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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왜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가> 앤드류 뉴버그

 

왜 인간은 종교를 갖게 되었을까? 종교 체험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다분히 주관적이어서 증명하기 어려운 이러한 문제를 두뇌과학자가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물론 과학도 엄밀한 의미에서 신화나 종교처럼 이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세련된 안경이다. 인간 인식의 근원적 오류 가능성도 언제나 존재한다. 이 조그만 지구에 갇혀 살며 우리가 관찰한 것을 통해 진리를 파악한다고 해도, 러셀이 지적한 오류가능성처럼, 즉 학은 언제나 하얗다고 믿었다가 갑자기 홍학이 발견된 것처럼, 우리는 오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의 특권은 인식의 오류를 정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인간에게 이해된 신조차 무수한 오류가 발견된 현재의 시점에서 신의 개념과 존재를 제대로 규정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할 것이다. 아무튼 얘기가 잠시 빗나갔지만 현대에 과학만큼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종교도 드물며, 일찌기 이렇게 가설과  검증에 신중을 기했던 적도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역대 다른 종교보다 과학은 객관성과 신뢰도가 좀 높다고 얘기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유용성이란 이렇게 모호한 관념의 세계를 과학적으로 규명한 데 있을 것이다.

한편 종교에 관련된 이런 저런 책을 읽으니 21세기는 확실히 종교 통합의 길이 여러 모로 열리고 있음을 실감한다. 대학시절 부터 지속적으로 종교 공부를 해온 나로서도 일찍이 신비주의를 중심으로 모든 종교가 만나는 것을 확인하고 있었지만, 이런 생각도 이미 인류 보편의 생각이 된 듯하다. 이 책을 읽으며 또한 확인하는 바였다.

이 책을 읽으면 분명 과학으로 대표되는 합리적 이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편협해지기 쉬운 종교의 단점을 극복하고 한층 심화된 종교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될 지도 모른다. 정말 종교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이성 없는 맹신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에 대해 세밀하게 해설할 의도가 없다. 하지만 책의 내용을 세밀하게 해설하지 않는다고 해서 책이 가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내용이 너무나 알차 2번 읽어도 좋을 정도이다. 

물론 이 책 외에도 최근 발간되고 있는 두뇌과학과 마음, 그리고 심리학 서적들은 참으로 재미도 있을 뿐 아니라, 통찰력도 주는 것들이다. 신화학, 종교학, 심리학, 예술 등의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모두 이 책을 읽고 뇌와 종교의 관련성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래도 아쉬운 대로 책의 대강을 거칠게 짚어보자.

신이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작가는 뇌의 진화 과정에서 획득된 결과로 신화와 종교의 신비체험을 말한다. 즉 종교와 신은 인간의 생존가능성을 증진시키는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비대하게 발달한 신피질의 기능 중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인과론적 기능인데, 바로 인간에게 절대 떠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실존의 불안에 대한 은유적 해답에서 신화가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신화는 종교의 기원이기도 하다. 신과 형이상학적 세계가 죽음과 악, 불행 등의 문제를 해명할 인과론적 원인을 제시하기 때문에 불안에서 안정을 취하려는 뇌의 문제를 해결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단지 신피질 상의 해결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주관하는 변연계로 까지 작용하여 체험으로써 경험되게 된다. 그것이 의식의 효과이다. 춤이나 노래 등 반복된 리듬이 강도에 따라 변연계의 흥분 기능과 억제 기능에 작용하면서 점차 고조되다가 자아에 대한 느낌을 주관하는 정위영역의 감각 전달을 끊는 일이 생기고 그 때 전체의 일체감이라는 희열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신비체험의 강도와 종류도 여러 가지지만 이러한 체험이 신화와 종교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형성하고 생존에 긍정적 기능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체험은 동서 모든 문명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고 종교 체험을 단수히 뇌의 전기화학 반응으로 폄하할 이유는 없다. 자아 없는 의식의 통찰로 전체라는 본질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통찰이 인격적 변화를 낳고 삶을 변화시키기 때문에, 그야말로 인간이 처한 문제를 근원적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읽어보자. 좋은 만남이 될 것이다.

