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주구점의 북경원인유적 (4) 유네스코 세계유산 (5) 2009년 03월 25일(수)

세계 여러 나라에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들이 넓게 퍼져 있다. <사이언스타임즈>는 ‘과학으로 만나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 시리즈’를 통해 미처 가보지 못한 인류의 보물들을 찾아 가는 세계유산 여행을 제안한다. 세계 곳곳에 있는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유산들과 자연이 스스로 만들어낸 자연유산들이 어떠한 비밀을 갖고 있는지, 왜 인류의 이름으로 보호해야 하는지를 속 시원히 밝혀 줄 것이다. [편집자 註]

과학으로 보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주구점에서 북경인이 발견된 이후 1933~1934년 인근에 대한 대규모 조사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북경인 유적 상부에 있는 산정동에서 북경인보다 늦은 인류의 화석(산정동인)이 발견되었다. 배문중이 발굴을 주도했는데 이곳에서 풍부한 인류 화석, 문화 유물 및 동물 화석이 출토되었다.

최근 탄소연대측정에 의하면 문화층 연대는 B.P. 27,000년, 지하의 퇴적시기는 30,000~40,000년 정도로 기존에 알려졌던 10,000~18,000년보다 훨씬 상회한다.

산정동은 동구(洞口), 상실(上室), 하실(下室)과 하음(下筮)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상실이 산정동인이 거주한 곳이다. 이곳에서 어린아이의 머리뼈 조각, 골각기, 장식품 등이 발견되었다.

▲ 산정동인 동굴 전면 

하실은 동혈의 서반부 낮은 곳에 깊이는 약 8미터인데 이곳에서 3개체의 완전한 머리뼈와 몸체가 발견되었으며 노인 중년부인 젊은 여성의 것이다. 뇌의 용량은 1,300~1,500cc에 달하며 남성의 신장은 약 174센티미터, 여성은 약 159센티미터로 이들 특징은 모두 현대인과 다름이 없다.

산정동인 발견

그런데 산정동에서 발견된 노인의 얼굴 측량지수는 현대의 몽골인종과 가깝고 서유럽인들과는 거리가 매우 멀다. 코뼈가 비교적 좁고 광대뼈가 돌출하였으며 비교적 곧고 아래턱 원형 융기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몽골인종의 특징에 속한다.

반면에 중년부인은 에스키모, 젊은 여성은 멜라네시아인과 비슷한 점이 발견되는 등 원시 몽골인을 대표하며 체질적으로 북경원인보다 분명히 진보된 것으로 현 인류와 거의 비슷한 모습이다. 산정동인이야말로 동양인의 선조라는 설명이다.

그런데 3개의 두개골 중 2개는 타박상을 입은 흔적이 있고 나머지 한 개도 목부분에 상처가 있었다. 이는 당시에도 격렬한 싸움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1933년 7월에 발견된 동물의 뼈로 만든 골침(骨針)도 인류 역사상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골침은 약 8.2센티미터로 굵고 휘어진 성냥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한쪽은 날카롭고 다른 한쪽은 이미 마모된 상태였고 침의 구멍이 뚫린 흔적이 선명했다. 침이 있었다는 것은 옷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어도 동물의 가죽으로 몸가리개를 만들 수 있었음을 증명한다.

▲ 산정동인 복원 모형, 산정동인은 현대인과 다름없으므로 중국은 이들이 동양인의 선조라고 주장한다. 
산정동에서 수많은 장식품이 발견되었는데 구멍이 뚫린 동물의 이빨, 바다조개 껍데기, 잉어의 상안골(上眼骨) 등이다. 그 중에서 구멍이 뚫린 동물의 이빨이 가장 많아 125점이나 된다.

그 중 5점은 출토 당시 반원형으로 배열되어 있어 아마도 하나의 목걸이 장식으로 추정한다. 잉어의 상안골로 제작한 양면 천공 장식은 매끈한 원형으로 상당히 높은 기술 수준을 보이는데 물고기의 상안골로 장식품을 만든 것은 세계적으로 희귀한 예이다.

장식품이 대량으로 발견된다는 것은 생산 영역이 확대되어 감에 따라 산정동인들이 자신의 생활을 가꾸는 등 지적인 면모를 보인 증거이다. 특히 산정동인은 죽은 사람들을 동굴 하실에 고정된 형식으로 매장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아울러 인체 주위에 물고기 알 모양의 적철광 가루를 뿌렸다.

