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of Koch, 『의식의 탐구: 신경생물학적 접근 The Quest for Consciousness: A Neurobiological Approach』, 김미선 옮김, 시그마프레스, 2006.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걷다가 부딪치거나 넘어지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제대로 가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놀란 적은 없는가? 우리가(이 순간 ‘우리’ 보다는 ‘좀비 작동체(zombie agent)’란 용어가 더 적합하다) ‘의식’없이도 얼마나 많은 일들을 완벽하게 해내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이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연자약함이 더 놀라울 정도다. 눈을 예로 들어보자. 안구 뒤쪽에는 광수용체가 없어 시각 이미지에 관한 어떠한 정보도 갖지 못하는 맹점(blind spot)이 있다. 하지만 눈을 씻고 봐도 시야에서 시커멓게 뻥 뚫린 곳을 찾을 수는 없다. 의도적으로 맹점을 시험해 보지 않는 한 우리는 맹점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영특한 뇌는 그 검은 구멍을 교묘하게 그림으로 채워놓고는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눈을 깜박이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느라 시각이 차단되어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잃어버린’ 시간이 하루에 무려 한 시간에 달한다는 사실은 또 얼마나 놀라운가?

 

프랜시스 크릭과 크리스토프 코흐는 시지각(visual perception)에서부터 의식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합해졌을 때 특정한 의식적 지각체나 경험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신경적 기제나 사건들의 최소 집합,” 즉 의식의 분자적이고 신경적인 상관물(NCC, neuronal correlates of consciousness)을 찾는다면 우리는 의식에 관한 아주 유용한 설명 틀을 갖게 된다. 크릭과 코흐는 정신적 사건과 그것의 신경상관물 사이에는 분명한 대응관계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는 물질이 없으면 마음이 존재할 수 없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의식은 부수현상(epiphenomenon)이거나 환상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 의식은 없어도 그만인 부수현상도 아니며, 환상은 더더욱 아니다. 또한 인간에게만 귀속되는 특성도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좀비 작동체(the zombie agent)에 불과한 생명체가 의식을 갖게 되었을까?

 

유기체가 주관적인 느낌을 갖게 되면서부터 무엇이 달라졌는지 생각해보자. 의식을 가진 존재는 그렇지 않은 존재보다 생존하기가 훨씬 유리하며, 질적으로 향상된 삶을 살 수 있다. 그렇다면 의식을 탐구할 때 놓쳐서는 안 될 핵심은 무엇일까? 바로 질적인 느낌, 날 느낌(raw feeling)이라고도 불리는 감각질(qualia)이다. “감자칩의 짭짤한 맛과 바삭하게 씹히는 느낌, 비 맞은 개의 코를 찌르는 냄새, 평평한 땅에서 수백 미터 위 절벽에 손가락 몇 개로 겨우 매달려 있는 짜릿한 느낌과 같은 것이 생겨날 수 있는가?”라고 경이에 찬 물음을 던지는 코흐는 감각질을 없애거나 포기한 채로 의식을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할 것이라 주장한다. 그는 “주관적인 경험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뇌의 활동은 생물학적 존재가 무언가를 경험하는 데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이라고 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감각질은 기억에 필수적이며, 자아를 형성하며, 주체가 미래를 계획하고 선택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감각질의 문제 이외에도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기체의 온도는 기체 분자의 평균 운동에너지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처럼 정신적 사건과 신경적 사건도 동일할까? 코흐는 우리가 이 문제에 단정적으로 대답하는 대신 NCC를 찾는 데 주력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바람직함을 일깨운다. 이런 저런 걱정과 두려움 때문에 출발선에 서 보지도 못한다면 우리는 채워지지 않은 호기심을 안고 살아야 하는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눈앞의 거대한 밀림 속에서 길을 헤매든, 맹수에 쫓기든, 들어온 것을 후회하든 그것은 일단 밀림에 발을 들여놓고 난 이후의 문제다.

 

단순하고 우직하게, 그러나 열정적으로 연구에 몰두하는 코흐는 앞으로 몇 년 사이에 뇌에서 주관적인 마음이 창발되는 원리가 드러날 것임을 장담한다. 20세기 중반 DNA 이중나선 구조가 드러나면서 유전자, 유전, 인간에 대한 얼마나 많은 것들이 드러나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볼 때 코흐의 호언장담에 가슴이 설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신경세포의 발화와 같은 물리적 작용에서 어떻게 마음이 생겨나는 지에 관한 “설명적 간극(explanatory gap)”을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신, 영혼, 자유의지, 주체라는 것의 특권 등 많은 것을 잃게 될까 두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그 모든 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과감히 받아들여야 한다. 잃을 것과 얻을 것의 목록을 만들고 손익을 따져 결정하기에는 근원적인 호기심이 너무 크다. 우리가 누린 안락은, 실제로는 한번도 가지지 못했던 것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데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들로부터 나오는 그림은, 그것이 대칭이라는 점에서 아주 멋지다. 당신은 결코 외부 세계를 직접적으로 알 수 없다. 대신, 당신의 신경계가 세계의 표상들 중 하나 이상의 표상에 대해 수행한 어떤 계산의 결과들을 의식한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당신의 가장 깊은 내면의 생각도 알 수 없다. 대신, 이러한 정신적 활동과 연관된 감각적 표상만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격언에 담겨진 서양 철학의 해묵은 과제에 대해 심오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끝으로 남는 것은, 감각질의 주관적인 세계- 당신과 나를 좀비와 구분 짓고 우리의 삶을 색, 음악, 냄새, 맛과 멋으로 채우는 것- 라는 것이, 전략적으로 이러한 외부세계와 내부세계 사이에 위치하는 뉴런 한 묶음의 미묘하게 깜박이는 극파 패턴에 결정적으로 의존한다는 취기 가시는 깨달음이다.

