다섯 가지 주제를 포괄하는 것으로, 우리의 몸과 유전자에 새겨진 대부분의 흔적들이 우리 조상들이 겪은 진화적 경로를 각인하고 있다는 뜻이다. 포유동물의 식도는 기관지 앞으로 나 있기 때문에 물을 마시다 질식사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이러한 '진화적 제한'은 포유류가 물고기 선조로부터 분기해 나오면서 어쩔 수 없이 지니게 된 진화적 유산이다. 인간의 망막에 존재하는 맹점 역시 눈의 진화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설계된 진화적 유산이다.
암에 대한 다윈의학적 설명
인간이라는 종에게 특히 빈번하게 발생하는 암이라는 질병 현상은 앞에서 설명한 다윈의학의 여섯 가지 설명 범위 대부분에 부분적으로 중첩된다. 그 중에서도 모든 종류의 암이 노화가 진행될 수록 발병률이 증가한다는 점, 또한 암의 발병에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다는 점, 문명의 발달로 인해 최근에 급격히 달라진 현대사회의 환경과 여전히 구석기시대인의 그것과 같은 몸과 유전자를 지닌 인류 사이에 벌어지는 부적응이 암에 관한 진화적 설명의 핵심을 이룬다. 암에 관한 다윈의학적 설명은 아래와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세포분열이라는 현상은 고도로 조직화된 메커니즘이며 반드시 오류를 동반한다. 2. 몇몇 유전자 상의 오류는 통제된 세포분열 메커니즘에 이상을 일으킨다. 3. 세포분열의 이상은 암을 발생시킨다. 4. 노화가 진행되기 이전에는 이러한 암세포들은 면역계에 의해 효과적으로 차단된다. 5. 하지만 노화는 이러한 방어체계를 총체적으로 잃는 과정이다. 6. 암에 걸릴 확률은 노화가 진행될수록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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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에 들어 여성암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사진은 자궁경부암 수술 장면. | 단세포 생물이 다세포생물로 진화하면서 세포분열을 조절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유전자들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복사품을 더 많이 후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수많은 유전자들의 이기성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면서 세포분열을 조절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다세포생물에게 있어 직접적으로 자연선택에 노출되는 것은 정자나 난자와 같은 생식세포다. 적응이란 결국 생식적 적합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자손을 다른 개체들보다 더 효과적으로 생산할 수 있느냐라는 문제가 자연선택이 유일하게 고려하는 현상인 셈이다.
노화에 관한 윌리암스의 '다면 형질 발현'을 받아들인다면 암을 비롯한 대부분의 선진국형 질병들, 즉 나이가 들수록 출현빈도가 높아지는 알츠하이머, 관절염, 당뇨병 등의 질병들에 대한 진화적 설명은 다음과 같이 매우 간단하게 기술될 수 있다.
어떤 유전자가 모든 사람들을 100살에 죽여 버린다고 해도, 청년기에 아주 사소한 이득만 제공해 준다면 전파될 수 있다. 노화를 유발하는 대부분의 유전자들은 청년기에 그 유전자가 제공하는 이익 때문에 선택되었고, 그 유전자들이 노년기에 가져올 위험천만한 영향은 자연선택에 노출되지 않는다.
이 설명을 조금 더 쉽게 풀어보자. 자연선택은 생식적 적합도에 따라, 즉 더 많은 후손을 남기는 형질을 선택한다. 따라서 자연은 다른 체세포보다도 난자나 정자세포를 보존하려 노력한다. 생식세포를 유동인자로부터 보호하는 파이RNA가 강력한 증폭과정을 가지고 빠른 시간 안에 진화한 이유를 살펴보며 우리는 이미 생식세포의 중요성을 체감했다. 따라서 조로증처럼 젊은이에게 해로운 돌연변이 유전자는 자연선택이 그것을 제거하기 때문에 매우 드물게만 나타날 뿐이다. 그러나 비슷한 힘을 가진 유전자들이지만 90세 이상의 노인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들은 계속 살아남을 수 있다.
