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량 모듈성 테제는 정말 논란의 중심인가?

이덕하

2009-07-17

 논쟁이 있어 보인다.. 1

감각.. 2

운동.. 3

눈감기와 군침.. 3

욕구.. 4

감정.. 5

언어.. 6

그렇다면 싸우나?. 6

진짜 논점은 무엇인가?. 7

논쟁이 있어 보인다

Cosmides & Tooby를 중심으로 하는 (좁은 의미의) 진화 심리학자들은 대량 모듈성 테제를 지지한다.

쉽게 말하면 인간의 뇌에는 수 많은 선천적 모듈들 또는 메커니즘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명시적으로 반대해왔으며 심지어 (넓은 의미의) 진화 심리학자들 중에도 반대자들이 많다. Cosmides & Tooby는 대량 모듈성에 대한 반대가 SSSM(Standard Social Science Model, 표준 사회 과학 모델) 또는 빈 서판론(blank slate, tabula rasa)의 핵심 중 하나라고 보며 여러 논문에서 길게 논박했다.

또한 (좁은 의미의) 진화 심리학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대량 모듈성 태제를 공격하는 것을 빼 먹는 경우가 별로 없다.

SSSM에 따르면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 인간에게는 매우 일반적인 모듈이 단 하나만 있다. 이것은 학습 능력, 문화 습득 능력, 사회화 능력 등으로 불린다. 인간의 사고와 행동 중 대다수는 문화, 사회화, 학습 등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빈 서판론자로 분류되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자신의 믿음과는 달리 사실상 대량 모듈성 테제를 지지한다고 본다. 즉 그들도 진화 심리학자들과 논쟁할 때에는 마치 자신들이 대량 모듈성 테제를 부정하는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상은 알게 모르게 대량 모듈성 테제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감각

현대의 학자들 대다수는 눈만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뇌에서 시각 처리를 해야 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시각 처리 메커니즘 중 상당 부분이 선천적이라는 것도 인정한다. 예컨대 망막에 맺힌 2차원 상을 3차원 공간으로 해석하는 메커니즘이 선천적이라는 점을 부정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또한 인간은 색맹인 경우를 제외하면 색을 3차원(쉽게 말하자면 명도, 채도, 색상의 세 차원)으로 보는데 이렇게 볼 수 있도록 하는 메커니즘이 선천적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진화 심리학자들은 시각 메커니즘 하나만 따져도 수 많은 하위 모듈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데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도 거의 없는 것 같다. 만약 시각 메커니즘 하나만이라도 잘 살펴보면 수 많은 하위 모듈들도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이미 대량 모듈성 테제를 인정하는 것이다.

 

시각뿐만 아니라 후각, 미각, 청각, 촉각 등과 관련된 선천적 메커니즘들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도 거의 없는 것 같다. 또한 예컨대 뇌에 있는 청각 메커니즘이 여러 하위 모듈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주장을 부정할 사람도 거의 없어 보인다.

 

옛날부터 극단적인 빈 서판론자들도 여러 감각 메커니즘들이 선천적이라는 점을 부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단지 옛날에는 눈만 뜨면 저절로 보는 것이라고 착각했을 뿐이다. 20세기가 지나면서 시각 메커니즘을 구현하려는 인공 지능 연구자들의 노력과 시각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인간과 같은 시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복잡한 뇌 회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운동

이번에는 운동 메커니즘을 살펴보자.

이제 손을 통제하는 뇌 회로가 따로 있다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그리고 매우 기본적인 통제 메커니즘이 선천적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어 보인다. 손가락을 움직이려면 손가락에 있는 각 근육을 적절히 수축해야 한다. 예컨대 오른쪽 검지 손가락을 구부리려면 해부학자만 아는 어떤 근육을 수축해야 한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우리가 선천적으로 어떤 근육을 수축해야 검지 손가락을 구부릴 수 있는지를 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남자가 발기를 하기 위에서는 음경에 피가 몰리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피의 순환과 관련된 어떤 근육을 수축해야 할 것이다. 이런 것에 대한 선천적 메커니즘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야동을 보고 남자가 발기하는 것으로 보아 발기와 관련된 명령 중 적어도 일부는 뇌에서 내린다는 점도 명백하다. 따라서 뇌에 발기에 관련된 선천적 메커니즘이 있다는 것도 명백해 보인다.

 

인간에게는 눈꺼풀이나 수정체를 통제하는 근육에서부터 발가락을 통제하는 근육까지 엄청나게 많은 종류의 근육들이 있다. 따라서 이것은 엄청나게 많은 선천적 근육 통제 메커니즘들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이것만으로도 대량 모듈성 테제를 인정하는 꼴이 된다.

