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의 명언과 영어공부(21) | ||||
히파티야 | ||||
인생은 닫혀 있는 게 아니다. 우선 가까이에 있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일들을 이해하기 위한 최선의 준비다. -히파티야(355~415) : 그리스 수학자, 철학자- 잘 아시는 사람인지요? 저도 잘 알지는 못합니다. 이집트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며 수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단히 총명하고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합니다. 그리스 시대 유명한 수학자로서 역사적인 기록으로 지금까지 그 행적이 분명하게 남아 있는 인물은 히파티야(Hypatia)가 유일한 것 같습니다. 최초의 여성 수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스가 로마에 의해 지배되고 다시 기독교가 지배한 중세까지 이렇다 할 여성 과학자들은 없습니다. 아마 알려져 있지 않아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히파티야처럼 수학적 천재성이 기록으로 남은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히파티야는 그리스도교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희생된 대표적인 여성 과학자입니다. 그리스 시대에는 여성과 남성의 차별이 그렇게 크게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여러 여신들이 등장합니다. 남자 신들과 비교해 뒤질 것 없이 아주 위풍당당하게 나옵니다. 아마 사회도 그런 분위기였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우리나라도 신라시대에 세 명의 여성이 왕으로 나왔습니다. 선덕, 진덕, 지성여왕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없고 조선시대에는 여성의 위치가 더욱 줄어들었죠. 거의 비슷한 과정을 유럽도 겪었습니다. 서양은 기독교가, 우리나라는 유교가 그러한 역할을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클레오파트라라는 대단한 여성이 역사의 무대에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 것을 보면 이집트의 당시 분위기도 남녀의 차별이 별로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여성 파라오(Pharaoh)도 여러 명 있었다고 합니다. 누구냐고요? 하트셉수트(Hatsheptusut)라고 들어 보셨는지요? 세계 최초의 여왕입니다. 신권(神權)을 비롯해 왕권, 군사권까지 전 이집트를 한 손에 쥐어 철권을 휘두른 여성입니다. 18대 왕입니다. 어떻게 파라오가 됐는가는 여기서 다룰 일이 아닙니다. 어쨌든 당시 여성의 권위가 지금보다 훨씬 나았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서양은 기독교가 지배하면서 여성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것이죠. 르네상스도 남성의 자유로운 사상과 예술은 인정했지만 여성에게는 결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아마 1982년의 일로 생각됩니다. 당시 이화여대 총장으로 있던 김옥길 박사가 미국의 모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소감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유교의 질곡으로부터 한국 여성을 해방시켜 준 미국에 감사한다.” 좀 경솔한 이야기가 아닌가 하면서도 학교의 설립 전통도 그렇고 친미에 가장 앞장섰던 김 총장이 그럴 수도 있다고 넘어 가죠.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김 총장의 미국이 한국여성을 해방시켰다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들이 ‘유교의 질곡’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질곡이 뭐냐 하는 것이죠? 이 참에 좀 알고 넘어 가죠. 히파티야는 질곡보다 더 심한 형벌로 목숨을 잃고 죽은 몸은 갈기갈기 찢기고 육체는 여기 저기 흩어지는 형벌을 받습니다. 잘린 손은 개들이 물고 다녔다고 합니다. 질곡은 한자로 桎梏이라고 합니다. 뜻을 보면 ‘1. 차꼬(桎)와 수갑. 2. 몹시 자유롭지 못함의 비유’를 의미하는 말로 나옵니다. 차꼬가 무엇인지를 찾아 봤습니다. '옛 형구의 한 가지로 기다란 2개의 토막나무에 가로구멍을 파서 죄인의 두 발목을 그 구멍에 넣고 자물쇠로 채우게 했음.' 