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주구점의 북경원인유적 (2) 유네스코 세계유산 (3) 2009년 03월 13일(금)
|
과학으로 보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앤더슨이 귀국하자 그를 이어 받은 사람은 데이비슨 블랙 교수이다. 블랙은 중앙아시아가 인류의 발상지라는 가설을 적극 지지하면서 인류 치아가 발견된 주구점을 본격적으로 발굴하면 보다 많은 초기 인류 화석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록펠러재단의 승인을 받아 충분한 발굴자금을 지원 받을 수 있었다.
데이브슨 블랙은 현장을 책임질 중국인으로 1904년에 태어난 스물다섯 살의 배문중(裵文中)을 발탁했다. 배문중은 중국의 유명한 작가인 노신(魯迅)으로부터 문학적인 재질을 인정받을 정도로 뛰어난 작가적 자질을 갖고 있었는데 최종적으로 문학을 선택하지 않고 지질학을 선택한 특이 이력의 경력자이다. 1927년에 북경대학 지질학과를 졸업하여 우여곡절 끝에 <지질조사서>에 수습조사원으로 취업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고고학에 관한 한 문외한이었다. 그러므로 독학으로 고고학에 도전했는데 그의 고고학에 대한 정열과 성실함이 곧바로 상관인 옹문호의 눈에 띠어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주구점 발굴 작업의 책임자가 된 것이다. 당시 발굴 여건은 매우 열악하여 끈기와 성실한 사람이 아니면 발굴하겠다고 감히 도전할 계제가 아니었다. 당시의 발굴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앤더슨이 즈단스키에게 말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인류의 두개골 발견 “충적토 지층에서 인류의 유적을 발굴한다는 것은 마치 영국 하이드파크에서 잃어버린 바늘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같은 시기의 암석 동굴에서 고인류를 찾는 일은 마치 왕립도서관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똑같다. 물론 후자의 경우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공원에서 찾는 것에 비한다면 그래도 희망이 많다고 할 수 있다.” 배문중은 그를 파격적으로 발굴 책임자로 임명한 옹문호 소장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그는 발굴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좌절하지 않고 용골산에서 북경인 화석 발굴에 도전했고 1929년 12월, 지상에서 40미터 깊이의 동굴에서 흰 뼈 즉 사람의 두개골을 발견했다. 배문중이 발견한 두개골은 거의 완벽한 상태였다. 그는 몇 년 후 다음과 같이 당일의 느낌을 말했다. “나는 마치 금을 캐는 사람처럼 돌연 금덩이를 발견했다. 아니 내 품안에 있는 두개골은 금덩어리보다 더욱 귀중하고 의미 있는 것이다. (중략)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경하고 꿈속에도 그리워했던가? 그런데 마침내 오늘 그 모든 것이 현실이 되었다. 지금 50만 년 전의 인류가 바로 내 품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조상이시다. 이 얼마나 가슴 뛰고 흥미로운 대단한 사건인가. 이런 생각이 들자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끝내 뜨거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당시까지 인류학자들이 발견한 최초의 인류는 독일의 네안데르탈인이었다. 다시 말해 배문중이 북경인의 두개골을 발견하기 전까지 인류는 겨우 10~20만 년의 역사만 갖고 있었다. 그런데 배문중의 두개골 발견으로 인류 전체의 ‘수명’이 순식간에 몇 십만 년이나 더 늘어난 것이다.