 

- 목차 -


제1장 신의 사진? - 믿음의 생물학에 대한 개설

제2장 뇌의 기구 - 지각의 과학
우리를 사람으로 만드는 것 : 대뇌피질
지각의 결합
주위의 세계를 이해하고 그것에 반응하기
뇌는 어떻게 스스로의 마음을 만드는가

제3장 뇌의 구조 - 뇌는 어떻게 마음을 만드는가
흥분계와 억제계
자율적 상태와 영적 체험
감정 뇌 : 변연계
마음은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 인지적 오퍼레이터

제4장 신화만들기 - 이야기와 믿음을 만들고 싶은 충동
신화의 탄생

제5장 종교 의식 - 의미의 물리적 발현
의식과 일체
의식의 진화론적 기원
의식의 신경생물학
의식과 신화의 관계

제6장 신비주의 - 초월의 생물학
신비주의의 정의
신비주의와 정신 건강
신비 체험의 신경생물학
절대적 일체 상태와 진화와 자아

제7장 종교의 기원 - 훌륭한 개념의 지속
종교와 제어
종교의 기원
신을 향한 창문

제8장 현실보다 더 실재적인 - 절대적인 것을 추구하는 마음
신비주의자들의 과학
현실이 과연 궁극적인 실체인가
마음은 자아를 어떻게 만드는가

제9장 신은 왜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가 - 신의 은유와 과학의 신화

신은 왜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가
앤드루 뉴버그 외 지음/이충호 옮김   한울림 /2001년 11월/303쪽

 

바로 당신의 뇌 속에 신이 존재한다.
첨단두뇌과학의 조명으로 미국 과학계와 종교계에 불꽃 튀는 논쟁을 불러일으킨 화제의 책으로

뇌가 실체를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 저 자  앤드루 뉴버그, 유진 다킬리, 빈스 라우즈
앤드루 뉴버그는 펜실베이니아대학 핵의학부 방사선학과 조교수이자 종교학과 전임 강사이다. 종교적 체험과 신비체험의 신경학에 초점을 맞추어 뇌의 생리학과 기능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으며, 유진 다킬리와 함께 『신비적인 마음』을 공동 집필하였다.

펜실베이니아대학 정신의학과 임상 조교수를 지낸 유진 다킬리는 『생물발생학적 구조주의와 뇌와 상징과 경험』 『신비적인 마음』 등 많은 책을 저술했다.

빈스 라우즈는 프리랜스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 그가 쓴 글들은 『뉴욕타임즈 매거진』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리』를 비롯한 많은 출판물에 실렸다. 현재 『Discovery Channel online』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다.

 

▣ 역 자  이충호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인문대학에서 영문학을 부전공하였다.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경력을 쌓은 뒤 현재 과학 전문 번역가로 활동중이다.

 

▣ Short Summary
1885년,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다. 물론 이 말은 살아 있던 신이 죽었다는 말이 아니라 신은 아예 살아서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시대의 합리주의자들은 신이 비과학적인 과거의 잔재에 불과하며 종교적 믿음은 미신과 자기기만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생각했다.

 

합리주의자들은 인간의 이성으로 비합리적인 미신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러한 자신감이 니체의 선언으로 표출된 것이다. 그러나 그 후 니체는 죽었지만 신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남아 위세를 떨치고 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합리주의자들이 간과한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종교의 질긴 생명력의 뿌리였다. 그 생명력의 뿌리는 바로 신비 체험이다. 인간의 논리와 이성을 초월하는 신비 체험은 시대와 문화와 종교에 관계없이 일관되게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신비 체험이 존재하는 한 신과 종교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왜 인간은 오랜 옛날부터 신비 체험을 해왔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사람의 뇌 자체에 그러한 능력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이 책에서 바로 이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즉 뇌 속에서 신의 사진을 찍으려고 한 것이다.

 

그들은 영적 체험을 하는 사람들의 뇌 상태를 사진으로 찍어본 결과 특정 부위의 활동이 급격히 감소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처럼 신비 체험이 단순한 뇌의 신경 경로에 생기는 전기화학적 깜빡임이 만들어내는 착각이나 환각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들은 과학적인 실험과 연구결과를 통해 오히려 신비 체험이라는 것이 현실보다 더 생생하고 실체로 느껴지는, 실재하는 경험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인정함으로써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있다. 신이 사람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식시키려면 뇌의 신경학적 구조를 이용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뇌의 신비는 다 밝혀지지 않았고 뇌 속에서 신의 사진을 찍는 연구도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만약 연구가 더 이루어져 신비 체험을 일으키는 것과 똑같은 현상을 일으키도록 뇌를 자극하여 피실험자가 득도를 하거나 신과 일체감을 이루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신은 인간에게서 사라질 것인가? 그래도 사람의 뇌가 존재하는 한 신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신경신학이라는 흥미로운 분야를 소개하는 훌륭한 입문서로서 뇌가 실체를 어떻게 인식하는 지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하여 내면의 세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존재의 근본적인 미스터리에 대해 성찰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으로 여겨진다.

