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의 명언과 영어공부 (15)
마리아 메이어
▲ 마리아 메이어  ⓒ
Mathematics began to seem too much like puzzle solving. Physics is puzzle solving, too, but of puzzles created by nature, not by the mind of man.

수학이 퍼즐 맞추기와 아주 비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물리학 또한 퍼즐 맞추기와 같다. 그러나 그 퍼즐은 인간의 마음이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이 만든 것이다.
-마리아 괴페르트 메이어(1906~1972) : 물리학자, 노벨 물리학 수상자-

여성 과학자를 생각할 때면 대부분 마리 큐리(Marie Sklodowska Curie)가 떠오릅니다. 그만큼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메이어(Maria Goeppert Mayer)는 약간 생소할지 모릅니다. 이제까지 노벨상의 꽃이라고 하는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여성 과학자는 마리 큐리와 마리아 메이어 두 사람뿐입니다. 대단한 여성 과학자들입니다.

마리 큐리는 노벨상을 관장하고 수여하는 노벨재단(Nobel Foundation)이 설립된 지 3년 만인 1903년에 노벨상을 받지만 마리아 메이어는 60년이 지난 1963년에 받습니다. 1906년 생이니까 따지면 57세가 돼서 받습니다. 그녀의 활발한 연구는 1940년대가 중요한 무대였습니다. 상당히 늦게 받은 편이죠.

마리 큐리는 1867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까 37세가 되던 아주 젊은 나이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것이죠.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 마리아 메이어가 그 편에 속할지 모르겠습니다. 1, 2차 대전을 겪으면서 탄생한 냉전(cold war)이라는, 미국과 소련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이 때로 노벨상에 적지 않게 영향을 끼칩니다. 마리아 메이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두 사람은 공통점이 아주 많습니다. 두 사람 다 제정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불행한 역사의 국가 폴란드 태생입니다. 그리고 둘 다 폴란드를 떠나 외국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마리 큐리는 제정 러시아의 압박으로 프랑스에서, 마리아 메이어는 남편을 따라 미국시민으로 외국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고향의 흙에 묻히지 못한다는 이야기죠.

그리고 둘 다 물리학 연구 가운데 가공할 만한(terrible, formidable) 위력의 원자폭탄 제조에 많은 이론을 제공하게 됩니다. 그게 본인이 원했든 원치 않았던 간에 말입니다. 하긴 당시 물리학 연구는 순수 물리학쪽보다 무기개발에 무게를 둔 것은 사실입니다. 보통 우리가 전쟁에서 이야기 하는 폭탄은 주로 화학자들이 만듭니다. 그러나 원자폭탄은 물리학자들이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핵(nuclear)이나 원자(atom, atomic)는 모든 물체의 기본입니다. 분자생물학(molecular biology) 유전과학(genetic science)에서도 핵이라는 말이 항상 등장합니다.

마리아 메이어를 두고 ‘폴란드 태생이냐 아니면 독일 태생이냐’라는 논쟁이 있습니다. 그녀는 유럽의 지도가 1년 만에 자주 바뀌는 분쟁이 치열한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유럽의 강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그리고 영국이 밀고 당기면서 영토 분할이 하루가 멀다 하지 않고 변하는 시기였습니다. 그 가운데 폴란드가 대표적인 강대국의 희생물이었습니다.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생을 비교하면 될 것 같습니다.

마리아 메이어는 당시 프로이센(독일)의 영토였지만 지금은 폴란드 땅인 카트비체(Kottowiz)에서 태어났습니다. 마리아 메이어 집안은 6대째 대학교수의 집안이었고 그녀는 비록 여자였지만 집안의 학문적인 전통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괴팅겐(Goettingen) 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부친도 그녀가 대학 교수가 되길 바랬습니다. 그래서 부친이 교수로 있는 독일의 명문 괴팅겐 대학으로 진학해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했습니다. 마리아 메리어가 학문에 전념하고 노벨 물리학상을 받기까지에는 아버지의 영향과 뒷바라지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여성과 학문에 대한 사고는 우리나라 1930년 또는 40년대를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만 유교라는 가부장적 권위 때문에 여성이 홀대를 받았다는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당시 미국은, 유럽은 어떠했고, 여성의 참정권(political rights)은 언제 이루어졌는지 공부를 해보면 좋을 듯합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명문 하버드 대학이 여성을 얼마나 차별했는지도 한 번 연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 남성들만 욕하지 말고 당시의 사조(trend)를 생각해 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노벨상, 특히 과학과 관련된 노벨상을 수상한 여성 과학자들을 보면 부모나 친척이 각별히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학문적인 분위기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들의 아버지는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아 존경 받고 돈도 잘 버는 대학교수, 건축사(architect), 치과의, 의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음에 소개하겠지만 1977년 노벨 의학 및 생리학상을 받은 로잘린 앨로(Rosalyn Sussman Yalow)는 가난한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뉴욕의 한 주택가에서 태어나 가난을 극복하고 학문의 길에 몰두해 노벨상을 받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불굴의 투지를 보여준 여성이었습니다.