‘북경인은 원시인과 현대인의 특징을 함께 갖고 있다. (중략) 북경인은 발전 유형으로 볼 때 원시 인류에 근접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네안데르탈인이나 남아프리카 인종의 원형(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로 추정)에 속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현대 진인(眞人, 호모사피엔스)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북경원인은 초기 직립원인에 비하여 수십 만 년 또는 백만 년까지 늦지만 두개골은 원시적 특징을 갖고 있다. 두개골벽도 매우 두텁다. 평균 두께 9.77밀리미터로 현대인보다 약 2배가 된다. 뒷머리뼈(枕骨)의 큰 구멍(大孔)의 위치는 기본적으로 현대인의 범위에 있지만 현대인보다 평균 위치는 뒤로 물러나 있다. 그러나 하지골은 기본적으로 현대인의 형상을 갖고 있다. 넓적다리(고골(股骨))의 크기는 그 형상과 부착점(附着点) 등은 현대인의 다리와 같다. 그러나 넓적다리상에 아직도 원시 성질이 남아 있다. 진화론 승리에 결정적 역할 중국학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북경원인의 입술(문부(吻部))이 앞으로 돌출되었다는 점이다. 아래턱이 특별이 발달되고 아래턱가지는 상당히 넓은데 이는 모두 강하게 씹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빨도 현대인보다 크며 표면결구(表面結構) 역시 복잡하다. 특히 북경원인 윗이빨의 혀면(舌面)의 양측에 한 줄의 돌출선이 있어 전체 혀면은 중간에 홈이 있으며 그것은 삽형(?形, Pell 형)이다. 삽형의 앞이빨은 현 몽골인종의 뚜렷한 특징 중에 하나이다. 또한 북경원인은 넓은 코, 낮고 편평한 얼굴과 아래턱이 둥근 것이 특징인데 이 역시 현대 몽골인종과 관계가 있다는 주장이다. 북경원인이 현 동양인의 선조라는 주장과 다름 아닌데 이 설명은 아직도 많은 논란을 불러오고 있는 주제이다. 즉 이들 근거로 북경원인이 몽골로이드의 직접 선조라고 단언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북경인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또 다른 이유는 당시까지 논란의 와중에 있던 진화론과 창조론의 전투에서 진화론이 승리하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엥겔스가 ‘노동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획기적인 이론을 제기한 것도 다윈의 진화론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엥겔스는 「원인(猿人)에서 인간으로 변하는 과정에서의 노동의 작용」이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그러므로 종교계와 보수진영은 진화론을 매도하는 데 열중했다. 그들이 지적한 것은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화석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윈은 인간이 발견할 수 있는 화석이 매우 적으므로 화석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여 진화론 자체를 반박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지만 여하튼 인류의 진화를 알려줄 화석이 많지 않다는 것은 진화론자들에게는 큰 장애였다. 물론 시간이 갈수록 고고학적 성과물은 진화론을 지지하고 있었다. 1868년 프랑스 도르도뉴에서 크로마뇽인 화석이 발견되었고 1891년 고고학자 뒤부아(Engen Dubois)는 인도네시아 자바의 트리닐에서 원인의 골격 화석을 발견했고, 1908년 독일 마우어(Mauer)의 하이델베르크 강가에서 하이델베르크인을 발견했다. 또한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네안데르탈인의 두개골들도 발견되었다. 그런데 북경인은 그 당시까지 발견된 어떤 화석과는 달리 인간이 진화했다는 명백한 증거를 보여주고 있었다. 즉 인류 발전단계에 원인(猿人) 단계가 존재했으며 인류의 역사가 몇 십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 것이다. 불의 흔적 배문중은 계속하여 주구점에 있는 동굴 중에서 합자당(合子堂)이라 불리는 동굴을 발굴했고 이곳에서 주구점의 성가를 또 한 번 높여주는 놀랄 만한 유물들을 발견했다. 그것은 태운 돌과 뼈, 그리고 불에 탄 소나무 가루와 목탄들이다. 불에 탄 돌은 변색된 것도 있고 터져 갈라진 것도 있었으며 어떤 석회암은 불에 구워져 석회로 변하기도 했다. 불에 탄 뼈 역시 거의 대부분 흑색이나 남색, 회색 등으로 변색된 상태였으며, 타서 갈라지거나 틈이 생긴 것 또는 완전히 변형된 것도 있었다. 