노화는 생식적으로 성숙한 시기를 지난 후에, 즉 성공적으로 후손을 생산한 후에 일어나기 때문에, 인생의 후반기에 해당 유전자들이 갖는 해로운 영향은 자연선택의 감시망을 피할 수 있다. 결국 진화의 과정 속에서 이런 종류의 유전자들은 유전체 속에 선택되어 누적된다. 이러한 유전자들이 유전체 속에 동일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생식기 이후에 해로운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들의 영향력은 몸 전체에 걸쳐 일어날 수 있다. 자연의 입자에서 한 개체가 생식을 마치고 자손의 생존을 확보한 이후에 벌어지는 유전자의 해로운 효과는 전혀 고려할 만한 문젯거리가 되지 않는다. 결국 극단적인 경우, 연어처럼 생식을 마친 이후에 즉시 개체가 죽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자연선택은 생식세포를 편애한다. 자연선택은 웰빙을 추구하는 인류의 노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다윈의학과 암치료
지금까지 1991년 윌리암스와 네세가 다윈의학을 통해 주장한 암의 발생에 관한 진화적 설명을 살펴보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암에 대한 진화적 설명을 살펴보는 것과 의사들이 암을 실천적으로 치료하는 일 사이에는 피할 수 없는 괴리가 놓여 있다. 암에 관한 진화적 설명이 암의 치료에 실용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한 이러한 괴리는 극복될 수 없다. 또한 윌리암스와 네세가 암에 관한 다윈의학적 설명을 시도하면서 우리에게 제시한 실천적 결론을 보면 이러한 괴리가 존재한다는 점을 실감할 수 있다. 진화학자들에게 있어 암이라는 현상은 인류가 진화적 역사 속에서 불가항력적으로 획득한 진화적 유산일 뿐이다. 그리고 그 설명은 실제로 암에 걸린 환자에게는 매우 냉소적인 어투로 들릴 수 밖에 없다. 사실 윌리암스와 네스가 우리에게 주는 결론은 이런 것이다.
암에 걸릴 가능성을 낮추는 또 다른 것으로 위험천만하게 사는 것이 있다. 일찍 죽어라, 그러면 암에 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암이란 모든 종류의 비적응적이고 통제 불가능한 조직 성장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암은 성장과 분열 능력을 잃지 않은 어떠한 세포에서도 일어날 수 있으며, 각 세포의 암은 갖가지 개시 요인들과 억제 메커니즘의 실패 등에 의해 일어난다. 암이 의학적으로 정복되기 힘들다는 보고도 별로 놀랍지 않으며 보편적인 단일 치료법이 발견될 것 같지도 않다. 암을 반역자 세포와 숙주 사이의 경합으로 정확히 이해한다면 그에 대한 의학적 진보도 훨씬 더 빨라질 것이다. -<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 중에서
암이라는 질병이 도대체 왜 인류를 위협하고 있는지에 관한 우리의 이해는 분명히 다윈의학을 통해 명료해졌다. 현대문명의 이기로 인해 장수하게 된 인류에게 있어 암이라는 질병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역설적인 질병이다. 그렇다고 해서 윌리암스와 네세의 제안처럼 인간이 암에 걸리지 않기 위해 연어처럼 후손을 낳고 바로 죽어버릴 수는 없다. 다윈의학에 대한 연구는 반드시 실천적인 해결책과 함께 조화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여성암의 증가에 관한 다윈의학적 고려는 이러한 실천적 해결에 매우 근접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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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우재 UCSF 박사후 연구원 | 현대에 들어 여성암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성 생식 기관의 암 발병률은 이 여성이 그 때까지 경험한 월경 주기의 횟수에 직접적으로 비례한다. 즉 생식기관이 암에 가장 걸리기 쉬운 사람은 일찍 초경을 했으면서 폐경은 늦게 되고 월경 주기가 임신이나 수유에 의해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는 여성이다. 과도하게 지속되는 세포분열은 암이 발생할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이다.
영양상태가 좋아지면서 현대의 여성들은 과거보다 초경이 빠르고 폐경은 느리다. 또한 과거의 조상들처럼 아이를 많이 낳지도 않는다. 따라서 월경주기가 임신과 모유 수유에 의해 중단되는 기간 동안 일어나는 몸의 손상 복구 과정이 최소한으로 억제된다. 150회 정도의 월경주기를 가졌던 조상들에 비해 그보다 배는 많은 300~400회의 월경주기를 경험하는 현대 여성들에게 여성암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만약 지금처럼 영양상태가 좋은 상황에서 결혼이 늦어지는 악순환까지 겹쳐진다면 여성암의 발병율은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의 모든 여성들에게 일찍 결혼을 하고 일찍 아이를 낳으라고 강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현대사회에서 성인으로 독립할 수 있는 비용이 증가하고, 결혼연령이 점점 늘어나는 현상은 여성들이 여성암에 걸릴 확률을 증가시킨다. 다윈의학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통찰은 여기까지다. 그렇다면 그 해결책은 의학 혼자의 힘으로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환경과 오래된 몸의 갈등을 의학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과 함께, 결혼이라는 제도적 비용이 경감될 수 있도록 사회의 공동노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어쩌면 다윈의학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비전은 단순한 의학적 실천을 넘어 넓은 사회적 합의를 통한 인류의 복지향상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