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의 명언과 영어공부(26) | ||||
밀레바 마리치-아이슈타인의 첫째 부인 | ||||
무한(無限)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인간의 두개골(頭蓋骨)을 비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젊을 때 인식능력을 충분히 개발하고, 지구라는 새장에만 갇혀있지 않고 우주를 모험할 수 있다면 인간은 확실히 무한의 개념을 알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 무한한 행복을 품을 수 있다면 그는 무한한 우주도 이해하게 될 겁니다. 우주의 무한성을 이해하는 게 더 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밀레바 마리치(1875~1948) : 세르비아 출신의 물리학자. 아이슈타인의 첫째 부인 - 여성 과학자 가운데는 마리 큐리처럼 여성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인정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남성의 그늘에 가려 그 재능을 인정 받지 못하는 여성 과학자들이 꽤 많습니다. 남성우월주의라는 주위의 환경이든 남편과의 결별이라는 가슴 아픈 사연 때문이든 말입니다. 생명과학의 출발을 알리는 ‘DNA 이중나선구조’를 발견하고서도 ‘왓슨과 크릭’에게 노벨상을 빼앗긴 ‘불운의 여성과학자’ 로잘린드 프랭클린(Rosalind Franklin)은 영국의 남성우월주의에 희생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더구나 33세라는 짧은 나이에 생을 마감해 보는 이의 가슴을 더욱 안타깝게 합니다. 노벨상을 받거나 이름을 떨친 여성 과학자들은 남편이나 친척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특히 남편의 도움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는 마리 큐리는 대단히 행복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첫 번째 아내 밀레바 마리치(Mileva Maric)를 아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러나 20세기의 천재 아인슈타인의 업적 가운데 상당부분이 밀레바 마리치의 것이라는 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은 아내의 ‘단순한 내조’가 아니라 연구를 직접 같이 했다는 이야기 입니다. 집안은 돈도 많고 유복했습니다. 그러나 밀레바의 비극적인 삶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희귀한 고관절 탈골(displaced hip)로 인해 그녀는 한평생 발을 절면서 지내야 했습니다. 모계의 유전이었습니다. 소아마비가 아니라 엉덩이 뼈에 골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밀레바의 가계가 정신적 질환이 많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정신질환의 둘째 아들을 평생 돌보며 혼자 살아야 했던 것은 그녀 생전의 업(業)인지도 모르죠. 장애가 그녀가 공부를 하는 데 큰 문제가 될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삶에 비극적 그림자를 드리운 것은 사실입니다. 긴 인생으로 따져본다면 그녀의 학문에 대한 재능과 열정도 한 이유가 됐는지 모릅니다. 수학은 물론이고 어학, 그림, 음악에도 탁월한 소질이 있었습니다. “Mileva Maric is born just before Christmas. Her parents dote on her and nickname her ‘Mitza’. She limps because of a displaced hip, a birth defect unusually common in the region. As a youngster, she shows a gift for math and languages, painting and music. Mileva’s family is fairly wealthy, and she receives superior schooling.”