눈감기와 군침

인간은 자신의 눈으로 무언가가 날아오면 본능적으로 눈을 감는다. 이것 역시 뇌에서 무언가 정보를 처리해서 눈꺼풀 근육에게 명령을 내리기 때문이다. 이 메커니즘이 선천적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이것이 눈을 보호하도록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한 적응이라는 점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텔레비전에서 먹음직한 음식을 보면 군침을 흘리는 경우가 많다. 시각 정보에서 시작하여 입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기 때문에 뇌의 정보 처리를 거쳤음이 분명하다. 이것이 음식을 먹도록 준비시키는 메커니즘이며 선천적이라는 점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우리가 보통 단순한 반사 운동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는 이런 것들도 뇌에 있는 어떤 메커니즘이 있기 가능한 것이다. 망치로 무릎을 쳤을 때 발차기가 되는 반사처럼 뇌를 거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TV를 보고 군침을 흘리는 때처럼 뇌를 거쳤다는 것이 너무나 명백한 경우가 많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런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깨닫게 될 것이다. 예컨대 큰 소리를 들으면 깜짝 놀라는데 청각에서 시작해서 온몸의 여러 근육으로 끝나는 것으로 보아 뇌에 있는 어떤 메커니즘이 작동한 결과라는 것이 명백하다. 갑자기 맞아서 큰 통증을 느낄 때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욕구

옛날부터 극단적인 빈 서판론자들도 대체로 식욕과 성욕이 선천적임을 인정했다.

 

식욕부터 살펴보자. 식욕은 그냥 먹도록 하는 메커니즘이 아니다. 그냥 마구 먹도록 하는 메커니즘만 있다면 제대로 생존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우선 먹는 양을 조절해야 한다. 인간에게는 포만감 메커니즘이 있다. 즉 어느 정도 먹으면 맛있는 음식도 먹기 싫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식욕 메커니즘의 하위 모듈 중 하나다. 포만감 메커니즘과는 반대의 영향을 끼치는 것이 배고픔 메커니즘이다. 이것 역시 하위 모듈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배고플 때에는 덜 맛있더라도 맛있게 먹는 경향이 있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음식이 부족할 때에는 영양가가 덜한 음식이라도 먹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며 이런 이유 때문에 그런 식으로 진화했다고 볼 것이다. 이것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즉 인간이 음식이 부족할 때 즉 배가 많이 고플 때에는 덜 맛있더라도 열심히 먹도록 자연 선택에 의해 설계되었다는 점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맛있는 음식은 대체로 영양가가 풍부하지만 맛없는 음식은 대체로 영양가가 없거나 독성이 있다. 다른 생물들이 잡아 먹히지 않으려고 만들어낸 독성은 대체로 쓰며, 잘 익은 과일과 같이 영양가가 풍부한 것은 맛있다. 이런 맛에 대한 평가 메커니즘이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한 선천적 메커니즘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인간은 항온 동물이며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도록 하는 메커니즘들이 있다. 추우면 떨도록 하는 메커니즘이 대표적이다. 떨기 위해서는 어떤 근육들을 적절하게 움직여야 하며 이것은 뇌에서 명령을 내리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이다. 즉 인간에게는 체온을 평가해 보고 체온이 낮으면 떨도록 하는 어떤 심리적 메커니즘이 뇌에 있는 것이다. 이것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더우면 땀이 나도록 하는 선천적 심리적 메커니즘의 존재를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인간의 몸 중 대부분은 물로 구성되어 있다. 물의 비율을 적절하게 조절하도록 하는 메커니즘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즉 수분이 부족할 때 갈증을 느끼도록 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이 외에도 온갖 선천적 욕구들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그리고 각 욕구들도 잘 따져보면 여러 하위 모듈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도 자명하다. 예컨대 체온 조절 메커니즘에는 적어도 두 개의 하위 모듈 즉 떨도록 하는 하위 메커니즘과 땀이 나도록 하는 하위 메커니즘이 있는 것이다.

감정

공포 메커니즘이 선천적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공포 메커니즘은 비명, 마비, 심장 박동 수 증가 등으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다. 비명 메커니즘이 다른 이들에게 위험 상황을 알리도록 진화한 적응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특히 어린이들이 공포에 질리면 마비 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포식자에게 들킬 가능성을 줄이기 위한 적응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심장 박동 수 증가가 재빠른 행동을 위한 준비 메커니즘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분노 메커니즘 자체가 선천적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분노 메커니즘이 발현되면 공격적으로 변하는데 이것이 적응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이 외에도 여러 기본적인 감정들이 있다. 그 중에는 공포처럼 그 기능이 뻔해 보이는 것들도 있고 슬픔처럼 여전히 그 기능이 명확히 규명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 물론 질투처럼 선천성 여부 자체가 논란이 되는 경우도 있긴 하다.