여성 과학자의 노벨상 수상에는 남편의 헌신적인 노력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힘든 작업에도 불구하고 여성 과학자 반 수 이상이 결혼해서 자녀를 낳아 키웠습니다. 남성들이 더 많이 자녀들을 돌봤습니다. 그렇다고 남자들이 직업이 없어서 집에서 하릴없이 빈둥대며 여성의 수입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아내와 함께 노벨상을 공동 수상한 피에르 큐리(Pierre Curie, 마리 큐리 남편)와 어린이들의 질병을 연구한 공로로 또한 아내와 1947년 노벨 화학상을 공동 수상한 칼 코리(Carl Cori, Gerty Radnitz Cori 남편)는 아내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이름 있는 대학과 연구소들이 제공하겠다는 좋은 자리도 물리쳤습니다.

몇몇 여성 과학자들이 남편과 공동으로 노벨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메이어의 남편은 아닙니다. 그녀의 남편 조세프 메이어(Joseph E. Mayer)는 노벨상과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그는 아내보다 더한 여권 신장론자(feminist)로 두 남매를 도맡아 키우면서 아내를 격려하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마리아 메이어는 1933년 괴팅겐 대학에 교환 학생으로 왔던 남편과 사랑을 하게 되고 결혼해서 남편이 다니고 있던 미국의 존스홉킨스 대학으로 갑니다. 두 사람이 얼마나 잉꼬 부부(devoted couple)였는지 캠퍼스 커플로 아주 유명해, ‘조와 마리아(Joe and Maria)’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마리아 메이어는 1963년 독일의 옌젠(Johannes Hans D. Jensen)과 미국의 위그너(Eugene P. Wigner)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연구내용은 원자핵이 지닌 미세한 성질을 양성자(proton)와 중성자(neutron)로 이루어진 껍질구조(shell structure)라고 밝힌 것이었습니다.

교수가 된 마리아 메이어는 1939년 콜롬비아 대학으로 옮겨 원자폭탄 개발을 위해 우라늄 동위원소를 분리하는 방법을 연구했고 1945년에는 시카고 대학교의 핵연구소로 자리를 옮깁니다. 1955년 옌젠과 함께 ‘핵 껍질구조에 대한 기초이론(Elementary Theory of Nuclear Shell Structure)’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는데 이 연구로 노벨상을 받게 되죠.

마리아 메이어는 모든 과학자들이 그랬듯이 과학을 숭상하고(admire) 사랑했습니다. 과학을 즐기면서 연구했기 때문에 인생의 승리를 낚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과학에 대한 일종의 ‘끼’, 영어로 표현하자면 madness가 있었던 겁니다. 과학뿐만 아니라 모든 게 그렇습니다. 자기가 설정한 목표에 도전하고 열심히 하는 정열과 집착이 성공을 일구어 낼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나는 원자핵에 대해 미칠 정도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는 갑자기 그 진실을 발견하고야 말았다(For a long time I have considered even the craziest ideas about atom nucleus and I suddenly discovered the truth)’. 위대한 여성과학자 마리아의 평범하면서도 대단한 말입니다.

마리아 메이어는 196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는 자리에서 기자들이 수상소감을 묻자 “노벨상을 받는 것은 연구를 직접 하는 것보다 반만큼도 재미없다(Winning the prize wasn’t half as exciting as doing the work itself)”라고 대답했습니다. 연구실에서 새로운 사실을 하나하나 발견하면서 느꼈던 흥분을 생각하면 노벨상 수상은 비교가 안 된다는 이야기죠. 대단한 여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녀의 연구가 원자폭탄이라는 가장 위협적인 대량살상무기(WMD, weapons of mass destruction)를 만드는데 많은 역할을 한 게 사실입니다. 마리 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리학이라는 순수과학(natural science, basic science, fundamental science)이 원자폭탄이나 수소폭탄(hydrogen bomb) 제조에 사용된다는 것은 참 불행한 일이고 과학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요?

핵과 관련해서 한마디 하죠. 월드와이드웹(WWW) 다 아시죠? 인터넷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WWW는 팀 버너스리(Tim Berners-Lee)와 로버트 카이유(Robert Cailliau) 박사가 공동으로 개발했습니다. 보통은 팀 버너스리가 개발했다고 나옵니다. 둘 다 스위스에 있는 유럽핵물리학연구소(CERN)에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컴퓨터에 대한 지식이 많고 사업수완이 좋은 빌 게이츠(본명, William Gates)가 WWW를 사들여 지금의 인터넷 시대를 열었고 엄청난 돈을 벌고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갑부이기도 합니다. 빌 게이츠가 과학자냐 사업가냐 하는 논쟁에 끼어 든다면 저는 사업가 쪽이라고 주장할 겁니다. 그러나 따져 보자면 무의미한 논쟁입니다.

제가 이러한 지적을 하는 것은 2005년 서울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서 카이유 박사를 만나 인터뷰를 하게 됐는데 이 양반이 한 말이 생각이 났기 때문입니다. “핵물리학연구소(CERN)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원자폭탄을 만드는 곳에서 근무하는 것 아니냐며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는 겁니다. CERN은 그런 곳이 결코 아닌데 말입니다” 핵(nuclear)은 물체나 세포의 가장 기본입니다. 핵을 꼭 핵폭탄이나 원자폭탄만과 연결해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김형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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