이를 두고 사람이 죽으면 피가 마르므로 동일한 색깔의 물질을 더해 주어 사자가 또 다른 세계에서 부활하기를 기원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산정동인이 이미 원시적 신앙을 갖고 있었음을 시사하며 시기적으로 이미 구석기 말기에 해당하는 문명을 지녔다고 인식한다. 산정동인은 원래 배문종이 프랑스로 출발하기 전에 발견한 것으로 중국 고고학사에서 획기적인 성과로 평가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1973년에는 북경원인과 산정동인의 중간 단계에 해당하는 10만 년 전의 것으로 보이는 신동인(新洞人)도 발굴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2001년 주구점에서 5킬로미터 떨어진 전원(田園) 임업시험장 내 동굴에서 2만5천 년 전에 살았던 구석기 후기 인류 화석도 발견됐다.

이들은 중국에서 구석기 시대 초기· 중기· 말기의 인류가 모두 발견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중기 구석기 시대는 프랑스인 샤르댕 교수가 하투에서 발견한 ‘하투인’이다. 특히 산정동인을 중국인들이 주목하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중국인의 선조가 아프리카에서 고작 20만 년 전에 이주해 온 것이 아니라는 ‘다지역기원설’을 지지하는 증거로도 간주하기 때문이다.

전쟁을 피하지 못한 북경인

주구점의 발굴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지만 전쟁의 여파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일본군이 북경의 코앞까지 진격해오자 1937년 7월 주구점의 발굴 작업은 전면 중지된다. 그러나 북경인 화석은 곧바로 세계를 놀라게 하는 제2막으로 진행된다. 그것은 북경인의 진짜 화석이 중국과 일본 간의 전쟁 와중에서 실종되어 아직도 어디 있는지 확인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 진황도 미군 막사, 미국과 중국은 진황도에 주둔한 이곳 미군 부대에서 북경원인 화석을 미국으로 보내려 했으나 이때부터 북경원인은 행방불명이 된다. 
1935년 프랑스로 유학 간 배문중은 브뢰이 교수 집에서 기거하면서 1937년 여름 「역사 이전 인류가 사용한 경암석의 파쇄와 형성에서 이루어지는 자연 현상의 작용」으로 파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중국으로 귀국했다. 그가 중국으로 돌아올 때는 상해에서 전투가 한창일 때이지만 배문중은 프랑스에 머물라는 브뢰이 교수의 권유를 다음과 같은 말로 뿌리쳤다.

“내 조국이 가난하기 때문에 나는 돌아가야 합니다. 중국에는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국가의 흥망은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 나 역시 프랑스에 숨어 수수방관할 수는 없지요.”

배문중이 북경으로 돌아왔을 때 <북경협화의학원>에 설립되어 있던 ‘신생대연구실’은 북경이 일본에 점령되었음에도 <중국지질조사소>를 따라 옮기지 않고 미국의 보호 아래 계속 북경에 머물 수 있었다.

그것은 북경을 점령한 일본인이 학문적 연구를 위한 신생대연구실을 건드리면 외교적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배문중이 전쟁의 와중에서도 신생대연구실의 책임자로 3년이나 계속 근무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전황이 점점 나빠지자 신생대연구실의 명예주임인 유대인인 바이덴라이히는 북경인 화석의 안전에 대해 배문중과 상의했다. 북경인을 미국 뉴욕의 <자연사박물관>에 잠시 보관토록 옮기자는 것이다. 그는 당시의 정세가 점차 복잡해짐에 따라 북경인 화석을 중국에 놔둔다면 설사 아무리 안전한 금고에 잘 보관한다고 해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북경원인 화석 보존에 합의

사실 북경원인의 안전에 대해서는 바이덴라이히보다 먼저 중국 측에서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었다. <중국지질조사소> 옹문화 소장과 <북경협화의학원> 원장 호턴은 다음 세 가지 방안 중에 하나를 채택하여 북경원인 화석을 보존해야 한다고 합의했다.

① 북경에서 비밀스러운 장소를 찾아서 북경원인 화석을 숨겨놓고 배를 이용하여 외부로 운반하여 보관한다.

② 북경원인 화석을 국민당 정부가 소재하고 있는 중경으로 옮긴다.

③ 북경원인 화석을 모두 미국으로 보내 <미국자연사박물관>에 위탁 보존하고 전쟁이 끝나면 다시 중국으로 송환토록 한다.

두 사람은 세 번째 방안이 가장 안정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중국에서 전쟁이 격화된다고 하더라도 북경원인 화석을 자동차로 항구인 진황도까지 운반하기만 하면 미국의 화물선이 별 문제 없이 미국까지 옮겨주기 때문이다.

▲ 주구점유적박물관 입구 

그런 와중에 <중국지질연구소> 소장인 옹문호가 중경에 있는 국민당 정부의 경제부 장관으로 임명되자 그는 북경원인 화석에 더 이상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가 북경원인 화석을 미국으로 보내는 것에 다소 소극적이었던 것은 북경원인 화석이야말로 중국인의 국보 중에 국보이기 때문이다. 소위 중국 국보를 몰래 미국으로 보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므로 함부로 결정하지를 못했다.