1장 신의 사진?
대학병원 실험실의 작고 어두운 방에 로버트라는 젊은이가 양초와 재스민 향이 나는 막대에 불을 붙인 다음, 바닥에 앉아 다리를 꼬아 가부좌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는 독실한 불교 신자이자 티베트 명상 수행자로 또 다시 내면 세계로 명상 여행을 떠나려는 것이다.

유진 다킬리와 나는 수년동안 종교적 경험과 뇌 기능 사이의 관계를 연구해왔다. 그래서 우리는 명상에 도달한 로버트의 뇌 활동을 조사하면 사람의 의식과 자신보다 더 거대한 어떤 것과 연결되고 싶어하는 사람만이 지닌 영원한 갈망 사이의 신비스러운 관계에 대해 무언가 발견하지 않을까 기대했다.

 

다년간의 연구를 통해 진과 나는 로버트의 신비 체험이 실제로 존재하며 엄밀한 과학을 통해 측정 및 검증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로버트가 신비적인 초월 단계에 이르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는 그 순간의 뇌의 상태를 사진으로 찍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로버트가 명상에 빠지고 나서 한 시간을 기다렸다. 이제 방사성 물질을 기다란 정맥 주사선에 주입할 시간이다. 그리고 나서는 로버트가 명상에서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를 병원의 핵의학과로 데려갈 것이며, 그 곳에는 최첨단 SPECT 카메라가 기다리고 있다.

 

SPECT 카메라는 방사능의 방출을 탐지하는 최첨단 영상 촬영장치로서 몸 속에 주입한 방사성 추적자의 위치를 포착함으로써 뇌의 혈류 패턴을 정지 사진으로 정확하게 보여준다. 이때 혈류가 뇌의 특정 부위에 많이 모여 있으면 그 부위의 활동이 증가한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SPECT의 영상이 로버트가 명상의 최고조에 이른 순간에 그의 두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리라고 기대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로버트가 명상에 들어가기 전에 그의 뇌를 SPECT로 주사한 기준 영상은 정위연합 영역을 포함해 뇌의 많은 영역이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한 활동은 붉은 색과 노란색의 빛이 요동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로버트가 명상에서 절정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 찍은 사진은 정위연합 영역이 녹색과 파란색(활동 수준이 급격히 감소한 것을 시사한다)의 어두운 얼룩 속에 묻혀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이러한 결과에 우리는 큰 호기심을 느꼈다. 왜냐하면 정위연합 영역은 결코 쉬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뇌의 이 작은 부분에서 활동수준이 비정상적으로 급격히 떨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숙고하다가 한 가지 흥미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정위연합 영역은 전과 다름없이 열심히 활동하고 있지만 들어오는 감각정보가 어떤 경로를 통해 차단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영역에서 뇌의 활동이 급격히 감소한 것을 설명할 수 있다. 만약 정위연합 영역이 자기 역할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전혀 얻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마도 정위연합 영역은 자신과 외부세계 사이의 경계를 발견하지 못하며, 그러한 구별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뇌는 자신이 무한하며 마음이 감지하는 모든 것들과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는 것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장 뇌의 기구
1980년대 초에 어느 대학의 로봇공학 센터에서 과학자들은 그들이 새로 만든 로봇이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불안정하게 움직임을 반복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로봇의 ‘우주’는 대학 건물 내의 지하 창고에 장애물이 어질러져 있는 길이 6m 정도의 방에 불과했지만 로봇이 자신에게 프로그램된 정보를 통해 알 수 있는 유일한 세계였다. 과학자들이 부여한 로봇의 목표는 간단한 것이었다. 로봇의 시각을 이용해서 여러 가지 장애물이 놓여 있는 방을 안전하게 헤쳐나간 다음, 복도로 나가는 문을 발견하여 그 큰문을 여는 것이다. 최첨단 기계가 하기에는 너무 하찮은 과제가 아니냐고 생각하겠지만 과학자들은 로봇이 그 임무를 해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계산 능력을 극한까지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로봇에게는 앞으로 약간 나아갈 때마다 자신의 세계가 조금씩 달라져 보일 것이다. 달라지는 그림들은 아주 미미한 정도의 차이밖에 없지만 그러한 미미한 차이에도 총명한 로봇의 동작은 중단되고 만다. 지금 들어온 상들은 조금 전에 보았던 세계가 약간 변한 모습이란 걸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로봇의 처리장치들은 계산 능력이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로봇의 입장에서는 ‘어떤’ 변화라도 그것은 ‘완전한’ 변화로 보이고, 각각의 상은 완전히 다른 새로운 우주로 보였다.

