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의 명언과 영어공부(25)
아리스토텔레스
▲ 아테네 학당에 나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손바닥으로 땅을 가리키는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오른쪽).  ⓒ
It is easy to fly into a passion…anybody can do that, but to be angry with right person to the right extent and at the right time and in the right way…that is not easy.

열정에 빠지는 것은 쉽다. 어느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올바른(맞는) 사람에게 올바른 정도로, 그리고 올바른 시간에 올바른 방법으로 화를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 : 그리스 철학자, 수학자, 생물학자 -

무슨 뜻인지는 아시죠? 르네상스 시대의 걸출한 화가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The School of Thens)’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스승 플라톤을 주축으로 그리스의 석학들이 거의 다 출동합니다. 이 그림에서 플라톤은 손가락을 하늘로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손바닥을 땅으로 가리킵니다.(그림 참조)

이것은 라파엘로가 순전히 의도한 그림이지만 함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플라톤은 이데아(idea)라는 이상을,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중요시한다는 내용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하늘은 이상적으로 보이고 땅은 현실적으로 보입니다. 하늘을 남성이라고 보고 땅을 여성이라고 보는 동양철학의 이치도 그렇습니다.

이 그림에는 그리스의 유명한 사람들이 하도 많이 등장해서 따로 ‘아테네 학당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그림에 나오는 각각의 인물을 사진과 함께 간단히 소개하는 기사를 싣고자 합니다. 그리스 석학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 그림에는 백 년, 또는 수백 년 차이가 나는 사람들이 함께 등장합니다. 그래서 ‘이 그림 거짓말 아냐?’라고 할지 모릅니다. 이 그림은 르네상스 시대에 라파엘로가 한 폭의 그림으로 그리스의 화려했던 시대를 다 나타내고 싶어서 그린 겁니다. 순전히 그림입니다.

“Those who educate children well are more to be honored than they who produce them ; for these only gave them life, those the art of living well(어린이를 잘 교육시킬 줄 아는 사람은 어린이를 낳은 사람보다도 더 훌륭하다. 왜냐하면 잘 사는 삶의 지혜를 주기 때문이다).”

라파엘로의 의도대로 플라톤은 이상주의자라고 할 수 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승과 제자가 서로 주장하는 바가 틀려 등을 돌렸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두 사람의 주장은 상반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같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학문에는 파(派)가 많아야 합니다. 특히 철학에는 그렇습니다. 이런 주장도 있고 저런 주장도 있고, 다양한 주장이 많아야 합니다. 그러한 주장 속에서 학문은 발전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러한 파(派)가 자기의 이기심을 위하거나 정쟁(political debate)의 도구가 돼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 시대를 그리워하고 이상적인 시대로 생각하는 것은 그러한 다양한 사상들이 보장되는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는 철학이 있고 정치학이 있고, 또 과학이 있었습니다. 숫자의 천재 피타고라스도 있었고 유레카의 주인공 아르키메데스도 있었습니다. 1200년 정도가 지나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하기 전까지 천문학에 관한 한 부동의 이론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도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서로 주장이 달랐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훌륭한 스승과 제자입니다. 그리고 서로를 보살펴 주는 돈독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후세 학자들이 ‘이상과 현실’을 들먹이며 사이를 갈라놓은 것은 아닐까요? 그들의 이론을 자기 이론으로 만들면서 말입니다.

“Dignity does not consist in possessing honors, but in deserving them(존엄성이란 명예를 소유한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다. 명예를 존중할 때 얻어진다).” “Education is the best provision for old age(교육은 노후를 위한 최선의 준비다).”

아테네 학당(School of Athens)에는 디오게네스도 등장하고 미모와 재능을 겸비했다는 히파티야도 등장합니다. 아테네 학당이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스 시대의 사상이 꽃을 피운 것은 헬레니즘 시대입니다. 헬레니즘을 그리스와 오리엔트 문명(지금의 이라크)의 결합이라고 하지만 거기에는 인도문명의 영향도 강합니다. 헬레니즘 문명의 근간에는 인도 철학이 숨을 쉬고 있습니다.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며 철학적 완성이 도래했던 시기는 없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라는 아집이 너무 강하게 작용합니다. 중동의 전쟁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또 따진다면 문명은 발전했지만 사상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퇴보한 겁니다. 중세 암흑기가 바로 그렇습니다.

어쨌든 풍요로웠던 헬레니즘의 사상과 철학은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 자유가 인정되고 이어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면서 역사에서 자취를 감춥니다. 모든 사상과 철학은 기독교로 인해 황폐해집니다. 모든 것은 오직 기독교의 이론뿐입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적으로 보면 대단한 황제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사상과 철학은 땅에 묻힙니다. 대단히 슬픈 일이죠. 저의 주장은 기독교 공인이 잘못됐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또 국교로 받아들였다는 게 잘못이라는 게 아닙니다. 헬레니즘 시대의 다양한 사상과 주장이 종교에 의해 사장됐고 그 이후 중세 암흑기가 도래한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The wise man does not expose himself needlessly to danger, since there are few things for which he care sufficiently ; but he is willing, in great crises, to give even his life-knowing that under certain conditions it is not worthwhile to live(현명한 사람은 불필요하게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키지 않는다. 좋아할 만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상황에서는 목숨을 던질 정도로 위험을 무릅쓰기도 한다).”

▲ 아리스토텔레스.  ⓒ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 학자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플라톤은 이상주의자로 제외시키고 아리스토텔레스를 제일 존경합니다. 아마 여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적 현실주의가 그들이 주장하는 합리주의와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또 아리스토텔레스의 성장배경도 그렇습니다.

