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의학의 가능성을 찾아라 암의 진화발생생물학 (4) 2009년 10월 22일(목)

미르(miR) 이야기 진화론적 설명은 궁극인에 대한 답이다. 운명적으로, 궁극인적 설명은 일반화를 추구하게 된다. 하지만 진화의학이 환자의 치료, 나아가 개개의 질병 치료라는 의학의 실용적 측면을 마주하게 될 때, 그 설명영역은 각 질병마다 구체적이고 다른 종류의 방식을 요구 받게 된다.

암세포의 복제적 진화이론

암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진화'라는 단어는 매우 친숙하게 느껴질 수 있다. 1976년 사이언스지에 실린 피터 노웰(Peter C. Nowell)의 '암세포 군집의 복제적 진화(The clonal evolution of tumor cell populations)'이라는 논문 때문이다. 돌연변이가 일어난 하나의 암세포가 면역계의 공격을 피하고, 무한분열능력을 얻게 되고, 혈관을 끌어오고, 전이를 통해 다른 기관 및 조직으로 퍼져나가는 일련의 과정을 서술하는 노웰의 개념은 현재 암 관련 연구의 교과서적 설명으로 사용되고 있다.

노웰이 하나의 암세포가 암이라는 질병을 일으키기까지의 과정을 '암세포의 진화'라는 과정, 즉 암세포가 개체 내에서 생존경쟁을 하고, 자연선택되는 과정에 비유했다고 해서 그것이 진화의학의 패러다임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진화'라는 단어가 들어간다고 해서 그것이 진화의학적 설명은 아니기 때문이다. 노웰의 이론은 전통적 의학의 근접인적 설명에 다름 아니다.

진화의학은 암세포가 어떻게 변이를 일으키고 살아남아 질병을 일으키게 되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진화의학은 도대체 왜 인간이라는 종에게 암이라는 질병이 그렇게도 빈번하게 발생하며, 그 진화적 기원은 무엇인지를 다루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홍적세의 우리 조상들보다 획기적으로 수명이 늘어난 현대인들이 조상들에게서는 그다지 흔하지 않던 암에 걸릴 확률이 늘어나게 된다는 것이 진화의학적 설명이다. 노화에 대한 조지 윌리암스의 설명처럼, 대부분의 유전자가 생식기 이후에 끼치는 해로운 영향은 자연선택되지 않음으로, 이런 유전자들의 다형성은 자연선택되고, 결국 생식기 이후의 성인에게 암이나 퇴행성 신경계 질환과 같은 질병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 진화의학적 설명이다. 노웰의 설명은 이러한 궁극인적 설명과 다르다. 그는 암의 생리학적 기원을 '진화'라는 개념을 차용해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진화의학과 전통의학의 갈등

조지 윌리암스의 노화이론을 암에 관한 진화의학적 설명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암이라는 질병에 대한 치료법은 매우 간단해진다. 오래 살지 않으면 된다. 장수하는 것이 하나의 미덕이자 모든 이들의 간절한 소망이 된 현대사회에서, 암에 걸리지 않기 위해 일찍 죽으라는 진화의학의 해결책은 절망적이고 비상식적이다. 아는 것이 현실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암에 대한 궁극인적 설명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아주 간단하지만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현대의 의사들 중 진화의학을 암이라는 질병에 적용해보고 싶은 선구적인 이들은 피터 노웰에게서 시작된 '복제적 진화'라는 개념을 하나의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시도는 진화의학의 궁극인적 설명과 의학의 근접인적 설명 사이의 전통적 갈등을 '진화'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이유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지만, 진화의학이 암의 치료에 대한 획기적인 해결책을 내놓을 수 없는 현실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오해가 등장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진화의학을 주장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현장에서 환자를 돌보는 의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화의학이 실제로 의사들에게서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임상에서 구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증거가 필요한 것이다.

진화의학과 전통의학의 갈등 혹은 통합의 어려움에 관한 필자의 견해가 필자만의 고유한 것은 아니다. 최근 다윈탄생 2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프랑스 의학사에서의 ‘적응’ 개념: 진화론적•생리학적•생태학적 이해>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한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의 한희진 교수도 이러한 두 학문간의 갈등을 파악하고 있는 듯 하다.

한희진 교수는 끌로드 베르나르의 '내부환경' 및 '항상성' 개념과 미르코 그르멕의 '질병계'라는 개념에 대한 역사적 탐구를 시도하면서 이러한 갈등양상을 역사학적으로 추적했다. 한희진 교수의 역사적 탐구가 내어놓는 결론은 현대진화의학이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내부환경'이라는 개념과 '질병계'라는 개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베르나르를 통해 드러나는 갈등의 양상

베르나르는 다윈과 동시대의 인물이며 현대의 실험의학을 정초한 선구적인 학자다. 그는 의학을 확고한 과학으로 만들고자 했으며, 물리화학적인 법칙을 존중하면서도 생리학만의 독특한 영역을 확립하고자 노력한 인물이다. 특히 베르나르는 생명체의 고유한 특징으로 '항상성'이라는 현상을 제안하는데, 현재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이 개념은 간의 글리코겐 합성을 연구하던 베르나르가 혈당량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현상을 연구하면서 고안한 것이다.

