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주구점의 북경원인유적 (3) 유네스코 세계유산 (4) 2009년 03월 19일(목)

세계 여러 나라에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들이 넓게 퍼져 있다. <사이언스타임즈>는 ‘과학으로 만나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 시리즈’를 통해 미처 가보지 못한 인류의 보물들을 찾아 가는 세계유산 여행을 제안한다. 세계 곳곳에 있는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유산들과 자연이 스스로 만들어낸 자연유산들이 어떠한 비밀을 갖고 있는지, 왜 인류의 이름으로 보호해야 하는지를 속 시원히 밝혀 줄 것이다. [편집자 註]

과학으로 보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배문중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자 이를 이어 받은 사람이 가란파이다. 그는 배문중의 추천으로 <신생대연구실>에 견습생으로 합류했는데 배문중보다 4살이 어렸다. 지질고고학에 경험이 없는 가란파였지만 그 역시 배문종처럼 독학으로 <신생대연구실>에서 수집한 유물들을 가지고 자료 분석 등 지루한 작업에 도전했다.

▲ 북경원인 발굴팀 모습(바이덴라이히(앞 중앙), 가란파(뒷줄 안경)) 

그런데 1934년 데이비슨 블랙이 사망하고 1935년 배문중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자 주구점 발굴책임자가 된다. 이때 블랙 교수의 후임으로 유대인인 바이덴라이히(Franz Weidenreich, 1873~1948)가 록펠러 재단의 후원으로 파견되자 주구점이 아닌 다른 지점에도 화석이 나올 것으로 생각하고 다각도의 발굴지역을 탐색했다.

결론은 주구점을 계속 발굴하는 것인데 결국 그들의 기대는 틀리지 않았다. 1936년 6월 20일 드디어 두 개의 북경인 치아와 두골 파편을 발견했다. 이후 북경인의 발굴은 소설과 같이 계속 발견되었다.

6월 28일에 두 점의 윗어금니를 발견했고 6월 29일과 7월 2일에는 각기 두 점의 작은 북경인 두개골을 발견했으며 7월 4일에 또 다시 윗어금니를 발견했다. 1936년 10월에는 배문중이 북경인의 첫 번째 두개골을 발견한 인근지역에서 북경인의 왼쪽 아래턱뼈를 발견했고 11월에는 아래턱뼈를 발견한 지점 바로 밑에서 사람의 정골(頂骨)을 발견했다. 곧바로 대량의 두개골 조각과 침골, 미골, 이골(耳骨) 등 모두 두 개의 두개골이었다.

가장 완벽한 세 번째 두개골 발견

1936년 11월 전 세계는 새로운 북경인 두개골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발굴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전 세계가 북경인의 발굴로 놀라고 있을 때인 11월 말 가란파는 세 번째 ‘북경인’ 두개골을 발견했다.

세 번째 두개골은 단단한 암석층에 깊이 묻혀 있었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에서 가장 완벽한 것이었다. 12월 19일 바이덴라이히 교수는 다음과 같이 북경인의 발굴 성과에 대해 발표했다.

▲ 북경원인 생활 상상도 
“이번에 발굴된 세 점의 두개골은 대략 성년으로 보이며 보존이 매우 완벽한 상태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두개골 가운데 큰 것은 남자이며 작은 것은 여자입니다. 두개골 부분은 비록 완전한 상태이지만 두개골의 아랫부분은 불완전한 상태입니다. 안면 부분과 윗턱뼈가 모두 보존된 흔적이 있기 때문에 그 원래의 면모를 다시 볼 수 있을 겁니다.

(중략) 최근에 발견한 두개골 조각은 모두 자바원인의 문제를 해석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자바원인은 매우 오랫동안 긴팔원숭이의 화석이라고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두개골의 성질이 중국원인과 서로 같기 때문에 자바원인이 결코 동물이 아니라 중국원인과 같은 유형의 인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바원인은 중국원인의 변천 과정 가운데 가장 진보된 인류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략) 세 번째 원인의 두개골은 이전 두 점의 두개골보다 매우 완전한 상태인데 첫 번째보다 작고 두 번째보다는 큽니다. 뇌의 크기는 1천100cc인 청년의 두개골로 보입니다.”