그러나 일본이 남태평양을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날이 갈수로 악화되자 북경인의 안전 문제는 하루를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것은 북경원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이 예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에 일본인들의 북경인 화석에 대한 관심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일본인들은 북경인이 일본인의 선조도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추후에 알려졌지만 일본인들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던 그날 즉시 북경인의 행방을 놓고 긴급 추적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일본 천황도 친히 명령을 내려 북경인의 행방을 추적하라고 지시했을 정도이다.

여하튼 1941년 3월 배문중은 당시 중경에 있는 옹문호 경제부 장관에게 북경인 화석을 바이덴라이히를 통해 미국으로 보내든가 국민당이 있는 중경으로 보내든가 둘 중에 하나를 결정해 달라고 급전을 쳤다.

이때 학자들에게는 매우 다행한 사건이 생긴다. 바이덴라이히가 더 이상 중국에 머물 수 없게 되자 그는 중국인 조수 호승지(胡承志)에게 북경인의 모형을 만든 후 자신에게 보내달라고 한 것이다.

진품이나 다를 바 없는 모형 제작

1941년 4월 21일 바이덴라이히는 중국을 출발했고 호승지는 바이덴라이히의 지시에 따라 북경인 두개골 모형을 만들었다. 첫 번째 모형은 8월에 완성하여 미국에 있는 바이덴라이히 교수에게 전달되었다. 호승지는 두 번째 두개골 모형도 만들어 보냈다.

그가 만든 모형은 형태나 색깔이 거의 진품이나 다를 바 없었다. 세 번째 모형은 북경에서 미국으로 가는 우편길이 막히는 바람에 샤르댕 교수가 찾아서 보관했다가 전쟁이 끝난 1946년 중국을 떠날 때 ‘신생대연구실’로 돌려보냈다.

호승지의 모형은 북경인 화석 실물이 사라졌지만 세계 과학자들이 북경인을 연구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로 활용되었다. 세계 인류사에서 실물이 아닌 북경인의 모형처럼 많이 연구되고 우대 받은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미국과 일본의 정치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자 미국의 영향 하에 있는 북경의 신생대연구실은 본격적으로 북경인의 안전 조치를 강구하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1946년 11월 옹문호로부터 북경인 화석 표본을 미국으로 옮겨도 좋다는 지시가 내려왔다. 조건은 미국으로 옮기되 전쟁이 끝나면 다시 중국으로 되돌려 보낸다는 조건을 정확하게 미국 측에게 명시토록 하라는 것이다.

▲ 주구점유적박물관 내부, 주구점에서 발견된 북경원인의 두개골 및 석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옹문호의 지시가 너무 늦게 도착했다는 점이다. 1941년 11월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기 약 1개월 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문중은 곧바로 미국 측과 협상에 임했는데 여기에 또 다른 암초가 기다리고 있었다.

북경에 있는 미국 공사관 책임자가 중경 주재 미국대사관으로부터 지시를 받기 전에는 북경인 화석을 미국으로 보낼 수 없다고 완강히 버텼기 때문이다. 결국 11월 말에 중경의 미국 대사 존슨으로부터 북경인 화석을 미국으로 운송해도 좋다는 회신이 도달했다. 미국 측은 진황도에 정박해 있는 미국의 선박을 통해 미국으로 보낼 계획을 작성했으며 북경원인 반출 작업은 모형을 제작한 호승지가 했다.

그러나 추후의 조사에 의하면 호승지는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지시가 오기 전 즉 진주만사건이 일어나기 2~3주 전에 이미 모형을 반출하기 위해 짐을 싸놓은 후 곧바로 <북경협화의학원> 총무부장인 보웬에게 전달했다고 진술했다. 배문중은 미국 대사로부터 지시가 내려오기 전에 미국으로의 반출을 사전에 준비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부터 북경인 화석이 지상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70만 년 동안 땅 속에 묻혀 지내다가 겨우 12년 동안 이 세상에 모습을 보였을 뿐이다.

북경인의 실종은 발견할 때와 마찬가지로 세계인을 다시 한 번 놀라게 했으며 분노케 했다. 그 후 60년 이상 중국, 일본, 미국, 프랑스, 독일, 영국 등 거의 전 세계의 과학정보기관은 공개적으로 또는 비밀리에 북경인에 대한 행방을 추적했다. 결론은 아직도 그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이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보웬은 북경인 화석을 다른 중요한 화물과 함께 트럭으로 미국 공사관으로 운반토록 했다고 한다. 계획서에 따르면 옹문호와 호턴이 준비했던 세 번째 방법대로 미 해병대가 북경에서 철수할 때 북경인 화석을 진황도 항구로 운반한 다음 상해에서 출발한 해리슨 프레지던트 호에 옮겨 싣고 미국의 <자연사박물관>으로 운송한다는 것이다. 계획에 따르면 해리슨 프레지던트 호는 12월 8일 진황도에 도착하여 북경인 화석을 인수하기로 되어 있었다.