그래서 질곡이란 손에 수갑을 채우고 다시 발에 열쇠를 채워서 꼼짝 못하게 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상상이 갑니까? 히파티야는 여성 수학자로는 주목할 만한 첫 인물입니다. 역시 수학자이며 철학자인 테온(Theon)의 딸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신플라톤주의 학파의 지도자로 인정 받았으며 뛰어난 지적 재능과 달변, 품위, 미모 등을 두루 갖추어 따르는 제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유타 대학(University of Utah)의 마이클 디킨(Michael Dickin) 교수는 나중에 그녀를 “그 시대의 가장 훌륭한 수학자며 최초의 유명한 여성 수학자(the pre-eminent mathematician of her time and the first noted woman mathematician)”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히파티야는 학습과 과학을 기호화 했는데, 당시 초기 그리스도교도는 이것을 이교도의 신앙과 같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와 같은 경우는 비단 히파티야만이 아닙니다. 원주률 파이(π)가 이교도의 기호라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그녀는 알렉산드리아를 여러 차례 휩쓴 그리스도교인과 비그리스도교도 사이에 벌어진 긴장과 폭동의 초점이 되었습니다. 412년 키릴(Cyrill)이 알렉산드리아의 수장이 된 뒤 히파티아는 니트리아 수도사들과 키릴을 따르는 광신적인 그리스도 교도들에게 처참하게 살해됩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세계 최대의 학문의 요람입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얼마나 방대한 책이 소장돼 있었는지는 이미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그녀가 살해된 것은 아마도 그리스도교에서 볼 때 이교도인 알렉산드리아 도시의 장관인 오레스테스와 가깝게 지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지만 살해의 정확한 동기가 무엇이었든 간에 그 사건 직후 많은 학자들이 이 도시를 떠나게 되어 알렉산드리아는 고대 학문의 주요 중심지라는 지위를 잃어 버립니다. 히파티아는 잘 알려진 최초의 수학자입니다. 그녀의 전설적인 재능과 미모, 전력을 다해서 연구에 몰두한 삶, 또한 수학, 물리학과 천문학을 비롯해 모든 과학과 철학에서 올린 빛나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은 고대 그리스 비극과도 같은 슬픔을 자아내게 합니다.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작가인 드니 게디(Denis Guedj)의 소설 ‘앵무새의 정리’에 히파티야는 이렇게 등장합니다. “415년의 어느 날,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교 광신자들이 길을 지나던 그녀의 마차로 달려들어 그녀를 바닥에 쓰러뜨리고 발가벗긴 채 교회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칼날처럼 예리하게 깎은 굴 껍데기로 그녀의 시신을 하나하나 토막 낸 뒤 시체를 불살랐다. 타지 않은 시체들은 방치해 짐승의 먹이가 됐다.” 그 밖에도 1853년에 찰스 킹슬리(Charles Kingsley)가 쓴 소설 ‘히파티아(원제:Hypatia or the New Foes with an Old Face)’에서도 그녀를 만날 수 있습니다. 19세기 영국과 유럽의 가장 아름답고 낭만적인 여성으로 등장합니다. 소설뿐만이 아닙니다. 그 유명한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의 ‘로마제국흥망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에서도 그녀에 대해 특별히 다루고 있습니다. “Hypatia, or the History of a Most Beautiful, Most Virtuous, Most Learned and in Everyway Accomplished lady ; Who was torn to pieces by the Clergy of Alexandria, to Gratify the Pride, Emulation and Cruelty of the Archbishop Titled St. Cyrill(가장 아름답고, 가장 품위 있으며, 학식이 풍부하고 모든 방면에서 완벽한 히파티야, 그리고 그녀의 역사는 키릴이라는 주교의 오만, 경쟁심, 잔인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신부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졌다).”