1937년에도 발굴은 계속되어 가란파는 3월 북경인 앞어금니와 두골 파편 두 점을 발견했다. 4월 또 다시 북경인 아래턱뼈 일부와 미골 한 점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 미골은 1936년 11월에 발굴한 두 번째 두개골에서 깨져 나온 것이다.

계속해서 가란파는 많은 유골들을 발견했는데 특히 여섯 개의 치아가 달려 있는 턱뼈 윗부분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까지 북경인의 위턱뼈는 발견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가란파가 발견한 위턱뼈는 북경인의 면형(面型)을 복원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

밝혀지는 북경원인

192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발굴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는데 현재까지 발굴된 지역은 20개 지점이 넘는다. 이곳에서 14명분의 두개골을 포함하여 노년, 소년, 유년의 남녀 도합 45인의 인골과 수십만 점의 석기, 골기, 동물 화석 등이 발견되었다.

출토된 인골의 경우 남자의 키는 156센티미터, 여자는 144센티미터로 현대인보다 다소 작다. 북경원인의 주요 특징인 머리뼈 가운데 폭이 가장 넓은 부분은 좌우 귓구멍 약간 위쪽이며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좁아져서 포물선 모양의 단면을 그린다. 이것은 현대 인류 머리뼈의 가장 폭 넓은 부분이 좀 더 위쪽의 두개(頭蓋) 중부에 위치하고 있는 것과 다소 다르다.

또한 북경인의 머리뼈는 낮고 편평하며 이마가 뒤로 기울어져 있다. 원인(猿人)에 비하면 위로 올라간 것이지만 현대 인류에 비하면 낮다. 머리뼈의 두께는 현대인에 비해 약 3배 가량 두껍다.

눈두덩 부분은 굵은 데다 앞으로 튀어 나왔으며 좌우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팔다리 모양은 별 차이가 없다. 뇌용적량도 현대인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다. 현대인을 대체로 1천450cc라고 할 때 북경원인은 약간 적은 1천250cc이다.

▲ 주구점에서 발굴된 북경원인 두개골 

북경원인들이 사용하던 도구는 타제석기류가 주이다. 자갈들을 한쪽 또는 양쪽에서 떼어내어 만든 찍개류가 주류를 이루는데 이것은 주먹도끼류를 주로 사용한 유럽과 아프리카와는 사뭇 다르다. 즉 북경원인은 ‘자갈돌 찍개 문화권’에 속한다. 이 점은 한국 구석기문화와 상통하는 점이 많다.

주구점에서 화석인골 외에도 1백10여 종에 달하는 동물화석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 30여 종은 이미 절멸된 동물의 유골이다. 예컨에 물소나 코뿔소의 뼈도 같은 층에서 나온다. 고양이 뼈도 있는데 그 크기를 볼 때 덩치가 지금의 사자만 했던 것으로 보인다.

북경인들이 골기를 사용했다는 증거도 발견된다. 발견된 다량의 녹각(鹿角) 중에는 꽃사슴의 뿔과 큰뿔사슴의 뿔이 있는데 모두 여러 조각으로 쪼개진 데다 쪼갠 흔적이 분명하여 사람의 손으로 가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 절단된 녹각 뿌리는 굵고 견실하여 망치로 사용될 수 있었고 땅을 파는 도구로도 사용될 수 있었다.

녹각은 매우 질기고 단단하여 잘 절단되지 않지만 불로 처리하면 쉽게 자를 수 있다. 학자들은 녹각 조각의 한쪽 끝에서 불에 탄 흔적을 발견했다. 북경인들은 대형 동물의 뼈로 골제 공구를 만들었다. 식물 뿌리 등을 땅에서 파낼 때는 그야말로 유용하게 사용했을 것이다.

북경원인의 상당수가 어려서 사망

여하튼 주구점에서 발견된 북경인들의 풍부한 인골을 토대로 학자들은 북경인들이 매우 어려운 환경에서 생활했음을 발견했다. 그것은 수명이 매우 짧았다는 것이다. 39.5퍼센트가 14세 이전에 사망했고 30세 이전에 사망이 7퍼센트, 40~50세 사이의 사망 7,9퍼센트였고 50~60세는 단 2.6퍼센트였다. 43퍼센트는 수명을 알 수 없었는데 전체적으로 볼 때 상당수가 어려서 사망했음을 알 수 있다.

