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중의 하나로 정현종 시인이 쓴 ‘섬’이라는 시가 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문학평론가들은 대체로 이 시에서 ‘섬’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단절된 관계를 이어줄 수 있는 이상적인 소통의 공간을 상징한다고 설명한다. 언젠가 최승호 시인은 자신의 시를 지문으로 하여 작가의 의도를 묻는 대학입시 모의시험에 도전해 보았는데 단 한 문제도 맞추지 못했다며 우리 고등학교 문학 교육의 가르침을 ‘가래침’이라고 혹평한 바 있다. “작품은 프리즘과 같아서 눈 밝은 독자를 만나면 분광하며 스펙트럼을 일으킨다”고 덧붙인 그의 말에 힘입어 비록 특별히 눈 밝은 독자는 아니지만, 정현종 시인의 시를 나 나름대로 이해해 본다.

 

바다라는 자연생태계를 보면 사실 섬들이 떠 있고 그들 사이에는 바닷물이 있다. 그래서 섬들은 다른 섬들을 만나지 못한다. 시인은 일단 사람들이 각각의 섬이라는 형상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그런 섬과 섬 사이에 바닷물이라는 단절이 아니라 섬이라는 연결을 그려본다. 섬과 섬 사이에 새로운 섬을 만들고 모두 그 섬에서 만나자고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섬들을 이어주는 또 하나의 섬이 그런 역할을 자처하는 어느 특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 섬에 가고 싶다는 말은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표현인가? 나는 정현종 시인이 어쩌면 사람들이 좀더 마음을 넓혀 다른 사람들의 마음과 닿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꿈꾸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다. 여기서 섬은 면적이 정해진 그런 섬이 아니라 한없이 넓어질 수 있는 우리 인간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홀로 생각해본다. 이걸 시험문제로 만들어 답으로 우길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뇌과학의 함정, 인간은 섬이 아니다

2009년 2월 미국에서 출간되자마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8월에는 우리말로도 번역된 알바 노에(Alva Noë)의 [뇌과학의 함정 Out of Our Heads]을 읽다가 나는 ‘인간은 섬이 아니다’라는 소제목을 접하며 불현듯 정현종 시인의 시를 떠올렸다. “왜 당신은 당신의 뇌가 아닌가(Why you are not your brain)”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에서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의 철학자 노에는 우리 인간을 진정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의식(consciousness)이란 결코 뇌세포들의 단독 공연이 아니라 뇌, 몸, 환경이 함께 연출하는 춤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마음은 삶”이라고 단언한다. 삶은 습관이며 습관은 세계를 필요로 한다. 세계는 결코 뇌 안에서 만들어지거나 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PET(양전자방출단층촬영)나 fMRI(기능성자기공명영상) 등의 뇌 영상 촬영만으로는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다. 우리의 경험을 경험으로 형성해주는 것은 뇌의 신경 작용이 아니라 뇌와 환경의 역동적 관계이다. 그래서 그는 이제 우리가 습관의 생태학을 연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마음을 세포로 설명할 수 없듯이 춤을 근육으로 설명할 수 없다. 발음하기에 따라 우리말로 거의 ‘뇌(Noë)’처럼 들리는 성을 가진 말 그대로 ‘뇌 박사’의 도전이 지난 200년 동안 사뭇 안이하게 진행되어 온 뇌 연구에 상당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그는 이제 “존재한다, 그러므로 생각한다(I am, therefore I think)”라고 말한다. 바야흐로 뇌과학은 이제 데카르트와 헤어져 스피노자,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등을 끌어안고 있다.


알바 노에 [뇌과학의 함정]

  

노에는 제임스 왓슨과 함께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 196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이 그의 저서 [엄청난 가설 The Astonishing Hypothesis: The Scientific Search for the Soul (1994)]에서 내세운 “우리의 일상적인 지각과 자아 의식은 전적으로 신경세포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그는 의식이란 단순히 뇌에서 벌어지는 게 아니라 우리가 행동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습관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정신적 경험의 기초를 이루며 태생적으로 환경이라는 맥락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는 뇌과학이 그 동안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의식을 연구해왔다고 단언한다. 뇌가 인간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뇌가 의식에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뇌뿐 아니라 몸, 그리고 우리가 속해 있는 환경과 관련하여 뇌가 작동하는 과정을 지켜봐야 한다. 우리는 그 동안 마음은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에만 의존한다고 배웠고, 지금 현재 뇌를 연구하고 있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마음의 경계를 넘지 못하고 있다. 2008년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세계철학자대회에서 세계적인 인지철학자 차머스(David Chalmers)는 그의 강연에서 “마음 즉 의식은 두개골 속에 갇힌 채 일어나는 뇌의 신경 활동을 넘어선다”고 말한 바 있다. 일찍이 수전 헐리(Susan Hurly)도 두개골은 ‘마법의 막(magical membrane)’이 아니라고 했다. “우리는 우리 머리 밖에 있다.”