밀레바는 스위스 쥬리히 대학에서 아인슈타인을 만납니다. 출중한 능력의 밀레바와 사상이 통한 아이슈타인은 밀레바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와 결혼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이 공부도 못하고 난봉꾼이고 집도 가난해서 반대했다고 합니다. 마치 아인슈타인이 밀레바의 재력과 재능을 이용하기 위해서 결혼했다고도 합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Her parents are tolerant, knowing that Mileva’s marital prospects are few, due to her intelligence and disability. Her parents oppose the relationship on every level. She is too old, too bookish, lame, Slovene, not Jewish(부모는 밀레바가 너무 똑똑하고 장애자이기 때문에 결혼생활의 미래가 좋지 않을 것을 알고 반대했다. 부모는 여러 가지 면을 재보고 두 사람의 관계를 반대했다. 그녀는 우선 나이가 많다. 너무 책을 좋아한다. 절름발이이고, 슬로베니아인(人)이고 아인슈타인처럼 유대인이 아니다).” 나이로 보면 밀레바가 4살 더 많습니다. 밀레바가 1875년생인 반면 아인슈타인은 1879년 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이 밀레바를 이용하기 위해 4살이나 많고 절름발이인 그녀 에게 다가갔다는 이야기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런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피운 사랑을 아름답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나눈 사랑의 편지도 많습니다. “My God, how beautiful the world will look when I’m little wife, you’ll see(아, 내가 당신의 귀여운 아내가 된다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게 보일까요? 당신은 그 마음을 알겠지요).”-1901년 밀레바가 아인슈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러면 왜 헤어졌느냐고요? 사랑의 방정식은 우주를 푸는 방정식보다 더 복잡합니다. 아마 아인슈타인의 그 복잡하다고 하는 특수상대성 이론이나 일반상대성이론 방정식도 사랑의 방정식보다 덜 복잡할 겁니다. 불가(佛家)에서 이야기 하듯이 1초에 1만8천 번의 번뇌(감정)가 들어왔다 나가는 인간의 마음은 풀기 어렵습니다. 사랑은 감정입니다. 결혼한 그녀는 아인슈타인을 위해 헌신하고 그의 연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합니다. 그리고 재정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습니다. 훗날 그가 노벨상을 타자 아인슈타인은 이혼한 첫 번째 아내 밀레바에게 상금을 전부 줍니다. 그녀의 공로를 인정한 때문이었고 또 아인슈타인의 인간적인 배려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노벨상 상금을 둘러싸고 씁쓸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노벨상을 받았을 때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제가 창조하고 이룩한 모든 것은 밀레바 덕분입니다. 그녀는 제게 천재적인 영감을 주는 사람입니다. 그녀가 없었다면 제 작품은 완성은커녕 시작도 되지 못했을 겁니다.” 이처럼 아인슈타인은 그녀의 재능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결혼 전의 두 사람은 사랑의 편지를 나누며 무척 행복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결혼생활에 접어들고 나서 그 행복에 조금씩 금이 간 것 같습니다. 아인슈타인이 밀레바와 잘 지내다가 명성이 높아지고 돈도 많이 벌기 시작하니까 헌신짝처럼 버렸다는 이야기도 많이 나옵니다. 젊은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성적 욕구를 배출하기 위해 중요한 기말 시험을 앞둔 밀레바에게 시험을 포기하라고 하면서 육체적 관계를 맺었고 혼전에 딸을 낳게 만들었다며 아인슈타인을 비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을 남자라는 이유로 혹독하게 몰아칠 것인지 좀 더 전후 사정을 이해해야 할 것인가는 글을 쓰는 사람의 생각에 달려 있습니다. 역사는 강자의 장점도 있지만 약자의 장점도 있습니다. 남성인 아인슈타인을 비난할 수 있는 것은 약자로서 가질 수 있는 장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두 사람 다 성인이었다는 겁니다.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성인의 차원에서 두 사람을 판단해야 합니다. 제가 너무 아인슈타인을 옹호하고 있나요? 어쨌든 1915년경 어느 정도 명성을 거머쥔 아인슈타인이 물리학 교수로 대학을 취리히에서 베를린으로 옮기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깨집니다. 