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주구점의 북경원인유적 (1) 유네스코 세계유산 (2) 2009년 03월 10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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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으로 보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20세기 초에 중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가장 놀란 것은 중국인들이 용골(龍骨)과 용치(龍齒)를 매우 중요시한다는 점이다. 용골과 용치는 고포유동물의 척추 뼈나 치아 화석을 의미한다.
그런데 중국에서 용골이나 용치가 중요시된 것은 과학적인 연구보다는 한약으로 매우 비싸게 팔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약재로서 용골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맛이 달고 쓰며 성질이 평(平)하다. 간을 다스려 양기를 잠기게 하고 정신을 평안하게 하며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주로 두통, 어지러움증, 건망증, 불면증, 설사, 학질, 식은땀, 상한(傷寒), 이질, 피오줌, 소아배꼽부스럼, 음낭 가려움증, 궤양 등이 효과가 있다.’ 용치는 용골보다 몇 배나 비싼 가격으로 팔렸는데 효과는 다음과 같다고 알려졌다. ‘성질이 차갑고 경기를 진정시키고 정신을 평안하게 하며 열을 내리고 정력을 약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지랄병이나 심계(심장이 두근거리는 병), 불면증, 소아 경기나 간질 및 기타 진단하기 어렵거나 치료하기 힘든 병을 치료한다.’ 19세기 말 독일인 의사 하버러(K. A. Haberer)가 북경에서 의료 활동을 하면서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용골과 용치를 구입했다. 그는 고고학도는 아니지만 고대 척추동물의 화석에 흥미를 느끼고 자신이 이들 화석들을 연구하고자 했지만 영국을 포함한 강대국이 북경을 점령하자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구입한 용골과 용치를 갖고 귀국했지만 직접 연구하는 것을 포기하고 독일의 척추동물학자인 슐로저(Marx Schlosser) 교수에게 전해주었다. 슐로저 교수는 하버러의 화석을 분리하면서 사람의 치아 두 개를 발견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치아를 유인원의 것으로 생각하여 큰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당시에 유럽인들은 네안데르탈인들이 세계로 퍼져나갔다고 인식했기 때문에 중국에서 이들보다 높은 연대의 사람들이 살았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1891년 자바에서 네덜란드 해부학자 뒤부아(Eugeun Dubois)가 네안데르탈인보다 연대가 올라가는 자바인을 발견했지만 이 당시에도 유럽인들의 선입견에 의해 이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자바인은 북경인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이후에야 비로소 네안데르탈인보다 오래된 화석이라는 것을 인정받는다. 앤더슨의 등장 1914년 스웨덴의 유명한 지질학자이자 고고학자, 탐험가인 앤더슨(Johann Gunnar Anersson, 1874~1960)이 추후에 황제로 옹립되었던 원세개(袁世凱, 1859~1916) 정권의 ‘중국북양정부농상부광정사고문’이라는 신분으로 중국에 도착했다.
남극 탐험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독일의 유명한 페르디난드 폰 리히트호벤(Richthofen, 1833~1905) 박사가 저술한 『실크로드』를 읽고 중국의 매력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마침 중국 정부에서 그를 공식적으로 초청했다. 리히트호벤은 중국의 서부 지역 즉 서역 지방을 ‘실크로드’라고 명명한 장본인이다. 중국이 앤더슨을 초청한 것은 중국의 문화재에 대한 서양인들의 약탈이 너무나 심했기 때문이다. 19세기 초에 실크로드가 알려지기 시작하자 수많은 서양인들이 중국으로 몰려가 돈황을 비롯하여 용문, 운강석굴 등의 벽화와 고대 건축물, 낙양의 분묘 등이 무참하게 파헤치고 있었다. 당시의 중국 정부로서는 이들을 막을 힘이 없어 수수방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1912년 중화민국이 수립되자 중국정부는 서양인들이 중국에서 마음대로 문화재를 약탈할 수 없도록 금지했다. 문제는 약탈자들이 전문가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중국 정부에서 자신들의 정책을 보다 원활하게 집행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전문가가 필요했다. 당시 중국은 스웨덴이 그나마 서양 각국 중에서 제국주의적 야심이 없는 나라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중국 정부는 비록 실패한 탐험가이지만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앤더슨 교수를 중국으로 초청한 것이다. 