공교롭게도 미국의 해리슨 프레지던트 호는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출항한 후 일본 군함에 의해 상해에서 피습되어 장강 입구에서 좌초했다. 정황이 어떻든 북경인 화석은 해리슨 프레지던트호에 실릴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다른 설로는 12월 5일 새벽 5시 북경인 화석을 실은 미 해병대 전용열차가 북경을 따라 발해 연변에 있는 진황도 항구로 향했다, 그런데 북경인 화석을 실은 미 해병대 전용열차가 진황도에 도착하자마자 진주만 사건이 일어났다. 그 다음 날 일본군은 신속하게 북경· 천진· 진황도 등지에 있는 주둔 기지를 점령하였고 북경인 화석과 미 해병대 전용 열차도 진황도에서 압수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북경인 화석들이 일본인에게 압수되어 일본으로 옮겨지던 중 연합군의 공격으로 침몰하여 바다 속에 가라앉았다는 설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이유이다. 실제로 대만해협에서 침몰된 일본 화물선을 인양하려는 움직임도 있는데 이것은 일본군이 진황도에서 반출을 기다리고 있던 북경인 화석을 확보했다는 가설에 따른 것이다.

아직도 행방불명 중인 북경원인

반면에 일본인이 북경원인 화석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주장도 계속 나돌았다. 2006년 1월 초에도 북경인 화석에 대한 뉴스가 보도되었다.

《아사히신문》은 하루나리 히데지(春成秀彌) <국립역사민속박물관> 교수가 북경원인의 행적 조사결과가 담긴 옛 일본군 헌병대 보고서 내용을 찾았다고 보도했다. 헌병대의 보고서는 옛 일본군 북경 헌병대장이 상하이(上海)에 있는 헌병대 사령부 앞으로 보낸 것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군 북경헌병대는 북경을 점령한 후 <북경협화의학원>을 접수하여 북경인 화석을 수색했지만 실패했다고 적었다. 또한 보고서는 1941년 11월 북경인 화석을 두 개의 상자에 넣은 뒤 베이징에 있는 미군 병영에 운반됐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고 결론을 내렸다. 앞에 설명한 내용을 확인하는 내용이다.

하루나리 교수는 “북경원인이 실종됐던 중대한 배경에 일본군의 행동이 있었지만 이 보고서를 보면 화석이 일본에 오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

▲ 북경원인 및 산정동인 동굴 유적지 입구, 주구점에서 현재까지 발굴된 지역의 넓이는 2만제곱미터에 달하며 22개 지점에서 화석퇴적층이 확인되었다. 
중국은 북경올림픽을 앞두고 중국인들이 ‘잃어버린 조상’을 찾으려는 노력에 그 어느 때보다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경원인은 나타나지 않았고 아직도 전 세계를 누비면서 북경인 화석에 대한 자료를 찾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노고가 성과를 얻기 바랄 뿐이다.

주구점 북경원인(北京猿人) 유적지는 1987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이래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관람객들이 방문하고 있다. 입구에 북경원인을 묘사한 대형 동상이 있으며 이를 지나면 발굴자들의 사진이 도열하고 있는 수림이 있고 좌측에 인류기원의 비밀을 간직한 유골의 발굴지들이 1지점에서 15지점까지 낮은 산허리를 감싸고 곳곳에 흩어져 있다.

북경원인의 머리뼈가 나와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던 제1지점은 지하 30미터까지 내려갈 수 있도록 계단이 나 있으며 유물이 출토된 퇴적층이 명확하게 지적되어 있다. 또한 주구점 경내에 있는 <주구점유적박물관>에 이곳에서 발굴된 각종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북경원인, 산정동인이 발굴된 주구점은 북경시 서남쪽 40여 킬로미터로 중간에 마르코 폴로가 극찬한 노구교, 운거사, 석화동 등이 있다. 끝.

참고문헌 :
 「주구점 북경원인, 그 70만 년 전으로의 시간여행 」, 김대오, 오마이뉴스, 2005.01.21.
「中 북경원인 화석 새로 발견」, 홍인표, 경향신문, 2003.07.08
「사라진 북경원인, 미국에?」, 박용채, 경향신문, 2006.1.3

이종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빙과학자 | mystery123@korea.com

저작권자 2009.03.25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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