▲ 끌로드 베르나르(왼쪽)와 피터 노웰, 두 학자는 다윈이 제안한 적응 및 진화라는 개념을 다윈과는 무관한 방식으로 생리학적 설명을 위해 차용했다. 

내부환경이라는 개념은 유기체에 고유한 것으로 생각된다. 외부환경은 광물계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러한 외부환경의 교란에 대해 내부환경은 각 장기들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힘쓴다. 물론 복잡계 연구가 진행된 현대에 와서, 항상성이라는 개념을 유기체에만 적용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가능해지긴 했지만, 베르나르의 시대에 내부환경 및 항상성이라는 개념은 유기체에 독특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했다. 특히 물리화학적 법칙으로 의학을 과학으로 만들고자 했으면서도, 생리학의 독자성을 정초하려 했던 베르나르에게 있어 '내부환경'이라는 추상적 개념은 역설적으로 필요했던 것인지 모른다.

베르나르가 외부환경으로부터 독립적으로 내부환경을 유지하려는 생리학적 의미에서 '적응'이라는 개념을 사용했을 때, 그는 피터 노웰이 '암세포의 복제적 진화'라는 개념을 고안했을 때와 정확히 같은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말로 바꾸자면, 베르나르와 노웰 모두 다윈이 사용한 '적응'이라는 개념을 진화론적 맥락과는 무관하게 차용한 것이다. 베르나르는 '적응'이라는 개념을 외부환경의 교란으로부터 항상성을 유지하는 내부환경의 활동이라는 식으로 이해했고, 노웰은 암세포가 개체내에서 생존경쟁을 통해 살아남는 과정을 진화라는 유비를 이용해 설명해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의학에 짙게 드리워진 생리학의 그림자를 마주하게 된다.

실제로 진화의학의 궁극인적 설명과 유사한 측면을 지닌 것은 현대의학자에 속하는 그르멕의 '질병계'라는 개념이다. 한희진 교수의 설명처럼 그루멕의 '질병계'라는 개념은 “특정한 역사적 시대에서 질병들의 공시적 관계와 통시적 변화를 역사적으로 추적하는 연구를 돕기 위해 수립된 개념”으로, 질병간의 상호작용이 벌어지는 하나의 시스템을 설정한 것이다. 그르멕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것은 흑사병과 나병으로 주로 전염성 질환이다. 이미 설명한 것처럼 전염성 질환은 진화론이 다루는 군비경쟁이 가장 잘 맞아 떨어지는 분야이기도 하고, 이 분야에서 조지 윌리암스와 네세의 선구적 연구가 있기 전에도 이미 폴 이왈드와 같은 의학자에 의해 진화의학적 설명이 시도된바 있는 것이다.

그루멕은 흑사병과 나병이 치료법의 개발 이전에 소멸한 역사적 이유를 추적하면서 각 질병들의 관점에서 벌어진 생존경쟁을 밝히고 있다. 예를 들어 나병은 결핵의 증가와 함께 생존경쟁에서 뒤쳐진 결과 자연적으로 소멸했다.

현대의학의 임상적 실천 속에서 진화의학의 가능성

비록 인문학자인 한희진 교수가 날카로운 안목으로 진화의학과 전통의학의 갈등을 바라보기는 했지만, 베르나르 이후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온 서구 전통의학을 마주하지 않은 채, 단순히 '내부환경'이라는 개념을 차용한다고 해서 진화의학이 발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루멕의 '질병계' 개념도 전염성 질환을 제외하고는 적용이 쉽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진화의학이 제안하는 비현실적인 해결책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해결책을 내어놓을 뿐이다.

▲ 김우재 UCSF 박사후 연구원 
따라서 중요한 것은 개념적 이해가 아니다. 철저하게 실용적인 학문인 의학의 특성을 이해하고, 단순히 개념의 통합이 아니라 임상에서의 실천을 통해 진화의학이 서구의 현대의학에 기여할 수 있는 바를 찾아봐야 하는 것이다.

필자는 베르나르의 '내부환경' 개념보다는 보다 현대의학자들이 기대고 있는 피터 노웰의 '암세포의 복제적 진화'라는 개념이 현대 암이라는 질병의 연구와 어떻게 구체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통해 진화의학의 가능성을 타진해 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어쩔 수 없는 두 학문간의 큰 갈등과 '진화'라는 개념을 두고 벌어진 오해를 재확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김우재 UCSF 박사후 연구원 | korean93@postech.ac.kr

저작권자 2009.10.22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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