언어

촘스키의 선구적인 언어학 연구는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제는 진화 심리학자나 인지 심리학자가 아니더라도 언어 습득을 가능하게 하는 선천적 메커니즘이 있으며 그 메커니즘이 매우 많은 하위 모듈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학자가 많은 것 같다.

 

말을 하려면 혀, 입술, 성대 등을 매우 미묘하게 통제해야 하는데 이런 것을 조절하는 선천적 심리적 메커니즘이 있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인간은 말을 그냥 배운다. 이것은 인간의 목소리를 선택적으로 듣고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는 선천적 메커니즘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촘스키는 문법 학습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선천적 메커니즘이 없다면 인간과 같이 문법을 빠르게 학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상당히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싸우나?

나는 대량 모듈성 테제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도통 이해할 수 없다. 위에서 언급한 수많은 선천적 메커니즘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는 이미 대량 모듈성 테제를 인정하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감각, 운동, 욕구 등과 관련된 선천적 메커니즘들은 열 개 미만의 예외가 아니다. 하위 모듈까지 고려하면 이미 밝혀졌으며 대부분의 학자들이 인정하는 선천적 심리적 메커니즘의 숫자가 수백 개, 어쩌면 수천 개는 될 것이다. 그런데도 선천적 심리적 메커니즘 또는 모듈이 수백 개 또는 수천 개 있다는 Cosmides & Tooby의 주장에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여전히 아주 많다.

 

대량 모듈성 테제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대량 모듈성 테제가 틀렸음을 보여주는 논거랍시고 여러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Cosmides & Tooby는 대량 모듈성 테제가 옳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한다. 그럴 필요가 없다. 그냥 널리 알려진 심리적 메커니즘들을 죽 나열하기만 하면 그만이다(물론 대량 모듈성 테제가 옳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론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이 완전히 시간 낭비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뻔한 것을 규명하는 것도 큰 과학적 업적일 수 있다). 나는 위에서 그 수 많은 것들 중 몇 가지만 나열했을 뿐이다.

 

대량 모듈성 테제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여자가 글을 배울 수 없는 이유를 장황하게 나열하는 정신 나간 사람과 비슷하다. 그런 사람은 글을 읽을 줄 아는 수 많은 여자들을 만나고 있음에도 여자가 글을 읽을 수 없다고 우기며 그 이유를 찾으려고 한다. 이런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 여자의 정신적 능력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냥 글을 읽을 줄 아는 여자들 수백 명이 몰려가서 따귀를 한 대씩 날려주면 그만이다.

진짜 논점은 무엇인가?

진짜 논점은 대량 모듈성 테제가 옳으냐 여부가 아니다. 이것이 옳다는 것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너무나도 명백하다. 진짜 논점은 진화 심리학자들이 가설로서 제시한 몇 가지 선천적 메커니즘들과 관련되어 있다. 예컨대 질투와 관련된 선천적 메커니즘들, 강간과 관련된 선천적 메커니즘들, 자식 사랑과 관련된 선천적 메커니즘들을 진화 심리학에 적대적인 사람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선천적 메커니즘의 존재와 관련하여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몇 가지 안 된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아직 진화 심리학이 유아기여서 인간 뇌에 있는 엄청나게 많은 메커니즘들 중 극히 일부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며, 부분적으로는 진화 심리학 비판자들이 질투 메커니즘과 같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것들에만 시비를 걸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과학적 기준은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것 같다.

 

진화 심리학을 지지하든 반대하든 체온 조절 메커니즘을 포함하여 위에서 나열한 온갖 심리적 메커니즘들이 선천적이라는 것에는 상당한 동의가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위에서 나열하지 않은 훨씬 더 많은 심리적 메커니즘들이 선천적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상당한 동의가 이루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투의 경우처럼 정치적으로 민감한 몇 가지 메커니즘의 선천성을 부정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대량 모듈성 테제 자체를 비판하고 나선다. 또한 진화 심리학자들은 그런 사람들의 명시적 도전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에 대해 장황하게 응답하고 있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진짜 논점을 찾아내서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런 가짜 논점부터 없애 버려야 한다.

 

대량 모듈성을 둘러싼 논쟁은 가짜 논점을 둘러싼 논쟁이다. 진화 심리학에 적대적인 사람들이 너무 바보 같아서 스스로 모순적인 주장을 하기 때문에 발생한 논쟁일 뿐이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선천적 메커니즘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질투처럼 정치적으로 민감하지 않은 경우에는 수 많은 메커니즘들이 선천적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일반론을 펼 때는 선천적 메커니즘들의 수가 많다는 것을 부정한다. 이것은 문맹률이 극히 낮은 나라에서 어떤 남자가 자신이 만나는 여자 한 명, 한 명에 대해서는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을 거의 항상 인정하면서도 그 나라의 여자들은 극히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고 글을 읽을 수 없다고 우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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