 

 

자유 의지는 진화한다

나는 노에의 이 같은 참신한 생각들을 접하며 자유 의지(free will)를 둘러싼 철학자들의 오랜 논쟁을 떠올린다. 철학자들은 우리에게 스스로 행동과 결정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두고 참으로 오랫동안 끈질긴 논쟁을 거듭해왔다. 자유 의지와 관련하여 서양 철학은 크게 양립가능론과 양립불능론으로 나뉜다. 양립가능론은 자유 의지와 결정론이 동시에 성립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데 반해, 양립불능론은 자유 의지와 결정론 중 어느 한 가지만이 유효하다고 본다. 양립불능론은 다시 이 세상은 애당초 모든 것이 결정되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간에게 선택의 여지란 본질적으로 주어지지 않았다는 결정론과 주어진 환경에서 개인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이 하나뿐이 아니기 때문에 결정론과 자유 의지는 양립할 수 없다는 비결정론으로 구분된다. 

 

대니얼 대닛 [자유는 진화한다]


‘라플라스의 악마’라고 부르는 사고실험에 기반한 인과적 결정론과 모든 명제는 결국 참 또는 거짓으로 결정된다는 논리적 결정론은 철학자가 아니면 그리 자주 접하는 이론이 아니지만 우리의 행위와 운명이 신에 의해 결정된다는 신학적 결정론은 종교인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적지 않은 수의 비종교인들의 마음도 슬며시 붙들고 있다. 최근에는 우리의 행동과 신념은 물론 일상의 욕구마저도 늘 유전자의 조정을 받고 있다는 유전자 결정론까지 이 논쟁에 끼어 들었다.

 

과학자들의 결정론은 늘 서로 부딪히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수많은 작은 입자들이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는 걸 발견한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자들로 거슬러올라간다. 자연의 구성원이 감히 자연법칙에 거스를 수 있으랴 생각하면 아무리 그럴 듯해 보이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은 결국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엄연히 내가 아니던가? 설령 내 삶이 이미 촬영을 끝낸 한 편의 영화에 기록되어 있으며 나는 이미 그 영화를 보기 시작했더라도 나도 모르게 무언가를 끊임없이 시도하며 살고 있다. 자유 의지에 관한 우리의 생각은 아마 결정론적 관점에서 출발하여 조금씩 천천히 비결정론적 낙수에 군데군데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에피쿠로스와 그의 후예들의 끈질긴 흠집내기 덕택에 어느덧 자유 선택에도 상당한 여지가 주어졌다. 결정론과 자유 의지가 만들어내는 이른바 ‘네모의 원’에 대니얼 데닛이 설명을 시도했다. ‘다윈의 해’를 기다려 번역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2009년 10월에야 비로소 우리말로 소개된 그의 저서 [자유는 진화한다 Freedom Evolves(2003)]에서 데닛은 자유 의지는 결코 환상이 아니고 실재하는 객관적 현상이라며 진화생물학과 신경과학의 최근 발견들을 바탕으로 결정론과 양립 가능함을 보여준다. 자유 의지에 대한 그의 설명을 조금 길지만 여기 인용한다.

자유 의지는 우리가 숨쉬는 공기와 같으며, 우리가 가고자 하는 거의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영구적인 것이 아니며, 진화했고 지금도 진화하는 것이다. 우리 행성의 대기는 단순한 초기 생명체들의 활동 결과 수억 년에 걸쳐 진화했으며, 그 결과로 가능해진 더 많은 복잡한 수많은 생명체들의 활동에 반응하여 지금도 계속 진화하고 있다. 자유 의지라는 대기는 또 다른 종류의 환경이다. 그것은 계획하고 희망하고 약속하고, 비난하고 분개하고 처벌하고 존경하는 의도적인 행동이라는, 감싸고 가능하게 하고 삶을 형성하는 개념적 환경이다. 우리 모두는 이 개념적 대기에서 성장하며, 그것이 제공하는 조건하에서 삶을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그것은 산술처럼 영구적이고 변함없는 안정하고 비역사적인 구성물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인간의 상호작용이 최근에 빚어낸 산물로서 진화했으며, 그것이 이 행성에서 처음 가능하게 한 인간의 활동 중 일부는 그것의 미래 안정성을 파괴하거나 심지어 소멸을 재촉할 수도 있다. 우리 행성의 대기가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보장은 없으며, 우리의 자유 의지도 그렇다.

데닛에 따르면 자유 의지란 ‘결과를 피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말한다. 요즘 우리 TV 드라마가 뜻밖에 훌륭한 예를 제공한다. 원작 소설에는 스토리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러나 드라마가 방영되는 도중에 스토리에 몰입한 시청자들의 빗발 같은 성화에 때로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은 원작에서는 죽기로 되어 있던 인물을 기발한 설정을 통해 살려내기도 한다. 데닛은 ‘피할 수 있음(evitability)’과 ‘피할 수 없음(inevitability)’의 올바른 해석이 결정론과 자유 의지를 양립할 수 있게 해준다고 설명한다. 양립불능론자는 이른바 ‘설계적 태도(design stance)’로 설명할 것을 ‘물리적 태도(physical stance)’로 설명하려는 범주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태도를 확실히 구분하면 세포와 그 이하의 수준에 존재할지 모르는 결정론적 메커니즘에도 불구하고 신경세포들의 시스템 수준에서 벌어지는 행동에는 상당한 자율성을 허락할 수 있다. 데닛은 이처럼 여러 가능한 선택지들을 비교하며 행동할 수 있는 ‘선택 기계(choice machine)’ 메커니즘이 우리 인간에게 진화했다고 설명한다.