알렉산드리아는 세계적인 학문의 중심지였고 서로의 학문을 나누기 위해서 모든 문명국으로부터 학자들이 모여드는 세계의 중심부였습니다. 히파티야는 이런 자극적이고 도전적인 환경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녀는 예술, 문학, 자연과학, 철학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균형 잡힌 교육을 받았습니다. 특히 아버지의 교육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테온은 그녀에게 종교에 대한 분별력을 가질 수 있도록 각별히 배려하였으며 새로운 진리를 배척하는 어떠한 완고한 신앙도 그녀의 삶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모든 형식적이고 독단적인 종교는 현혹시키는 것이어서 자존심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라며 "네가 생각하는 권리를 비축하여라. 왜냐하면 틀리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라는 말도 했습니다. 그녀는 대단히 인기 있는 선생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가장 훌륭한 학자들이 그녀의 강의실은 물론이거니와 집도 종종 방문하였다고 합니다. 유럽은 물론 아시아, 아프리카로부터 온 열정적인 학생들이 히파티야의 강의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그녀가 얼마나 유명했으며 또 강의가 얼마나 훌륭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히파티야는 철학자인 이시도라스라는 남자와 결혼했다는 설도 있지만 학문과 벗 삼아 평생 홀로 지냈다고 합니다. 그녀가 욕망, 물질, 세속적 이익 따위를 극도로 낮추어 보는 신플라톤주의에 충실했다면 독신으로 지냈다고 보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녀는 학식뿐만 아니라 출중한 미모로도 유명했습니다. 히파티야의 강의를 듣던 한 학생이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 사랑에 빠져버렸고 결국 자신의 심정을 공공연하게 드러냅니다. 그러자 히파티야는 월경으로 더럽혀진 옷가지를 모아 그에게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대가 그토록 사랑하는 것의 참 모습이 이것이오. 결코 아름다운 것이라고 할 수 없소(Actually she gathered rags that had been stained during the period and showed them to him as a sign of her unclean descent and said, “This is what you love, young man, and it isn’t beautiful!”).” 그리고 그녀는 “I was wedded to the truth(나는 진리와 결혼했소).’라고 대답했답니다. 후에 역사가들은 그리스도교에 의한 히파티야의 죽음이 중세 암흑기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고 지적합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의 히파티야의 죽음과 함께 세계 최대의 대학 알렉산드리아도 잿더미 속에 파묻힙니다. 세계 모든 문명의 보고(寶庫)인 알렉산드리아의 50만 권의 장서도 사라졌습니다. 그 후 1500년이 지나 나폴레옹이 등장할 때까지 알렉산드리아는 누구의 기억에도 없는 조그마한 어촌에 불과했습니다. “This was a forerunner of the end of ‘The Golden Age’. Many have argued that the death of Hypatia, only 25 years later introduced the real ‘Dark Ages’ as the last light of reason was extinguished with her death(이것은 황금시대 종말을 알리는 서곡이다. 히파티아 사후 25년이 지나 암흑기는 도래했고 그래서 이성이라는 마지막 불빛마저도 그녀의 죽음과 함께 꺼져버렸다).” 히파티아는 대단한 수학자이기 앞서 남녀를 막론하고 학문이 무엇인지를,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 여성입니다. 그리고 종교라는 무지(ignorance)가 무엇인지, 또 종교가 무지와 결합될 때 인간의 잔인성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슬픈 일이지만 우리에게 주는 교훈 또한 적지 않습니다. 한편, 아인슈타인은 이런 이야기도 했습니다. “Great spirits have always found violent opposition from mediocre minds(위대한 영혼은 항상 무지에서 오는 폭력적인 반대파를 만나게 된다).” 모든 종교는 사랑을 강조합니다. 부모와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은 사랑하고 타 종교에 대해서는 증오심을 내는 것은 훌륭한 믿음이 아닙니다. 자기 종교라는 울타리를 넘어설 줄 알아야 합니다. 중동의 전쟁도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여성과학자 히파티야도 자기 울타리를 넘지 못하는 그리스도 종교인들에게 무자비하게 살해됐습니다. 아프리카와 방글라데시 등에 수백만 명이 먹지 못해 죽어 가고 있습니다. 그들을 외면하는 것은 종교적인 이유도 많습니다. 그들은 종교가 아니라 먹을 것이 필요한데 말입니다. | ||||
/김형근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