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 종말- 기술적 가능성과 사회적 가능성 [교수신문 공동] 여성주의자가 바라보는 성의 종말 2009년 05월 11일(월)

<사이언스타임즈>는 지난해에 이어 사회와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이슈 키워드를 정해 다양한 전문가적 관점의 학자적 식견이 상호 소통하는 장인 ‘학문간 대화로 읽는 키워드’ 제2탄을 마련했다. 이 기획은 학술 전문 주간지 <교수신문>(www.kyosu.net)과의 공동기획으로, 21세기 현재 지식의 전선을 바꿔나가는 이슈 키워드에 다양한 학문간 대화로 접근함으로써 인문사회과학, 자연과학, 공학, 미학적 이해와 소통의 지평을 넓히는 데 목적이 있다. 2009년에는 문명의 전환과 인간의 진화에 초점을 맞춘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정보화 사회의 심화, 지구촌을 아우르는 사회, 정치, 경제 질서의 결속 강화는 새로운 문명과 인간이 출현을 가져온다는 인식에서다. ‘기후변화’부터 ‘죽음’까지 13가지 이슈에 대해 과학자와 인문학자가 소통하며 논전을 벌였던 2008년 기획시리즈는 현재 『지식의 이중주』(2008, 해나무)로 출판돼 관심을 끌고 있다. [편집자 註]

학문간 대화로 읽는 키워드 필자는 이 지면에서 ‘섹스리스의 증가’나 ‘결혼/출산율 저하’ 같은 사회적 현상을 ‘성의 종말’로 볼 수 있는지 논해달라는 청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섹스리스’라는 현상만 살펴보려 해도, 섹스를 전혀 안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늘어나고 있는지도 확인할 방법(?)이 없을 뿐더러, 그 이전에 ‘섹스’를 어떻게 정의할지부터 문제입니다.
 
출산을 위한 이성 간 삽입성교만을 있을 수 있는 성행위로 인정하면서 피임기술에 반대해온 가톨릭 교황이시라면 혹 출산율이 낮아지는 것을 두고 곧장 ‘성의 종말’이라고 부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낳는 것과 별개로 사람들은 피임약이나 피임기구를 활용하면서 활발하고 다양한 성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또, 이성 간의 삽입성교만이 유일하게 성행위 내지 ‘섹스’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거나 다른 많은 즐거움을 미리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을까요.

게다가 ‘성’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폭넓게 쓰여서, 생물학적으로 무성생식과 구분해 ‘유성생식’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사회적으로 남/녀에게 다르게 부과하는 성역할을 의미하기도 하고, 아이를 만드는 생식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여러 가지 에로틱한 행위나 취향, 단지 남/녀 두 항만이 아닌 가지각색의 성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방식 등등까지 뭉뚱그려 부르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성’이라는 말이 지칭하는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종말에 이르는 사태란, 가능성은커녕 상상조차 어렵습니다.

인간이 무성생식을 하는 날

이런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 작가의 상상력을 빌려보겠습니다. 프랑스 작가 미셸 우엘벡의 『소립자』는, 프랑스에서 68혁명세대가 쟁취한 성의 자유라는 것이 결국은 ‘즐기지 말라’는 명령보다 더 잔혹한 ‘즐기라’는 명령을 모두가 강박처럼 따르는 것이 돼버린 상황을 그리는 소설입니다.

▲ '소립자'라는 소설에서는 시험관 복제를 통해 인구를 재생산하는 사회를 그렸다 
성해방을 외쳤던 68 이후 이성 간 선교사 체위뿐 아니라 동성애, 집단난교, SM 등 온갖 성행위 방식을 인정하고 즐길 수 있는 사회적 공간 및 집단이 생겼는데, 그와 함께 사람들은 더 잘 즐기는 사람, 더 성적으로 매력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끝없이 다이어트를 하고 각종 약물 및 수술을 고려하며 자기 외모와 재정상태에 만성불만인 채로 조울증을 오가며 시달립니다.