 

 

인간은 설명의 뇌를 가졌다

내가 구상하고 있는 유전자장(遺傳子場) 이론에 맞춰 데닛의 설명을 재해석해보면 다음과 같은 그림이 그려진다. 이 경우에는 유전자의 장(場)으로 운동장을 생각할 수 있다. 운동장의 한복판에 있는 경기장은 선수들이 경기를 하는 곳이다. 그곳에는 모든 선수들이 따라야 할 규칙이 있다. 양팀의 전력에 따라 우리는 흔히 경기의 결과를 예측한다. 이변이 없다면 우리의 예측대로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이미 그 경기가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경기를 수없이 반복하지 않는 한 경기의 결과는 그 날 선수들의 컨디션은 물론 승리를 향한 그들의 의지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선수들은 규칙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해 결과에 대한 예측을 어렵게 만든다. 지는 경기인 줄 뻔히 알면서도 최선을 다하고 때로는 예측을 뒤엎는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심판은 규칙을 엄수하려 애쓰지만 선수들은 때로 약간의 반칙까지 감행하며 결과를 유리하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대개의 경우 반칙은 심판에게 적발되어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하지만 때로는 심판의 눈을 피해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손을 써서 골을 넣은 마라도나나 앙리처럼. 돌연변이는 대부분 해롭지만 때로 유리할 수도 있는 것과 흡사한 상황처럼 보인다.

 

운동장 비유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운동장에는 경기를 하는 선수들만 있는 게 아니라 감독도 있고 관중도 있다. 그들이 경기를 읽는 데에는 훨씬 더 큰 자유가 존재한다. 알바 노에에 따르면 우리가 세계를 해석하는 게 아니란다. 세계는 나름의 의미를 지닌 채 해석이 되기도 전에 우리 앞에 나타나 있다. 우리 뇌가 하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 속에서 적절히 처신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지 의식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의식은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노에는 이렇게 말한다.

세계—해석되어야 하는 원문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문학적 접근은 막다른 길이다. 흥미롭게도, 마음에 관한 문제—인지, 사고, 의식—와 씨름하는 많은 과학자들은 세계에 대해 문학적, 해석적 입장과 같은 무언가를 전제한다. 하지만 우리는 해석을 통해 세계를 확보하지 않는다. 해석은 우리가 세계를 손에 넣은 뒤에 온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인간 두뇌의 진화 단계에 또 하나의 단계를 첨가하고 그에 대한 지지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인간 두뇌의 진화를 연구하는 진화생물학자들은 대개 세 단계를 설정한다. ‘생존의 뇌(survival brain)’, ‘감정의 뇌(feeling brain)’, ‘생각의 뇌(thinking brain)’가 그들이다. 동물의 인지에 관한 수많은 관찰결과들로 인해 생존의 뇌와 감정의 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생각의 뇌로도 우리 인간의 뇌를 다른 동물의 뇌와 구별해낼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우리 인간의 뇌가 다른 모든 동물의 뇌와 다른 결정적인 차이는 우리만이 유일하게 ‘설명의 뇌(explaining brain)’를 지녔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시를 쓰며 신화를 만들어내고 심지어는 신을 창조하기도 한다. 설명의 뇌는 앞의 다른 세 종류의 뇌와 달리 행위 이전이 아니라 이후에 기능한다. “세계를 손에 넣은 뒤에 온다”는 말이다. 자유 의지가 데닛의 주장 대로 자연선택의 결과라면 그 결과로 인간의 뇌가 지금처럼 진화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자유 의지를 가능하게 하는 ‘선택 기계’의 전단계인 ‘상황-행위 기계(situation-action machine)’는 인간 이전 단계의 수많은 동물들에 이미 존재했지만 고도의 언어 발달이 전제되어야 하는 ‘설명의 뇌’는 오로지 인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화할 수 있었다. 내가 설정하는 ‘설명의 뇌’는 바로 자유 의지의 진화로 나타난 결과이다.


결코 과학적 사고는 아니지만 나름 인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생각해보면 자유 의지의 진화에 관한 내 생각은 흥미로운 순환의 고리를 그리며 신학적 결정론을 자극한다. 하느님은 왜 에덴 동산의 그 많은 나무들 중 하필이면 ‘지혜의 나무’를 가지고 하와와 아담을 꼬드기셨을까? 그들이 끝내 사탄의 유혹에 빠져들고 말 것으로 ‘결정’해 놓으신 상태에서 왜 꼭 그 나무를 선택하신 것일까? 나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 모든 피조물 중에 우리 인간에게만 지식을 탐구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허락하신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최재천
최재천 /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개미제국의 발견],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대담] 등이 있다. 2000년 제 1회 대한민국 과학문화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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