이 증거들은 주구점에서 살던 북경인들이 불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배문중은 북경인이 정말로 불을 사용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 샤르댕 교수에게 실험을 의뢰했다. 샤르댕 교수는 보다 신중을 기하기 위해 파리박물관광물연구소의 고베르(Gaubert) 박사에게 분석 실험을 의뢰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염산과 질산을 넣고 끓이자, 인산칼슘과 탄산칼슘이 용해되면서 검은 찌꺼기만 남았다. 이는 검은 물질이 어떤 철이나 망간의 산화물에 의해 생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이 검은 찌꺼기를 분젠등에 태우자 곧 완전히 연소되었다. 따라서 검은 찌꺼기는 탄(炭)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염산으로 끓인 후 남은 검은 찌꺼기를 다시 크롬산칼슘이 함유된 유산으로 끓이자 완전히 용해되었다. 이런 현상으로 볼 때 넘은 것이 탄(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북경인 유적에는 비교적 크고 두터운 네 개의 재층(灰燼塵)이 있는데 이 재층에서 많은 수의 불에 탄 돌, 짐승뼈, 탄화된 나무 등이 발견된다. 가장 두꺼운 재층은 6미터에 달하는데 이것은 땔감이 오랜 시간 동안 부단히 연소하여야 형성될 수 있다. 북경인이 불씨를 보존하는 방법 즉 불의 연소에 대해 통제 능력을 갖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조류 화석이 매우 많아 모두 62종, 1천 점 이상에 달한다. 그런데 조류 화석은 대체로 불에 탔으며 비교적 집중 방치되어 있어 조류가 북경인들의 식량 자원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려준다. 북경인이 거주한 동굴에는 많은 서류(鼠類) 화석도 발견되는데 이 역시 대부분 불에 탄 것으로 쥐 역시 북경인들의 상용 식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배문중은 앤더슨이 주구점에서 수집한 석영 조각이 육식 동물의 고기를 자르던 도구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기억하고 합자당 지층에서 발견된 석영 조각들을 철저히 분석했다. 그의 결론은 앤더슨의 생각과 같았다. 이들 석영 조각이야말로 북경인들이 가공용으로 사용한 석기라는 것이다. 원시인류가 육식을 하고 불을 사용한다는 것은 인류가 지구상에서 가장 무서운 동물이 되고 또 지구를 석권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요인이 된다. 학자들은 원시인류가 지구상의 패자로 등장하는 데 결정적인 단계가 있다고 설명한다. 우선 원시인류가 초식 위주에서 육식도 가능한 동물로 변했다는 점이다. 이는 원시 인류들이 거주지를 확장할 수 있는 절대적인 요건이 된다. 즉 자신들의 거주지에서 자식들이 많이 태어나 더 이상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 없게 되면 과감하게 동물들을 사냥하면서 다른 지역으로 옮겨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학자들은 육식 즉 동물을 사냥할 수 있게 된 것이 아프리카를 탈출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초창기부터 인간이 동물을 사냥했다고는 여기지 않는다. 초기인류는 사자 등이 먹다 남긴 고기를 먹다가 점점 사냥하기 쉬운 동물을 사냥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불의 사용은 육식동물이 되었다는 것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사실상 과거에 인간과 여타 동물의 차이점은 없었다. 인간들은 주로 동굴이나 바위틈에서 살았는데 억센 비나 번개가 치면 여타 동물들도 인간들이 살고 있는 거주지로 몰려온다. 동물과 다른 결정적 요건 재난을 피할 때는 서로 문제가 없지만 곧바로 먹이 때문에 이들 간에 혈투가 벌어지는데 패배자는 주로 인간들이었다. 그러나 인간들이 불을 사용하게 되자 동물들은 인간과 접근하는 것을 단념한다. 불이라는 결정적인 무기가 인간과 동물과의 차별성을 유도하는 결정적인 요건이 되는 것이다. 근래의 연구로 북경인보다 오래 된 불의 흔적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스와르트크란스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앤드류 실렌 박사는 이곳에서 발견된 불에 탄 뼈조각을 조사한 결과 100만 년 이상이 되었다고 발표했다. 중국에서도 북경인보다 더 오래된 불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발표되었다. 