이런 ‘즐거운’ 지옥 속에서 구원받기 위해 결국 소설의 주인공 중 한 명은 성과 생식의 공산주의를 기획하기에 이릅니다. 이 새로운 공산주의란 바로 유성생식을 완전히 포기하고, 유전자와 외모가 완전히 똑같아서 서로 차별할 가능성이 적고, 특정한 방식의 성행위만 특권화하지 못하도록 성감대가 몸 전체에 골고루 분포되도록 조작된 복제인간들만으로 이루어진, 시험관 복제를 통해 인구를 재생산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성생활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 해도, 어쨌든 기존의 ‘성적인 것’은 완전히 종말을 맞는 혁명이랄까요. 단성생식이나 무성생식이 기술적으로는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니, 우엘벡의 주인공의 기획도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허황된 것만도 아닌 셈입니다.
 
이를테면, 2004년 <네이처>지에는, 쥐의 난자 두 개를 가지고 정자 없이 수정란을 만들어냈다는 실험결과가 발표됐습니다. 그 즈음에 인간배아줄기세포 연구도 복제인간의 가능성으로 이어진다며 이목을 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단성생식이나 복제를 과연 원하기는 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인류학자 게일 러빈(1984)은 지역이나 문화에 따라 방식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개인의 성적행동에 따라 위계를 나누고 차별하는 사회적 기제를 말한 바 있습니다.

높은 위계에 속하는 성적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평가와, 사회적 존중을 부여하면서 제도적 지원과 물질적 이득을 줍니다. 반면, 낮은 위치로 간주되는 성적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정신병이거나, 존중 받을 만하지 못하거나, 범죄자거나, 자유로이 이동, 이주할 수 없도록 만들거나, 제도적으로 지원 받을 기회를 박탈하고 경제적 궁핍으로 내몰립니다.

이를테면, 현재 한국에서 그 위계의 가장 위쪽에 있는 이들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이성애 부부일 것입니다. 저출산이 ‘위기’로 부각되면서 저 범주에 속해야 납세나 집장만에 더 혜택을 받기도 합니다.

생식세포와 배아를 몸 바깥으로 꺼내 조작할 수 있는 현재의 기술만으로도 한 아이에 대해 난자상, 자궁상, 양육상 등등 어머니가 여럿이 된다든가, 아버지 없는 가족이라든지, 동성커플 간에 아이를 낳는다든가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결혼한 이성부부의 불임 ‘치료’를 위한 기술로만 주로 쓰이고 있는 상황은 앞에서 말한 사회의 성적 위계를 반영하는 것이겠지요.

결혼한 남녀와 그 생물학적 자녀들로 이루어진 가족을 유지하는 것도 무척 힘들지만(현재 한국의 양육/교육비는 출산 자체를 포기하고 싶어질 정도로 무시무시하지요), 또 그게 아닌 다른 가족형태를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모습으로 상상하고 추구하기도 참 힘든 사회입니다.

즐거운 종말을 상상하며

▲ 박연규 독립연구자 
‘성의 종말’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생각은 과거에 혹은 현재, ‘성’이라고 이름 붙여 불러낼 수 있는 어떤 단일한 실체가 있었거나 있는 것 같은 환상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런 점에 주의한다면, ‘성적인 것’으로 묶을 수 있는 모든 것의 종말까지는 아니라도, 현재 존재하는 성적 위계(앞에서 말했듯, 남/녀 간의 차이뿐 아니라 갖가지 성적 취향, 행위, 정체성 등등에 따른 위계)와 차별의 종말이라면, 상상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100년 쯤 후, 현재 대부분의 사람이 굳이 남녀 커플을 이루어 아이를 낳아 기르려고 아등바등하는 것을 우스꽝스러운 옛 풍습 정도로 여기는 시대가 올지, 또 누가 알겠습니까.

필자는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를 졸업했으며, 『프랑켄슈타인의 일상-생명공학시대의 건강과 의료』등의 저서가 있다. <여/성이론>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박연규 독립연구자

저작권자 2009.05.11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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