그는 중국에 도착한 감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유구한 역사와 매혹적인 이야기를 지닌 이 신비한 땅에 대해 얼마나 많은 갈채와 더불어 감탄을 했는지조차 잊어버릴 정도였다. 스벤 헤딘(실크로드 문화재 약탈자로 가장 악명이 높음)이 중국에서 그토록 찬란한 고고학적 성과를 거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앙소문화 발굴 앤더슨은 농상부의 고문이라는 거창한 지위로 임명되었지만 농산부고문의 직책을 충실하게 지키면서 현장 고고학도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중국은 고고학이라는 개념조차도 없었으므로 그야말로 황무지를 개척하는 것과 같았다. 중국의 장구한 역사와 문화유산을 볼 때 그가 손대는 것마다 새로운 이정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용치의 산지를 찾기 위해 용골이라면 무조건 구입하겠다는 소문을 냈다. 그가 용골을 구입한다는 소문을 들으면 결국 용골에 대해 보다 많은 정보가 들어올 것이라는 생각했다. 앤더슨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그가 중국에 도착한 지 4년이 되는 1918년 2월 연경대학 교수인 화학자 깁(J. Mcgregor Gibb) 교수가 찾아왔다. 그는 앤더슨이 용골을 수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주구점 남쪽 약 2킬로미터에 위치한 계골산(溪骨山)에서 발견된 뼈를 보여주었다. 또한 계골산을 발굴하면 보다 많은 용골과 용치를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곳은 당나귀를 타더라도 북경에서 한나절에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앤더슨은 곧바로 계골산을 방문했는데 깁 교수의 장담대로 그는 도착하자마자 두 보따리의 화석을 채집할 수 있었다. 주구점은 명나라나 청나라에서 고궁이나 릉을 건축할 당시 필요한 돌과 석회석을 채취하던 장소였다. 그러므로 계골산에서 채굴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동굴이나 뼈 조각들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당시에 앤더슨이 발견한 화석들은 고고학적으로 큰 중요성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치아가 어디에서 출토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조그마한 단서가 되었다. 그런데 앤더슨 교수는 주구점을 계속해서 발굴하지는 않았다. 그가 주구점 발굴에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은 어떤 농부가 갖고 온 수많은 돌도끼와 돌칼, 채색도기들이 그의 주목을 끌었기 때문이다. 그가 채색도기에 주목한 것은 당시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만 발견된다는 채색도기가 중국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농부가 알려 준 지역의 발굴에 곧바로 도전했고 이 발굴로 앤더슨은 불후의 명성을 얻는다. 그가 발굴한 곳은 황하 중류 지역의 신석기 시대 문화로 기원전 5천 년에서 기원전 3천 년경의 앙소문화(仰韶文化) 유적지였다. 그가 앙소문화 유적지에서 발견한 채색도기는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된 채색도기보다는 다소 늦지만 동아시아가 인도-유럽 문명의 주변부에 속한다는 기존 고고학자들의 관념을 깨는 데 기여했다. 학자들을 놀라게 한 것은 토기의 파편에서 발견되는 식물의 씨앗 흔적이다. 이 씨앗 흔적을 연구한 학자들은 그것이 논벼의 곁겨 흔적임을 발견했다. 원래 논벼는 열대성 식물로 중국에서 양자강보다 남쪽인 화남 땅에서 재배되고 있었는데 화북이라 해도 좋은 앙소문화에서 논벼가 재배되고 있었다는 설명이다. 앙소문화가 농경생활을 주로 했다는 증거였다. 앙소문화는 1980년대에 요하의 우하량 지역에서 홍산문화가 집중적으로 발굴되기 전까지 중국의 최고 문화로 알려졌다. 특히 1953년 서안에서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반포에서 발견된 앙소문화 유적지는 원시 모계 씨족 사회를 확실하게 보여 준다. 원형· 사각형의 가옥 유적과 저장용 창고 구멍 등 수백 개가 발견되었는데 이 중 신전의 유적으로도 추정하는 선돌(소도 또는 솟대의 원시 형태)이 발견되어 주목을 받았다. 여하튼 앤더슨이야말로 중국 문명이 세계사의 한 축을 구성하도록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이다. 주구점 인류화석에 도전 앙소문화 유적 발굴로 앤더슨의 주가가 한창 높아지고 있을 때인 1921년 북경에 오스트리아의 젊은 생물학자 오토 즈단스키(Otto Zdansky)가 찾아왔다. 그는 앤더슨이 화석들을 발견했던 계골산을 발굴하면 분명히 더 큰 발견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앤더슨도 즈단스키의 제안대로 주구점을 발굴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마침 주구점에 살고 있는 중국인이 용골을 찾으려면 계골산보다 더 좋은 장소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현지인들이 '노우구(老牛溝)로 부르는 지역의 남쪽에 있는 용골산이었다.