 

이러한 처리과정은 로봇의 디지털 뇌에 엄청난 부하를 가했고, 그 결과 로봇이 앞으로 나아가는 동작은 굉장히 느릴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출발한지 열 시간쯤 지난 후에야 로봇은 목적지인 문에 도달하여 갈고리 손으로 손잡이를 잡은 다음 천천히 문을 당겨 열었다.

 

생물이 최첨단 컴퓨터가 지니지 못한 그러한 놀라운 감각 처리능력을 지니고 있는 가장 그럴듯한 이유는 입력된 감각정보를 해석하는 생물의 정교한 신경망이 과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로봇처럼 하향식으로 전달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기적인 내부 네트워크는 뉴런 하나하나가 상향식으로 연결되어 가장 총명한 소프트웨어 공학자조차도 꿈만 꿀 수 있는 수준의 복잡성과 우아한 통합적 체계에 도달하였다.

 

사람 뇌의 평균 무게는 1,600g 정도이다. 크기는 큰 콜리플라워 머리만하며, 색이나 밀도는 단단한 두부 덩어리와 비슷하다. 작은 인대들이 뇌를 두개골 벽에 잘 붙어 있도록 도와주고 얇은 액체층이 있어 두개골과 뇌의 바깥표면 사이에 완충작용을 한다. 대뇌 표면의 주름인 뇌회는 뇌의 나머지 전체 부분과 복잡하고도 정교한 방식으로 협력하여 몸의 신경망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의 홍수를 전달하고 해석하고 반응할 수 있게 해준다.

 

한편 우리는 대뇌 피질의 대부분을 신피질이라고 부르는데, 이 '신피질'을 소유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동물들과 결정적으로 구분되는 대뇌의 지능을 가지게 되었고 언어와 예술, 신화, 문화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마음과 육체가 결합하여 우리의 자아상과 세계관을 만들어내는 장소도 바로 이 곳이다.

 

 

3장 뇌의 구조
여러분이 뇌 영상 연구의 피실험자라고 상상해 보자. 실험의 일부로 여러분은 집에서 만든 사과파이를 먹으라는 지시를 받는다. 여러분이 사과파이를 맛있게 먹는 동안 뇌를 촬영한 영상은 사과파이를 먹는 경험을 하는 뇌의 여러 처리 영역의 신경학적 활동장면들을 포착한다.

 

SPECT로 촬영한 뇌 영상은 이 모든 활동을 컴퓨터 화면상에 밝은 색깔의 얼룩들로 보여줄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과파이를 먹는 경험은 모두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과파이가 실재하지 않는다거나 그것이 맛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 체험이 신경학적 행동으로 설명된다고 해서 영적 체험의 실재가 부정될 수는 없다. 만약 신이 존재하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면 우리에게는 신경학적으로 만들어지는 현실의 해석 외에는 신의 존재를 체험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신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청각 처리과정이 필요하고,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는 시각 처리과정이, 그리고 그의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지적 처리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설사 신이 신비적인 방식으로 말을 했다 하더라도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지적 기능이 필요하고, 황홀감과 경외감에 빠지기 위해서는 뇌의 감정 중추가 필요할 것이다. 신경학은 이 점을 분명해 해준다. 뇌의 신경 경로를 통하지 않고서는 신이 여러분의 머릿속에 들어올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다.

 

그러므로 신은 여러분의 마음속 말고는 다른 어떤 곳에서도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적 체험과 일상적인 물질 세계의 경험은 마음속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다. 영적 체험의 궁극적 본질이 무엇이든 간에 사람의 영성에서 의미가 있는 것은 모두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PET, SPECT, FMRI를 이용하면 뇌의 어느 부분이 오감의 각 감각과 연관이 있는지 전신 운동에서 새끼손가락을 까닥이는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어떤 운동 행위에 의해 어떤 부분이 활성화되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피실험자들이 덧셈과 뺄셈을 하거나 편지를 쓰거나 고통을 경험하거나 친구의 얼굴을 바라볼 때 뇌의 어느 부분들에 신호가 들어오고 나가는지를 조사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우리가 취하는 모든 행동이 뇌 속의 하나 또는 둘 이상의 특정 영역에서 일어나는 활동과 관련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모든 종교적, 영적 체험도 포함된다. 그리고 만약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신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복잡하게 뒤엉킨 뇌의 신경 경로와 생리학적 구조들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을 수 없다.