학자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은 북경원인의 연대가 얼마나 되는지이다. 북경인 유적의 퇴적 두께가 40미터 이상이 되는데 학자들은 이곳에서 출토된 115종의 동물 화석을 토대로 이들 유물이 대체로 중기 갱신세에 해당한다고 추정했다. 그런데 중기 갱신세의 시간 폭은 매우 넓어 100만 년 전부터 10만 년 전까지 걸쳐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근래 탄소연대측정, 우라늄연대측정, 핵분열트랙연대측정, 열형광연대측정, 아미노산연대측정과 고지자기측정 등 여섯 가지 방법으로 연대를 측정한 결과 북경인 유적 하부 퇴적(제13층)은 중기 홍적세(중기 홍적세는 78만 년 전부터 12.8만 년 전까지)로 약 70만 년 전에 형성되었으며 상부 퇴적층은 20만 년 전에 형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즉 70만 년 전부터 20만 년 전까지 약 50만 년 동안 북경인이 주구점 일대에서 생활했다는 것으로, 과거 북경원인의 연대를 50만 년 전으로 계상했지만 근래 70만 년 전으로 올려 설명하기도 한다.

▲ 북경원인 제1동굴 내부 

한국에서도 홍적세의 인류활동 흔적이 발견되는데 북한의 검은모루동굴과 남한의 전곡리 야외 유적이다. 일반적으로 검은모루 동굴의 연대를 70만 년 전으로 추정하지만 북한은 근래 정밀히 재측정한 결과 100만 년 전으로 주장한다.

북경원인과 앞에서 설명한 금우산인은 근래 더욱 더 주목을 받는데 그것은 인류가 어떻게 진화되었는가의 논쟁에서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북경인을 포함한 호모에렉투스가 바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후손이며 또한 호모사피엔스의 선조라고 주장한다.

현재 학계에서는 현생 인류의 조상을 찾는 과정으로 다지역기원설과 아프리카기원설(이브가설)로 나눈다. 아프리카가설은 근래 DNA 조사들을 통해 현생인류가 약 2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한 여자 즉 ‘미토콘드리아 이브’로부터 파생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지역기원설은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호모에렉투스가 각 지역으로 퍼져 각 지역의 선조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두 가설 모두 장단점이 있지만 중국인들은 여러 가지 고고학적 자료를 증거로 다지역기원설을 주장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증거로 북경인과 금우산인을 제시한다. 특히 금우산인 유골화석이 현생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을 반박할 수 있는 강력한 증거로 제시되는 근거는 ① 금우산인 유적의 지리적 위치 ② 탄소연대측정결과에 의한 금우산인과 미토콘드리아 이브의 활동연대 차이 ③ 금우산인의 특징 등이다.

우선 아시아 대륙 동부에 있는 금우산인 유적의 지리적 위치가 아프리카와 너무 멀고 금우산인의 활동 시기가 28만 년 전으로 미토콘드리아 이브보다 8만년이나 앞서며 더욱 중요한 것은 금우산인이 불씨 관리에 능숙했다는 점 등으로 보아 금우산인이 미토콘드리아 이브보다 보다 일찍 초기 호모 사피엔스 단계 진입이 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제갈량 칠종칠금(七縱七擒)의 비밀 ⑥ 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26)」(2009년 1월 16일)에서 다루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인간 성숙의 견인차, 식인행동

북경원인과 관련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연구는 그들 사회에 식인풍습이 있었다는 것이다. 바이덴라이히 교수가 수집된 인골을 관찰한 후 내린 결론으로 두개골의 수는 많은 데 비해 사지의 뼈 부분은 적다는 것이 식인설의 요체이다. 즉 골수를 빼 먹기 위해 뼈를 부숴 버렸다는 얘기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두개골과 아래턱을 분석해볼 때 화석화되기 이전에 이미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특징은 중국원인이 살아 있을 당시 서로 죽고 죽여 사지를 절단한 상태에서 머리만 동굴 안에 저장한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 북경인의 사지뼈, 북경원인의 두개골의 수는 많은데 비해 사지의 뼈 부분은 적다는 것은 골수를 빼 먹기 위해 뼈를 부숴 버렸다는 식인설의 요체이다. 
리차드 리키는 북경원인의 식인 행동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논증을 했다. 그는 북경인들의 식인 행동을 인간 정신 속의 어떤 감정을 표현하는 의례(儀禮)로 설명하면서 인간으로 성숙되어 가는 과정에서 식인행동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다수 북경원인의 두개골에서 척추로 이어지는 부분에 구멍이 뚫어져 있는데 이는 특별한 주의를 갖고 만든 흔적이라고 설명했다. 즉 골수를 먹기 위해서라면 윗머리뼈를 부수기만 해도 되는데 왜 굳이 두개골에서 척추로 이어지는 부분에 구멍을 크게 뚫는 어려운 방법을 택했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므로 리키는 북경원인들이 피정복자의 골을 먹음으로써 적을 이기기 위한 힘을 얻으려는 것이든 혹은 죽은 친척과 지속적인 유대를 위한 것이든 어떤 의식을 벌렸음이 틀림없다는 설명이다.