 

『의식의 탐구』, 330쪽.

  

 

의식의 탐구

크리스토프 코흐
시그마프레스, 2006년

나는 요즘 인기있는 김태희 보다는 박주미가 아름답다고 느낀다.
나는 위염이 있는 내 위에 좋지 않다며 의사가 말리는 천원에 4개짜리 튀김이 너무 맛있고 내 몸이 튀김을 원하는 것은 튀김에 있는 어떤 필수 성분이 내 몸에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주문을 외우며 김말이와 오징어 튀김을 산다.
나는 비오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내리는 비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왠지 모를 슬픔과 허무가 밀려온다. 그래도 난 그 느낌이 좋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많은 뛰어난 인물들에 비하면 내 자신이 매우 왜소한 존재라는 것을 알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과 환경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고 세상의 진리에 조금이나마 다가서려고 애쓴다

이와 같은 나의 느낌, 감정, 세계관과 가치관 등은 모두 내 머릿속에서 생겨날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단 말인가?

인간의 정신작용에 관한 의문은 생명의 기원, 발생 등과 더블어 생물학 분야에서 풀어야하는 난제이자 가장 흥미있는 주제라고 생각한다.
코흐의 저서, ‘의식의 탐구’는 특히 너무 어렵고 알려진 사실도 많지 않으리라는 핑계로 미루어 두었던 정신작용에 관한 공부를 시작하도록 하는 계기가 될 것 같아 큰 기대를 가지고 읽어 보았다. 그러나 역시 아직은 신경생물학적 사실들을 토대로 인간의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정신작용을 설명하기에는 무리인 듯 하다. 코흐도 이 점을 인정하고 책의 주제를 ‘시각적 지각’에만 한정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흐는 인간의 정신작용에 관한 과학적 해명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매우 낙관적이고 희망에 찬 언급을 하고 있다.

“우리는 과학사에서 유일무이한 시점에 살고 있다. 객관적인 뇌로부터 주관적인 마음이 창발되는 원리를 발견하고 특징지을 과학 기술이 손닿는 곳에 있는 것이다. 앞으로 수년이 결정적임을 두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의식의 탐구’는 코흐라고 하는 뛰어난 과학자가 수 십 년간 뇌에 대해 연구해 온 과정의 산물이며 5년에 걸친 집필 기간을 거쳐 출간된 저서이기 때문에 내용도 방대할 뿐만 아니라 전문가가 아닌 내가 보기에는 매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놓을 수 없게 하는 많은 매력들이 있었다. 첫 번째 매력 중의 하나는 NCC(neuronal correlates of consciousness, 의식의 신경 상관물)라고 하는 개념이었다. 이 개념은 환원주의적이고 물리주의적 관점에서 정의하는 의식의 물질적 실체와 관련이 있다. 코흐는 NCC를 “특정한 의식적 지각이나 경험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신경적 기제나 사건들의 최소 집합” 이라고 정의하며 만약 NCC의 실체가 드러난다면 그것은 의식의 이해 특히 신경생물학적 이해에 있어 혁명적인 진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개안적으로 특정한 지각의 생물학적 실체는 특이한 3차원적 패턴으로 발화하는 뉴런들의 상호작용 및 연결망에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와 같은 뉴런 연결망의 일부를 코흐는 NCC라고 정의하고 있지 안다 생각한다. 그렇다면 코흐가 말하는 NCC는 어디에 있을까? 아직 모른다 그러나 시각적 지각과 관련하여서는 아마도 그것이 IT(하측두 피질)에 위치할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코흐는 NCC의 탐색과 규명에 매우 큰 무게를 두고 있고 신경생물학계에서도 이는 분명 매우 주목을 받고 있는 주제인 것 같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의식의 신경생물학적 이해를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설사 NCC가 명확히 규명된다고 하더라도 이는 의식의 이해에 다가서는 첫걸음일 뿐일 것이다. 왜냐하면 NCC가 밝혀진다고 할지라도 NCC의 구조와 사건들이 실제로 어떻게 우리의 느낌, 감정 그리고 고도의 정신작용들로 발현되는가 하는 진정 우리가 알기를 원하는 문제는 여전히 그대로 남기 때문이다-물론 그 해답에 조금 다가서기는 하겠지만-. 완전히 적절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NCC의 규명은 유전현상의 규명에 있어 차가프가 발견한 DNA 염기 구성비나 Avery 등 또는 Hershey & Chase의 발견 정도에 해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즉 진정 본질적인 규명이 남은 것이다.