 


4장 신화 만들기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신화에 바탕하고 있다. 그렇다면 종교적 체험에 대한 신경학적 뿌리를 찾는 일은 신화를 이야기하고 믿는 사람의 뇌를 관찰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어떤 종교,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의 마음은 왜 가장 골치 아픈 문제들에 대한 답을 신화에서 찾으려고 하는가? 얼핏 생각하기에 그 답은 명백해 보인다. 우리는 이해하기 힘든 위험한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론적 두려움을 완화시키고 위안을 얻기 위해 신화에 의지한다는 것이다.

 

자연계에서 죽음이 이상한 것으로 여겨지는 일은 결코 없다. 야생동물들이 늘 마주치는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동물들이 죽음의 신비에 대해 생각한다고는 믿을 수 없다. 동물들은 오히려 위험을 감지하고 피하는데 더 관심을 쏟는 것처럼 보인다. 무자비한 동물계에서 위협은 항상 눈앞에 존재하며 위험은 전혀 신비로운 것이 없는 명백한 이웃이다.

 

예를 들면 영양이 치타에게서 달아나는 행동에는 어떤 숨겨진 의미도 없다. 영양은 무사히 달아나든지 못하든지 할 뿐이다. 풀을 뜯던 영양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자율 신경계가 도망칠 준비를 하는 동안 영양은 불안한 눈으로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볼 것이다. 그러나 불안한 자극이 계속되지 않는 한, 또는 포식동물의 실제 모습이 확인되지 않는 한, 자율 신경계의 신경학적 활동은 잦아들고 영양은 안심하고 다시 풀을 뜯기 시작한다. 만약 자극이 계속되거나 포식동물의 모습이 실제로 눈에 보인다면 흥분 반응이 고조되어 영양은 도망가거나 유사시에는 싸워야만 할 것이다.

 

반면, 사람은 위험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생물학적인 두려운 반응을 나타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사자가 많이 살고 있는 장소를 걷고 있는 부시맨은 사자가 눈에 띄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긴장을 느끼지만 그 주위에서 풀을 뜯고 있는 동물들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고 평화롭게 지낸다.

 

고맙게도 이러한 두려움을 만들어낸 큰 뇌가 발명을 통해 그러한 두려움을 해결하는 방법도 제공해주었다. 사람들은 연장과 무기와 간단한 기술을 발달시켰다.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삶으로써 협력하여 사냥을 하고, 자원을 나누어 가지고, 외부의 적으로부터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개념도 발명했다. 법, 문화, 종교, 과학이 바로 그러한 개념이다. 우리를 오늘날 이곳까지 데려다놓은 그 모든 발명품(부싯돌에서 최근의 획기적인 심장 이식 수술에 이르기까지)은 그 기원을 추적해 보면 뇌가 우리에게 위험을 경고해주는 방식인 불안을 감소시키기 위한 마음의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초기의 인류는 자신들에게 해를 입힐 잠재성이 있는 어떤 위협을 확인하고 해결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에서 어떤 자연적 수단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놀라운 근심을 한 가지 발견했는데 그것은 바로 누구나 죽는다는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운명을 이해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형이상학적 근심거리들에 마주치게 되었고, 그러한 의문들은 곳곳에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을 제기했을 것이다. 왜 우리는 결국엔 죽으려고 태어나는가? 죽고 난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우주 속에서 우리의 위치는 어디인가?

이것들은 아주 난처한 질문들이지만 수천 년동안 전 세계의 많은 문화들에서 그 해결책이 신화의 형태로 발견되고 있다. 본질적으로 모든 신화는 단순한 틀로 환원시킬 수 있다. 첫째, 신화는 중요한 존재론적 관심사에 초점을 맞춘다. 그 다음에는 그런 관심사를 서로 융화될 수 없는 대립되는 것들의 짝(영웅과 괴물, 신과 사람, 삶과 죽음, 천국과 지옥)으로 특징짓는다. 마지막으로, 신화는 종종 신이나 다른 영적인 힘의 작용을 통해 우리의 존재론적 근심을 완화시켜 주는 방식으로 서로 대립되는 것들을 화해시킨다.

 

우리는 고통을 받고 결국엔 죽는다. 우리는 위험하고 혼란스러운 세계에서 미소하고 약한 존재로 느껴진다. 이러한 커다란 불확실성을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은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 설명을 제공하는 이야기들이 종교적 신화의 형태를 띠기 시작한 것이다.