리키가 북경인의 식인행위를 매우 중요시하게 생각한 것은 식인행위가 정규적인 식사의 일부로서 취해진 것이 아니라 모종의 의례의 일부라는 것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식인 풍습은 크게 족외식인(族外食人, exocannibalism)과 족내식인(族內食人, endocannibalism)으로 나뉘는데 이 풍습들은 수렵채취인과 농경민의 구별과 연관되므로 인류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학자들은 고고학적 유물에서 나타나는 식인 풍습의 흔적이 적대감에서 비롯한 행동 또는 애정과 존경이 화석화된 징표로 간주한다.

족외식인이란 자기가 속한 구성원이 아닌 다른 구성원을 먹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족외식인은 다른 부족을 공격하여 희생자를 획득하는데 족외식인이라 해도 식인만을 위해 무절제한 공격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데 중요성이 있다. 즉 족외식인은 사회적 결속을 도모하는 의례가 주목적으로 식인행동 자체는 공동의 목표 속에서 집단의 총체적 결속을 이루려는 한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반면에 족내식인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랑과 존경의 표시로서 죽은 친척의 고기를 먹거나 죽은 자를 고이 잠들도록 하기 위한 관습적인 방법으로 식인을 한다. 또는 죽은 사람의 고기를 먹으면 죽은 사람의 생명이 보존된다는 믿음을 갖기도 한다. 반대로 죽은 사람의 인격과 영혼에 동화되기를 바라는 행동으로도 인식된다.

농경민이 유목민보다 전쟁 자주 일으켜

그런데 족외식인은 수렵채집 생활을 하는 소위 유목민보다는 훨씬 더 농경 정착인에서 빈도가 높게 나타난다. 이것은 농경민이 유목민보다 전투를 일으킬 만한 이유를 더 많이 갖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 북경원인 유적지 입구, 지표로부터 30미터 지점으로 퇴적층이 발달돼 있고 중앙 하단부에 불을 사용한 흔적이 아직도 보존돼 있다. 

우선 농경민은 유목민보다 일반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의 집합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보호해야 할 토지와 곡식을 갖고 있다. 또한 추수를 마친 후 전쟁을 할 수 있는 한가한 시간이 비교적 많이 생긴다. 인간의 전쟁 기록을 보더라도 추수 후에 전쟁을 많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유목민 즉 수렵채취인들은 노동과 여가가 계속 뒤섞인 상태에 있으므로 전쟁에 몰두할 시간이 많지 않다. 즉 농경민은 전쟁 의례를 정례화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지만 수렵인은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리키는 북경인들의 식인행위가 다른 집단의 충돌 결과인 족외식인이 아니라 집단 의식, 일체감 그리고 영속성에 대한 욕망이 표현되어 있는 족내식인으로 생각했다. 더불어 그는 북경인의 이러한 의례적 행위가 북경인이 자의식(自意識)을 지닌 증거이며 이런 식인 행위를 통한 협동과 집단적 활동이 사회구조를 형성하는 기초적인 틀을 제공했다고 강조했다.

즉 수렵채집 유산에서 태어난 협동행위가 오랫동안 성립되어 온 영장류의 사회적 본성과 결합되어 환경의 도전을 헤쳐 나가는 특수한 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리키의 주안점은 식인행위가 인간이 진화하는 종(種)으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 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계속)

참고문헌 :
 『동북문화와 유연문명』, 곽대순 외, 동북아역사재단, 2008
「中 구석기인, '미토콘드리아 이브'에 도전」, 이돈관, 연합뉴스, 2007.07.26
『오리진』, 리차드 리키 외, 학원신서, 1983

이종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빙과학자 | mystery123@korea.com

저작권자 2009.03.19 ⓒ ScienceTimes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