“The educated differ from the uneducated as much as the living from the dead(교육을 받은 것과 안 받은 것은 삶과 죽음의 차이만큼이나 다르다).” “Education is an ornament in prosperity and a refuge in adversity(교육은 잘 나갈 때는 장식품이지만 역경 속에서는 피난처다).” “All who have meditated on the art of governing mankind have been convinced that the fate of empires depends on the education of youth(인류를 지배할 수 있는 기술을 습득한 사람들은 제국의 운명이 젊은이의 교육에 달려 있다는 것을 확신한 사람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처럼 많은 명언을 통해 교육, 공부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트라키아(지금의 발칸 반도 지역)의 북동 해변에 있는 스타게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기원전 384년에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마케도니아의 전의(典醫)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당시의 관습에 따르면 부친의 의학 및 해부 기술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교육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예외가 아니었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과 과학 일반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이미 자리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해양생물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120종의 어류와 60종의 곤충을 포함해 500종이 넘는 동물을 분류하고 관찰했습니다. 그의 동물 분류는 18세기에 이르러 린네가 분류학을 체계화할 때까지 2000년 동안 그대로 쓰였습니다.

“The worst form of inequality is to try to make unequal things equal(최악의 불평등은 불평등한 것을 평등하게 만들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Equality consists in the same treatment of similar persons(평등이란 비슷한 사람들을 비슷하게 취급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평등에 관한 정치학적 이론입니다.

열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로 가서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학원에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20년을 보내며 ‘아카데미아의 예지(銳智)’라는 평판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가 결국에는 플라톤의 철학에서 뛰쳐나와 그 자신의 독자적인 철학 이론을 수립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플라톤의 사상과 인품에서 깊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는 아카데미아에 체류하는 동안 플라톤의 방식대로 많은 대화편들을 저술했으며 그의 동료들은 그의 우아한 문체를 ‘황금의 강’이라고 칭송했다고 합니다.

당시 아카데미아에는 철학은 물론 천문학, 생물학, 해부학, 고고학과 같은 다양한 전문가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많은 양의 경험적 사실들을 접하게 될 기회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과학적 기질과 부합되는 철학의 한 방향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대립은 넘어가죠.

“There is no great genius without a mixture of madness(광기가 없는 위대한 천재는 없다).” “Without friends, no one would want to live, even if he had all other goods(친구가 없다면 어느 누구도 세상을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설사 모든 재산을 가졌다고 해도).” “A true friend is one soul in two bodies(진정한 친구는 육체는 두 개지만 영혼은 하나다).”

“Wishing to be friends is quick work, but friendship is a slow-ripening fruit(친구가 되는 것은 빨리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정은 늦게 숙성하는 열매와 같다).” “In poverty and other misfortune of life, true friends are a sure refuge(가난이나 불행의 시기에 진정한 친구는 진정한 피난처가 된다).”

두 사람 간의 차이점이 무엇이든 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을 개인적으로 비난하지 않았고 플라톤이 죽을 때까지 아카데미아에 남아 있었습니다. 우정과 의리를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플라톤이 죽자 아카데미아의 경영은 그의 조카인 시퓨시포스의 수중으로 넘어 갔고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맞지 않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아카데미아를 떠나 헤르메이아스 왕의 초빙으로 트로이 근처에 있는 아소스(Assos)에 간 것은 기원전 348년이었습니다. 헤르메이아스는 이전에 아카데미아의 학생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곳에서 3년 동안 저술하고 가르치고 탐구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궁정에 기거하는 동안 헤르메이아스의 질녀이자 양녀인 피티아스(Phythias)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다시 아테네에 가 있는 동안 피티아스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얼마 후 헤르필리스(Herphyllis)라는 여성과 결합합니다. 당시 재혼은 합법적이 아니었지만 행복한 생활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둘 사이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윤리학과 산술학으로 유명한 니코마코스(Nicomachos)입니다.

정치학에도 조예가 깊은 그는 그리스 통일론자로 유명했습니다. 페르시아의 무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통일국가가 분산된 도시국가보다 더욱 효과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케도니아의 필립 대왕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초빙하고 그는 알렉산더를 교육하는 가정교사로 들어 갑니다. 당시 알렉산더는 열세 살이었는데 필립이 사망하고 알렉산더가 왕위를 계승하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으로서의 임무를 끝내고 다시 아테네로 돌아옵니다.

알렉산더가 기원전 323년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반(反)마케도니아의 바람이 불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이 매우 곤란해집니다. 그는 그때까지도 마케도니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법정에 불경죄로 기소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도 불경죄로 고소되었으나 그는 ‘아테네 시민들이 철학에 대해 또 한 번 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라고 말하면서 아테네를 스스로 떠나 칼키스(Chalcis)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지병인 위장병으로 죽습니다.

그는 보기 드물게 유서도 남겼습니다. 이 유서에는 자신의 친지들에 대한 엄밀한 배려와 함께 노예들의 처우 문제까지도 소상히 언급하고 있는데 자신의 노예들을 팔지 말 것과 몇몇의 노예들은 자유인으로 해방시키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It is easy to perform a good action, but not easy to acquire a settled habit of performing such actions(좋은 행동을 하기란 쉽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을 습관으로 만들기는 쉽지 않다).” “We give up leisure in order that we have leisure, just as we go to war in order that we may have peace(우리는 레저를 갖기 위해서 레저를 포기한다. 평화를 위해서 전쟁터로 가는 것과 같다).”와 같은 명언도 남겼습니다.
/김형근 편집위원  hgkim5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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