 


5장 신비주의
14세기에 독일에 살던 마르카레타 에브너라는 수녀는 신성한 사순절을 맞이하기 위해 여러 날동안 경건한 침묵과 명상 기도에 빠져 있었다. 어느 날 밤, 수녀원의 예배당에서 홀로 기도를 하던 그녀는 성가대 석에서 놀라운 존재를 인식했는데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할렐루야가 울려 퍼졌을 때, 나는 큰 기쁨 속에서 침묵에 잠기기 시작했고, 갑자기 큰 두려움이 엄습하더니, 그 두려움 속에서 헤아릴 수 없는 은총에 둘러싸였다. 나는 내면에서 하느님의 신성한 힘이, 나를 붙잡고 내 인간의 심장이 내게서 꺼내지는 것을 느꼈다. 그와 같은 느낌을 이전에는 전혀 느낀 적이 없다. 헤아릴 수 없는 감미로움이 나에게 다가왔고, 마치 내 영혼이 몸에서 떠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커다란 열정적인 사랑과 함께 내게 주어졌고, 나는 계속하여 하느님의 신성한 힘에 의해 변화된 말로 기도할 수 있었다. 그것은 저항할 수 없었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그 속에 계속 들어 있었다는 말 외에는 그것에 대해 아무 것도 쓸 수가 없었다.

 

수백 년 전에 고독한 예배당에 있던 마르가레타 수녀는 정말로 예수의 신비스러운 방문을 받았던 것일까? 아니면 오늘날의 합리적인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녀는 그 시대의 과학으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감정적 또는 심리학적 불균형의 희생자였을까?

현대 과학적 사고의 보편적인 견해에 따르면 신의 부름을 받았다는 이 수녀가 경험한 무아지경의 영적 일체감과 수많은 신비주의자들이 경험한 그와 비슷한 것은 결코 영적인 것이 아니라 뇌의 기능 장애나 다른 심리학적 스트레스로 인한 착각 상태이다. 실제로 프로이드 시대 이래로 많은 정신병학자들은 신비 체험이란 실현할 수 없는 현실을 거부하고 안전하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어머니의 사랑에 잠겨서 느꼈던 어린 시절의 무한한 기쁨을 되찾고자 하는 신경증 환자의 환각이라고 믿어왔다.

 

물론 과학은 그러한 ‘초자연적’ 사건에 대해 자연적인 원인을 찾으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합리적인 견지에서 볼 때 신비주의자들의 주장은 착각이 아닌 다른 것에 바탕하고 있다고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해왔던 과학적 연구는 마르가레타 수녀의 경우처럼 진정한 신비적 접촉은 반드시 감정적 비탄이나 신경증적 착각이나 어떤 병리학적 상태의 결과가 아니라 분명히 실재하고 건전하고 건강한 마음에 의해 생겨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신비 체험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며 정상적인 합리적 사고과정대신에 직관적인 이해가 들어선다. 신비 체험자는 종종 신적인 존재의 암시를 경험하거나 사물의 가장 근원적인 의미를 보았다고 주장하며, “궁극적인 자유에 이르는 내면의 실체가 밝게 빛나는” 것으로 묘사되는 열광적인 상태에 빠진다. 그리고 모든 신비주의자의 증언에서 핵심을 이루는 부분은 그들이 물질적 존재를 뛰어넘어 영적으로 절대자와 합쳐졌다는 신념이다.

 

신비적 상태에서 우리 모두는 절대자와 하나가 되고, 우리가 하나임을 인식한다. 이것은 나라나 신앙의 차이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영원하고 성공적인 신비주의 전통이다. 힌두교나 신플라톤주의, 수피교 또는 기독교의 신비주의에서 우리는 똑같은 기록들이 반복되는 것을 발견한다. 즉, 신비주의자들이 하는 말들이 공교롭게도 매우 흡사하게 일치하고 있다.