두 번째로 흥미있었던 내용은 의식과 관련해 밝혀진 신경계의 조직도와 그 계층적 특성이었다. 막연히 아직 멀었을거야 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나에게 원숭이에서 밝혀진 전기회로도와 같은 시각계의 복잡한 조직도는 깊은 인상을 주었다. 현대 과학으로 이 정도 아니 그 이상 밝혀져 있기에 코흐처럼 자신있게 의식의 규명이 먼 미래의 일만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신경계 작용의 계층적 특성- 예를 들어 형태의 지각과 관련한 시각정보의 흐름이 망막>V1>V2>V4>IT 로 흐르는 것에서 볼 수 있는-은 진화학적인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당연지사이겠지만 역시 흥미로운 현상이 아닐 수 없었다. 좀 빗나간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지만 생명 등 자연 곳곳해서 발견되는 계층적 속성들은 우주의 계층적 속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시 돌아와... 신경계 구조들의 작용에 있어 그 계층적 정보의 흐름 보다도 더 흥미로웠던 부분은 정보 흐름의 되먹임(feedback)이었다. 즉 망막>시각피질>전두엽 뿐만 아니라 전두엽으로부터 초기 시각피질로의 정보의 되먹임. 이것에 바로 의식 출현의 중요한 열쇠가 있지 안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같은 되먹임은 망막에서 시작된 단순한 정보에 고차원적인 풍부함을 더 해 의식이 태어나게 하는 중요한 과정이 아닌가 생각된다.

세 번째 흥미로웠던 주제는 “주의” 였다.
“당신이 의식하는 것은 보통 당신이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
진정 그러하다. 눈을 통해 매순간 들어오는 신호(정보)의 양은 어마어마하다. 이 모든 신호가 뇌피질에서 계산되어 의식된다면 우리 뇌는 아마도 과부하로 타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 뇌는 주의(attention)라고 하는 필터를 통해 시각 정보의 일부만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의식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뉴런(들)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대상(들)이 명시적으로 표상되기 위해서는 경쟁을 하게 되고 경쟁에 이긴-주의를 끈- 대상만이 선택되어 의식되게 되는 것이다. 주의는 의식으로 가는 길목에서 일종의 bottleneck과 같이 작용한다.
또한 주의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우선 상향 주의(bottom-up attention)는 대상의 특출성(saliency)에 기반을 두고 작용한다. 어떤 자극이 충분히 특출하다면 그 자극은 의식된다. 상향 주의에 의한 선택은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대상과 그 속성에 적용되며, 선택은 일시적이고 우리 스스로가 선택을 통제할 수 없다. 우리는 일상에서 매순간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며 주변을 살피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우리가 주변의 모든 것을 보고 있다고 의식한다. 이는 상향 주의를 통해 주변 대상들의 요점만을 지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형태의 주의는 하향 주의(top-down attention) 즉 초점 주의이다. 초점 주의는 시야의 국부적 지역에 위치하는 대상의 특정한 속성만을 선택적으로 의식할 수 있도록 하며, 상향 주의와 달리 의식의 지속 기간이 길고 자의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특정한 자극들이 동시에 자주 반복되면 이러한 자극들은 통합된 단일체로 의식되게 되는데 이러한 결합(conjunction) 과정은 초점 주의에 의존한다.

언급하고 싶은 마지막 논점은 이 책의 끝부분에서 논하고 있고, 크릭과 코흐가 좋아한다고 하는 주제 즉 우리가 의식하는 것 외에 “비의식적 호문쿨루스” 라고 하는 초정신적인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이다. 좀 더 부연하면, 우리가 의식하는 것은 외부세계 자체가 아니라 신경계가 선택한 외부세계에 대한 표상들 중 하나이며, 이 표상에 붙여진 감각질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내면세계의 어떤 초정신적인 작용의 결과라는 것이다. 코흐는 내면세계의 초정신적 어떤 실체를 “호문쿨루스”에 비유하고 우리가 이 호문쿨루스의 작용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의식적”이라는 표현을 덧 붙였다. 그리고 물론 “초정신적”이라고 표현했다고 해서 흔히 심신이원론에서 주장하는 비물질적인 어떤 것을 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코흐는 전두엽의 어딘가 제한된 영역에 사실상 호문쿨루스처럼 행동하는 신경망이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코흐의 이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실제 외부세계도 알지 못하고 우리의 깊은 내면세계도 알지 못하며, 오직 감각질의 주관적 세계만을 붙잡고 있는 존재이니 좀 허무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의식의 탐구”는 분명 흥미로웠지만 내겐 어려운 책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간 미루어 두었던 정신작용에 대한 공부를 시작해 보는 계기는 될 듯 하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다음에 읽어야 할 책은 물론 코흐의 절친한 동료이자 스승인 크릭의 “놀라운 가설”이 될 것이다. 그 후에는 에델만의 “신경과학과 마음의 세계” 가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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