이때 운명의 아이러니가 생긴다. 앤더슨에게 계골산을 발굴하자고 종용하던 즈단스키가 북경을 떠난 것이다. 3년이나 투입했는데도 성과가 없었기 때문인데 결국 즈단스키는 자신의 명성을 세계적으로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잃어버린 셈이다. 물론 즈단스키가 고고학 분야를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 귀국한 즈단스키는 1924년부터 스웨덴 웁살라 대학 연구실에서 북경 주구점에서 가지고 온 화석 표본들을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 그러나 그는 앤더슨과 함께 주구점에서 발굴한 유물 중 인간의 치아 두 개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다. 즈단스키는 1926년이 되어서야 자신이 발견한 치아가 인간의 것임을 발견하고 재빨리 북경의 앤더슨에게 그 소식을 알렸다. 앤더슨은 이 사실을 곧바로 세상에 공표하지 않고 스웨덴의 황태자(신라 서봉총 금관 발견자이기도 하며 후에 아돌프 구스타브 6세로 왕위에 오름)가 중국을 방문한 10월에 제반 자료를 확보한 후 발표키로 하면서 당시 북경의 <북경협화의학원>에서 신경학 및 발생학을 가르치던 캐나다의 데이비슨 블랙(Davidson Black, 1984~1934) 교수에게 주구점에서 발견된 인간의 치아로 논문을 부탁했다. 또한 중국 지질학계의 원로들과 <신생대연구실(미국 록펠러 재단의 기금으로 설립)>을 설립하여 명예주임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두 개의 이빨이 현대인과 유인원의 중간에 해당하는 동물의 이빨이라고 추정했다. 블랙 교수는 즈단스키가 갖고 있는 치아 두 개로 「아시아 대륙 제3기의 인류 : 주구점의 발견」이란 논문을 작성했다. 스웨덴의 황태자가 도착하자 앤더슨 교수는 블랙 교수가 작성한 논문을 직접 발표했다. 블랙 교수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확실한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완전하고 확실한 자료를 갖춘 오랜 인류의 화석이 아시아 대륙의 히말라야 산 이북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 인류가 아시아 동부에 존재했다는 것은 더 이상 추측이 아닌 사실이라는 것이 확실하다.’ 행운은 준비된 사람에게만 베풀어진다 블랙 교수의 결론은 초기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출발했다는 현대 고고학계의 정설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여하튼 초기 인류가 아시아에 존재했다는 것은 당시 발표장에 참석한 학자들을 충분히 인식시킬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 즈단스키가 발견한 치아 두 점의 원래 소유자를 미국의 고생물학자 그레이보(Amandeus William Grabau) 교수는 ‘북경인’으로 명명하자고 했다. 북경원인의 발표에 대해 다소 길게 설명하는 것은 북경원인에 관한 한 원래 발견자인 즈단스키보다 앤더슨이 더 큰 명예를 얻었다는 아이러니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결과는 즈단스키가 끈기를 갖고 인류 화석을 연구하지 않은 실수라고 볼 수 있다. 즉 즈단스키가 북경을 떠나기 전에 치아가 인간 것이라고 발견하고 곧바로 발표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다.
‘관찰 분야에서 행운은 준비된 사람에게만 베풀어진다.’ 물론 북경인에 대한 앤더슨의 발표에 모든 학자들이 수긍한 것은 아니다. 당시에 국제적인 명성을 지닌 샤르댕(Pierre Teihard de Chardin) 교수는 치아의 주인공이 인간이 아니라 육식동물의 어금니일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당대의 전문가인 샤르댕이 이의를 제기한 것은 당시 주구점에서 발견된 인류 화석이 치아 단 두 개였기 때문이다. 샤르댕의 지적은 한동안 북경인의 진위 여부로 학계를 다소 시끄럽게 만들었다. 물론 앤더슨은 두 개의 치아가 육식동물이 아니며 북경인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그것도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고 말했는데 그의 말은 추후에 확인되었다. 앤더슨은 주구점의 치아로 한껏 명성을 얻은 후 1927년 중국에서의 13년 동안의 체류를 끝내고 스웨덴으로 돌아갔다. 물론 귀국한 후 스웨덴 스톡홀름에 <극동고생물박물관>을 세우고 관장을 맡는 등 고고학 분야에 관련했지만 이후 더 이상 연구 성과를 발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중국의 고고학계에 미친 영향과 상고 시대 인류의 조상을 발견했다는 점으로 불멸의 이름을 얻었고 현재 주구점 입구에 설치된 발굴자 입간판에도 등장한다. 사실상 앤더슨을 고고학자로서는 가장 행복한 행운의 사나이로 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계속) 참고문헌 : 『주구점의 북경인』, 웨난(岳南) 외, 일빛, 2001 「요한 안데르손」, 『뉴턴』 1996년 12월 「시안, 비단길의 출발점 장안으로 알려진 옛 도읍」, 『뉴턴』 1996년 3월 |
이종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빙과학자 | mystery123@korea.com
저작권자 2009.03.10 ⓒ ScienceTim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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