 

 

제6장 종교의 기원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1885년에 신은 죽었다는 유명한 선언을 했을 때 그는 신이 실제로 살았던 적이 없었다는 의미에서 말한 것이었다. 니체는 신은 단지 비과학적인 과거의 흔적에 불과하며, 인류는 곧 그것을 훌쩍 뛰어넘을 것으로 생각했다.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존재의 신비에 대해 과학이 더 현실적인 설명을 제공함에 따라 종교의 비이성적인 호소는 더 이상 먹혀들지 않고 온갖 형태로 표현된 신은 그저 사라져갈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신은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고 새 천년의 시대로 접어들고 나서도 종교와 영성은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다. 만약 니체와 그의 동시대인들이 지금까지 살아서 이것을 본다면 신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무지가 이성에 대해 승리한 것에 기인한다고 여길 것이다. 종교적 믿음은 미신과 무서운 자기 기만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확신했던 그들로서는 사람이 신에게 매달리는 것은 신이 없이는 세계를 마주 대할 힘과 용기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종교가 지닌 놀라울 정도로 질긴 생명력이 심약한 부정이나 단순한 심리학적 의존이 아니라 그보다 더 깊고 건전한 무엇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믿는다. 여러 가지 증거들로 미루어볼 때 종교의 가장 깊은 기원은 신비 체험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종교가 계속 지속되는 것은 사람의 뇌 구조 자체가 신이 존재한다는 확신으로 해석될 수 있는 다양한 일체감을 경험하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신비 체험이란 그것을 바라며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원치 않는 사람에게도 자연발생적으로 찾아오며 심지어는 그것에 대해 전혀 들어보지도 못했고, 그것을 경험하고 나서도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찾아온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신비 체험은 자연발생적이다. 영적 일체를 추구하느라 평생을 바치는 신비주의자조차도 그것이 언제 찾아올지 예측할 수 없다.

 

선사시대의 한 사슴 사냥꾼을 상상해 보자. 그의 씨족은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 필사적으로 식량을 찾는 사냥꾼은 잠도 잊고 황야에서 혼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사냥에 전념한다. 쉴 때조차도 그는 마음속에 씨족 전체가 먹을 수 있을 만큼, 그리고 자기 가족과 친구들을 굶주림으로부터 구해줄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수사슴을 떠올리면서 사냥감을 찾아 기대 섞인 시선으로 지평선을 바라본다.

 

그러는 사이 여러 날이 흘러가고, 사냥꾼이 굶주림과 피로로 기진맥진해질수록 수사슴의 이미지는 상상 속에서 점점 더 생생해진다. 그의 눈에는 언덕 저 너머에서 또는 구불구불 굽이치는 강둑에서 풀을 뜯어먹는 수사슴이 보인다. 그는 곧 그 환영에 사로잡히고 사슴을 죽이고자 하는 갈망은 일종의 만트라(주문)가 된다. 그의 생각은 반복적이 되고 마음의 초점은 점점 가늘어지고 강렬해진다. 곧 그의 마음에서 필요 없는 모든 생각이 사라지고, 그의 의식에는 수사슴에 대한 갈망 외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이 경우 사냥꾼의 정신 집중에 영적인 요소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그의 의도는 단순히 살아남으려는 것뿐이다. 그러나 신경학적 관점에서 보면 그는 종교적 신비주의자들이 자신의 인식에서 신 외의 모든 잡념을 없애려고 노력함으로써 촉발되는 일련의 사건들과 똑같은 사건들을 촉발시킨다.


이것은 순전히 추측에 바탕을 둔 시나리오이지만 신경학적으로 볼 때 상당히 가능성이 있는 시나리오이다. 자신의 영적 체험에 대한 사냥꾼의 반응이 훗날의 신비주의자들의 반응과 비슷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사냥꾼에게 희망과 확신과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을 주었을 것이고, 그는 의심의 여지없이 자기 씨족에게 돌아가 거대하고 자비로운 힘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그 계시를 전해주었을 것이다.

굶주리고 있던 그의 씨족 동료들이 그의 이상한 소리를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알 길이 없지만 며칠 뒤에 그 씨족의 사냥꾼들이 사슴 무리를 만나 몇 주만에 처음으로 사냥에 성공했다고 상상해보자. 그러면 최초의 그 사냥꾼은 그것을 ‘위대한 수사슴’이 준 선물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의 주장에 동조할지 모른다. 그러면 그 수사슴 이야기는 신화의 차원으로 올라서서 씨족 구성원들에 의해 더욱 다듬어져 종교화될 것이다.

 

종교를 탄생시키는 초월적 상태가 신경학적으로 실재한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뇌 과학은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설명해주며, 다른 사람들의 연구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상 연구에서도 필름으로 포착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체 상태의 경험은 순전히 신경학적 기능의 결과인가? 아니면 뇌가 지각할 수 있는 진짜 경험인가?

