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가 보는 세상-최종회]눈이 보는 세상, 뇌가 보는 세상 2009년 05월 21일

서울대 뇌인지과학과 이상훈 교수
‘실재한다(exist)’는 것은 무엇인가. 오랫동안 철학자들이 ‘형이상학’이나 ‘인식론’이란 어려운 이름으로 답을 쫓던 물음이다. 과연 인간은 실재를 알아차릴 능력이 있는가. 선배 철학자들의 말에 기대지 않고 답해보자. 아마 실재란 우리 눈에 보이는 것 그 자체일 것이다. 그렇다면 실재를 알아차릴 능력, 당연히 있다.

눈꺼풀을 들어올리기만 하면 실재는 내 앞에 펼쳐지고 그 변화는 시시각각 내 마음에 접수된다. 현란한 전광판에서 추락하는 내 주식 가격. 생일을 놓친 나를 노려보는 화난 여자친구의 표정. 이런 것들이 ‘실재함’을 일상에서 누가 의심할까.

그러나 이 단단한 실재의 확신은 몇 가지 연구만으로도 무너질 수 있다. 우리는 대부분 뇌가 ‘만들어낸’ 실재를 보고 있다. 인지신경과학자들은 이를 ‘마음의 실재’라고 부른다. 진짜 ‘객관적 실재’와 마음의 실재는 다를 수 있다.

미국 메사추세츠공대(MIT) 뇌인지과학과 테드 에이들슨 교수가 만든 ‘그림 1’을 보자. 뇌가 만들어내는 마음의 실재는 이렇게 얘기한다. “A와 B로 표시된 격자들 중 하나는 검고 다른 하나는 하얗다”라고.
그러나 객관적 실재에 따르면 두 격자의 물리적 밝기는 동일하다. 의심스러우면 백지에 A와 B 격자 크기의 구멍을 내고 주변을 가린 채 보라. ‘마음의 실재’와 ‘객관적 실재’가 항상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바로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림이 보여주는 건 ‘맥락(콘텍스트) 효과’다. 그림을 보는 동안 우리 뇌는 어둡고 밝은 사각형이 번갈아 놓여 있는 바둑판 모양의 패턴을 인지한다. 이 패턴을 유지하려다 보니 뇌는 원기둥의 그림자 때문에 당연히 격자 B가 어두워질 거라는 사실을 놓치고 만다.

뇌가 마치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눈의 망막에 들어온 빛의 밝기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A와 B의 밝기가 다르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A와 B 격자의 밝기를 물리적으로 측정해보면 똑같기 때문이다. 망막에 들어온 두 격자의 밝기는 객관적 실재와 같더라도 뇌에서 이와 다른 마음의 실재로 바뀐 것이다.

인지신경과학자들에 따르면 뇌는 외부환경에서 오는 물리적 입력을 재료로 ‘실재’를 만드는 공장이다. 뇌가 만들어낸 실재를 객관적 실재로 믿게 하는 것 또한 뇌의 작용이다. 몹시 어려운 얘기다.
최근 인지신경과학자들은 마음의 실재가 뇌에서 만들어지는지는 과정까지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림 2’의 왼쪽 위에 있는 빨간색 수직 막대를 왼쪽 눈에, 오른쪽 위에 있는 파란색 수평 막대를 오른쪽 눈에 각각 동시에 보여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영국 런던대 존-딜란 헤인스 박사팀은 실제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 같은 실험을 하면서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 장비로 뇌를 촬영했다. 그 결과 눈의 망막에서 출발한 시신경이 도착하는 1차 시각피질 영역(V1)에서 ‘그림 2’와 같은 그래프를 얻었다.

플러스 부분(세로축 위)이 뇌가 인식하고 있는 이미지다. 처음엔 빨간색 수직 막대를 인식하다가 몇 초 뒤엔 파란색 수평 막대로 바뀌었다. 희한하게도 뇌에서는 이런 변화가 계속 반복됐다. 왼쪽과 오른쪽 눈은 각각 고정돼 있는 사진을 계속 보고 있는데 말이다.

이 실험에서 객관적 실재는 정지해 있으나 마음의 실재는 움직인다는 게 확인됐다. 이 마음의 움직임은 바로 뇌 활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뇌가 객관적 실재와 다른 마음의 실재를 만드는 건 아마도 진화의 산물일 것으로 과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오랜 세월을 거쳐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세상을 보기 위해 진화해온 인간의 독특한 능력일 거란 얘기다.

마음의 실재를 생산하는 뇌 작용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비단 인지신경과학자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려는 것만은 아니다. 눈을 떠도, 귀 기울여도, 손으로 만져도 실재와 만나지 못하는 난치병 환자나 장애인들에게 실재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망막이 손상된 환자의 시각 담당 뇌 부위를 건강한 사람의 시각 처리 메커니즘과 비슷하게 직접 자극하면 실재가 만들어질 것이다. 현실에 좀 더 가까운 마음의 실재를 구현할 수 있게 된다는 얘기다. 지금 기술은 뇌를 직접 자극해 명암을 어렴풋이 구분할 수 있는 단계까지 왔다.

물론 마음의 실재를 구성하는 뇌 활동의 까다로운 퍼즐을 푸는 것 자체도 흥미진진한 일이다. 재능 있고 패기 찬 과학자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이상훈 서울대 뇌인지과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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