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기억 지우려다가, 나를 지운다면... [교수신문 공동] 기술 개발 현황 및 기억조작의 문제점들 2009년 04월 13일(월)

<사이언스타임즈>는 지난해에 이어 사회와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이슈 키워드를 정해 다양한 전문가적 관점의 학자적 식견이 상호 소통하는 장인 ‘학문간 대화로 읽는 키워드’ 제2탄을 마련했다. 이 기획은 학술 전문 주간지 <교수신문>(www.kyosu.net)과의 공동기획으로, 21세기 현재 지식의 전선을 바꿔나가는 이슈 키워드에 다양한 학문간 대화로 접근함으로써 인문사회과학, 자연과학, 공학, 미학적 이해와 소통의 지평을 넓히는 데 목적이 있다. 2009년에는 문명의 전환과 인간의 진화에 초점을 맞춘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정보화 사회의 심화, 지구촌을 아우르는 사회, 정치, 경제 질서의 결속 강화는 새로운 문명과 인간이 출현을 가져온다는 인식에서다. ‘기후변화’부터 ‘죽음’까지 13가지 이슈에 대해 과학자와 인문학자가 소통하며 논전을 벌였던 2008년 기획시리즈는 현재 『지식의 이중주』(2008, 해나무)로 출판돼 관심을 끌고 있다. [편집자 註]

학문간 대화로 읽는 키워드 슬프거나 괴로운 기억만을 선택적으로 지운다는 기술은 사실 공상 영화 내지는 소설에서나 다루는 주제인 것으로 보이지만, 이런 것이 이제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 슬프거나 괴로운 기억만을 선택적으로 지우는 기술이 점차 현실화되고 있다 
이런 연구의 과학적 토대를 마련한 인물은 미국 신경과학자로 2000년도에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한 Eric Kandel입니다. Kandel의 연구팀은 인간의 기억 작용의 기전을 밝히기 위해 바다 민달팽이류에 속하는 아플리시아를 연구했습니다.

아플리시아의 꼬리에 반복해서 전기충격을 가하는 동안 신경계에 과민반응을 일으키는 단백질을 확인했습니다. 이러한 키나아제 A라는 단백질은 다른 단백질의 성질을 변화시키면서 신경세포들의 시냅스를 강화시킨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강화를 풀어주는 신약과 같은 조작 기술을 적용하면 자극에 대한 과민반응이 사라질 것이라는 가정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1998년 말 그는 쥐에게 로리프램(rolipram)이라는 물질을 투여한 결과, 쥐의 신경세포에서 기억작용을 촉진시킬 수 있다는 결과를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의 기억능력을 촉진시키는 신약 개발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인물로는 뉴욕대학교의 정서연구자인 Joseph Ledoux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인간의 기억이 응고화(consolidation), 인출, 재응고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변형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최초의 정보가 인출돼 재응고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단백질 합성을 차단하게 되면 공포 기억을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1990년대 초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한 이후 최근까지 선별적으로 기억을 삭제시키는 기술과 관련된 논문들이 계속해서 세계적인 과학 학술지에 발표되고 있습니다.

공포 기억을 차단하는 기술

예를 들어, 2008년도 Neuron지에 발표된 논문을 보면, 미국 조지아대 Joe Tsien 박사팀이 αCaMKII라는 단백질 효소를 통해 기억분자의 활동을 화학적-유도적으로 조작해 목표 기억(targeted memory)을 선택적으로 차단시킬 수 있는 방법을 소개했습니다.

또한 2008년 Science지에는 특정 시냅스가 학습 시에 새롭게 합성된 AMPA라는 단백질 수용체를 불러 모아 기억을 생성한다는 논문이 발표됐고, 같은 해에 국내에서는 서울대 강봉균 교수팀이 기억의 유지와 소멸의 기전인 기억의 재구성 과정을 밝히는 연구 결과를 Science지에 발표했습니다.

▲ 기억을 삭제하거나 약물을 사용하는 것은 개인의 정체성을 위협할 수 있다 
이러한 결과들은 치매, 기억상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등의 질환을 규명하고 치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최근까지의 연구 동향을 살펴보면, 프로프라놀롤은 기억과 외상 사건과 연합된 정서의 연결고리, 즉 편도체(amygdala)의 장기 강화(LPT)를 차단시켜, 인지적 부분은 유지되면서 기억의 정서적 부분이 삭제됨으로써 과거나 현재의 외상적 사건에 대한 기억의 재활성화를 막는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현재 진행 중인 신기술로는 편도체에 영향을 끼쳐 쥐의 공포 조건형성(기억)을 와해시키는 U0126이라는 약물의 개발, 장기기억을 유지시키는 데 필요한 효소를 차단시켜 고통스런 기억을 삭제시킬 수 있는 ZIP이라는 약물의 개발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나쁜 기억을 지우는 것은 인간의 소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윤리적 관점에서 그러한 기억 조작을 위한 신기술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크게 네 가지 윤리적 문제를 언급할 수 있습니다.

첫째, 진실성의 문제입니다. 행복은 웰빙의 관점에서 추구돼야 합니다. 즉 고통스런 기억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과 이런 고통스런 기억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도 웰빙의 부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고통 후 얻게 되는 인간의 성장 능력을 침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기억 보존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개인의 기억에 의존하는 역사적 사실들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이 되는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우리는 이런 기억을 보존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억을 삭제시킨다는 것은 그것을 공유하고 있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줄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기억조작이 가져올 문제점들

셋째, 자율성의 문제로 약물의 사용은 약물에 대한 의존심을 발달시킬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의 자율성을 저해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누가 그러한 처치를 결정할 것인지의 동의 문제가 있습니다.

▲ 민윤기 충남대ㆍ심리학 
마지막으로 기억을 삭제하거나 약물을 사용한다는 것은 개인의 정체성을 위협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한 시점과 다른 시점 사이의 심리적 혹은 기억 연속성이 상실된다면 두 시점 사이에 존재해야 할 개인의 정체성은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기억 삭제는 궁극적인 인간의 소망일 수 있습니다. 몇 가지 개발된 약물들은 그런 가능성을 열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기억 조작이나 기억 삭제는 윤리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기술들이 장래에 PTSD와 같은 환자들을 구할지는 모르지만, 개인의 정체성을 위협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신기술들이 인간의 향상에 적절히 응용될 수 있는지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필자는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지심리학』등의 저서와 「초등학생의 외모만족도와 사회적 행동 특성의 관계」등의 논문이 있다.

민윤기 충남대 교수ㆍ심리학

저작권자 2009.04.13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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