신비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바로 그러한 현실을 경험했다고 분명하게 주장한다. 그것은 우리가 의심의 여지없이 믿는 물질 세계보다 더 실재적인 세계이자 공간 감각도 시간의 흐름도 없고, 나와 우주 사이에 명확한 경계도 없고, 신이 실제로 존재할 여지가 풍부한 차원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과학과 상식은 그러한 일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모든 실재적인 사물들이 들어 있는 물질 우주보다 더 실재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실제로 우리의 탐구는 이러한 가정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연구결과는 신비주의자들이 진짜로 무엇인가를 보았으며, 마음을 통해 우리가 정말로 신적인 어떤 존재의 실재를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리게 하였다.

 


제7장 신은 왜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가
신의 불가지성은 신비주의 경향을 지닌 동양의 종교들에서는 특징적인 원리로 자리잡고 있다. 예를 들어 불교와 도교에서는 인격화된 신의 존재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인격화된 개개의 신들을 숭배하는 힌두교에서조차 개개의 신들은 하나의 최고신인 브라만을 대표하는 것이며, 형태와 묘사를 초월한 존재인 브라만은 “모든 설명이 불완전하며, 진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묘사된다.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신이라는 개념은 서양의 일신론적 종교들에서는 더욱 어려워진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모두 유일한 절대자인 신의 계시에 기초를 두고 세워졌다. 그 신은 자연계와는 따로 떨어진 특별한 초자연적 실체로서 이름과 역사와 자기 백성을 위한 특별한 계획을 갖고 있다. 따라서 서양의 3대 종교의 신비주의자들도 신의 본질은 인간의 이해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공통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영적 체험을 경험한 기독교 신비주의자들도 하느님을 구체적인 어떤 존재로 이해하려는 충동은 단지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할 뿐이라고 결론 내린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당신이 완전해지고 죄를 범하고 싶지 않다면, 하느님에 대해 그 어떤 것도 이해하길 바라서는 안 된다. 하느님은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하느님을 내가 믿는다면, 나는 그를 하느님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신비주의자들의 결론은 명백하다. 신은 그 본질상 알 수 없는 존재이며 객관적인 사실도, 자연적 실체도 아니다. 신은 존재 그 자체이자 절대자이며, 모든 존재의 기반인 하나이다. 우리가 이 진리를 이해할 때 모든 종교는 우리를 더 깊은 신성한 힘에 연결시켜준다고 신비주의자들은 주장한다.

 

신비주의자들은 신의 진정한 본성은 직접적인 신비적 접촉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과학은 전통적으로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우리의 연구결과는 신비주의자들이 절대적 일체 상태의 형태로 묘사하는 영적 통합은 최소한 다른 현실 경험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이며 실재적으로 느껴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전에는 신의 섭리로만 설명되던 수수께끼들에 대해 과학과 철학이 점점 더 합리적인 설명을 제시하게 되자 이성적인 사람들은 점점 신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과학은 신의 존재를 부적절해 보이게 만드는 두 가지 혁명적 이론을 내놓았다.

 

첫 번째 이론은 1830년에 출판된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에서 나타났다. 이 책에서 라이엘은 자연 지형은 신의 손이 아니라 지질학적 힘들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지구의 나이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29년 뒤에 『종의 기원』이 출간되었는데 생명체가 신의 창조적 에너지에 의해 순식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수백만 년에 걸친 생물학적 진화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다윈의 혁명적인 이론은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그러나 과학이나 이성도 더 높은 신비적 실체의 개념을 완전히 부정할 수 있는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과학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실재 세계에 대한 은유적인 그림이며, 비록 그 그림이 그럴 듯해 보이긴 해도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비록 과학이 자연세계에서 객관적으로 검증된 진리에 집착한다 하더라도 사람의 마음은 자연의 객관적인 관찰만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론이 제시하는 사실, 즉 종교의 의식(儀式)은 직관적으로 일체 상태를 촉발시키도록 되어 있으며, 결국 신비주의자들은 미친 것이 아니라는 것 등을 통하여 절대적 일체 상태의 실재성은 더 높은 차원의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명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존재에는 단순히 물질적인 존재를 넘어서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강하게 뒷받침해준다.


우리의 마음은 고통이 사라지고 모든 욕망이 잠잠해지는 일체라는 이 완전한 느낌에 끌리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뇌가 지금처럼 만들어져 있다면 우리의 마음이 더 깊은 실체를 느낄 수 있는 한 영성은 계속 사람의 경험에 영향을 미칠 것이며, 신은 우리가 그 웅장하고 신비스러운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든지간에 결코 사라지지 않고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것이다.

본 도서요약본은 원본 도서의 주요 내용을 5%정도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도서에는 나머지 95%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와 내용은 원본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본 도서요약본이 좋은 책을 고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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