섬서성 남전현(藍田縣) 공왕령(公王嶺)인 유적은 초기 홍적세인 거의 80만 년 또는 100만 년 전(근래 고지자기 측정은 110만~115만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불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남전인들은 두개골의 높이가 북경원인, 자바원인보다 낮으며 뇌의 용량도 작아 북경원인보다 더욱 원시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중국인들은 북경인보다는 다소 뒤지지만 같은 홍적세 중기인들이 불을 사용했다는 증거가 북경원인으로부터 멀지 않은 요동반도 영구현(營口縣, 지금의 大石橋市) 금우산(金牛山) 동굴 유적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을 매우 중요시한다. 금우산 유적에서 1개체의 두개골 및 두개골 뒷머리뼈 등 50여 점, 대량의 포유동물 화석은 물론 숯과 인공이 가해진 뼈 등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28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금우산인의 중요성은 중기 홍적세 인류가 이미 불을 사용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불을 통제하고 관리할 능력도 갖추었다는 점이다. 뇌량도 증가하여 1천390cc에 달하여 같은 시기의 북경원인보다 200cc 많아 이미 현대인의 뇌량에 접근하고 있다. 앞 입술부위 뒷부분의 축소 정도는 북경원인에 비하여 뚜렷하며 상당부분이 현 몽골인종(蒙古人種; Mongoloid) 특징과 접근되며 이들을 중국 초기 호모사피언스로 부른다. 학자들은 북경원인과 금우산인을 통한 화북지구(華北地區) 구석기 문화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① 이들은 모두 동굴에서 살았는데 이는 지리적 위도와 관계가 있다. 즉 당시 중위도(中緯度)는 매우 추운 지역이므로 이들이 추위를 피하는 데 동굴은 적격이다. ② 이들 모두 불을 사용했다. 불의 사용은 이들 지역 위도와 환경에 연관이 있다. ③ 이들이 사용한 석기는 뚜렷한 특색이 있다. 주구점 인근에서 발견된 석기는 무려 10여만 점이 되는데 보편적으로 작고 긁개 위주이며 찍개는 상대적으로 소량이다. 석기는 주로 직접 타법 위주로 제작했는데 충돌타격법도 사용했다. 석기의 형태는 당대의 자연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식물자원이 풍부한 지역은 채집경제 위주이지만 동물자원을 이용하기 쉬운 곳은 수렵이 우선이다. 이들이 살고 있던 화북지역은 홍적세 중기의 대부분 기간 동안 온대초원 지역이므로 동물 육식에 의지했다. 그러므로 이들은 주로 날이 예리하고 뾰족한 소형 석기를 사용했다. <중국지질조사소>의 옹문호 소장은 이들 석기가 정말로 북경인들이 사용한 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프랑스의 저명한 고고학자인 브뢰이(Abbe Henri Breuil, 1877~1961) 신부를 중국에 초청했다. 브뢰이 교수는 배문중의 결론을 지지했다. “주구점에서 발견된 동물의 뿔이나 뼈에도 인공적으로 타격한 흔적을 여실히 볼 수 있었다. 이것들 역시 석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류의 조상이 사용한 도구였을 것이다.” 브뢰이 신부는 라스코 동굴의 벽화가 크로마뇽인들이 그린 그림이라는 것을 확인한 사람이다. 브뢰이 신부는 프랑스로 귀국하는 길에 배문중에게 프랑스에 와서 고고학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할 것을 권유했다. 배문중은 브뢰이 신부의 권유로 1935년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다. (계속) 참고문헌 : 『중국 고인류 문화의 원류』, 왕유평, 백산자료원, 2008 「북경원인의 고향, 주구점을 보고」, 임효재, 1989년 9월 「[특별기획]발해문명은 고대 동방의 중심이었다」, 이형구, 위클리경향, 2008.01.15 |
이종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빙과학자 | mystery123@korea.com
저작권자 2009.03.13 ⓒ ScienceTimes |
'진화의 새로운 백터-----진과 밈 > 우주천문·지구·진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과학이 사회부적응자 돕는다 콜로라도 감옥 인기강좌, 동물행동학 (0) | 2009.03.26 |
---|---|
중국 주구점의 북경원인유적 (1) (0) | 2009.03.25 |
중국 주구점의 북경원인유적 (3) (0) | 2009.03.25 |
중국 주구점의 북경원인유적 (4) (0) | 2009.03.25 |
탁란을 바라본 세종의 시각 이야기 과학 실록 (0) | 2009.0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