베를린에는 아인슈타인의 연인으로 나중에 둘째 부인이 된 엘자(Elsa)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밀레바에게 정식으로 이혼을 요청합니다. “In 1916, he demands a divorce. Mileva collapses and is hospitalized. Albert thinks she is faking(1916년 아인슈타인이 이혼을 신청하자 밀레바는 실신해서 병원으로 실려갔다. 아인슈타인은 그녀가 일부러 그러는 척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1918년 세계 1차대전이 끝나면서 두 사람 관계도 끝납니다. 이혼 조건은 아인슈타인이 노벨상을 받을 경우 상금은 밀레바가 갖는다는 겁니다. 나중에 사람들은 이상한 조건일 뿐만 아니라 아인슈타인이 그 조건에 순수히 응한 것도 이상하다고 합니다. 자기의 연구업적에 밀레바의 노력이 상당부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엘자와 빨리 결혼하고 싶은 나머지 그 조건을 들어 준 것인지는 잘 모릅니다. 또 밀레바는 아인슈타인 연구가 노벨상을 받을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노벨상을 받은 것은 이혼한 지 3년이 지난 1921년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그때 받은 상금 12만1천5백72 크노르(현재 34만8천 달러 상당)를 밀레바에게 건네 줍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주지않고 미국으로 갖고 달아났다가 할 수 없이 다시 돌려 주었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사실 아인슈타인은 여러 가지로 밀레바에게 재정적 지원을 많이 했습니다. 학문적 열정이 대단했던 밀레바도 성격이 보통은 아니었던 같습니다. “One should be nice and modest and keep one’s mouth shut, That is my advice to you(사람은 성격이 좋아야 하고 겸손해야 하며 입을 다물 줄 알아야 하오. 이게 당신에게 주는 나의 충고요).”-1925년 10월 아인슈타인이 밀레바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인슈타인은 밀레바에 대한 이야기는 주위 사람들에게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첫째 부인을 포함해 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거의 입을 다물었다고 합니다.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에 매달려 모든 정열을 학문에 쏟을 때가 밀레바와의 관계가 최악의 경우에 달했을 때라고 합니다. 아인슈타인이 잘 나가자 여성들도 많이 사귀고 즐길 수 있어 밀레바와 자신이 낳은 자식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는 이야기까지 합니다. 침묵을 지켜오던 아인슈타인은 이에 대해 “아마 내가 보러 간다면 밀레바가 못 보게 할거요”라고 대답했답니다. 어쨌든 불행하게 일생을 살아 온 밀레바는 애물단지나 다름없는 둘째 아들인 에두아르트의 정신질환을 간호하면서 평생을 보내다가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아인슈타인이 사망한 것은 7년 후의 일입니다. 밀레바가 평생을 아인슈타인을 원망하면서 살았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은 그렇게 주장합니다. 마리 퀴리는 과학자인 남편과 꼭 같은 연구를 같이 하면서도 금슬 좋은 부부로 노벨상도 같이 받습니다. 그러나 밀레바는 꼭 같은 과학자인 남편과 결혼했으면서도 결국 이혼하고 에두아르트 간호에 평생을 바치다 세상을 떠나는 불행한 여성 과학자로 남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인슈타인이 원래 이기적이고 여성을 좋아하는 성격 때문이었을까요?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혼합니다. 우리나라도 이혼율이 40%에 육박할 정도로 높습니다. 아마 아인슈타인이나 밀레바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면 서로의 원한이 별로 크지 않았을 겁니다. 아인슈타인이 ‘20세기 최고의 과학자’가 아니라 평범한 과학자였다면 밀레바가 살아온 인생의 억울함도 분노도 질투도 다 묻혔을 겁니다. 아인슈타인을 질타하고 흠집을 낸다고 해서 밀레바의 한이 달래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의 학문적 재능과 업적을 재조명하는 것이 그녀의 한을 달래는 겁니다. 요즘 언론에 아인슈타인의 여성편력이 자주 등장합니다. 책들도 나온 것 같고요. 육체파 여배우 마릴린 먼로의 ‘잠을 자고 싶은 남자들’ 가운데 아인슈타인이 있었고 편지도 왕래했답니다. 자세하게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좀 ‘진한 이야기’라면 벌써 매스컴의 헤드라인을 장식했겠죠? 언론이 가만두지 않았을 겁니다. 인간의 분노를 가장 강하게 일으키는 것은 자기가 믿는 신(神)을 모욕하는 일도 될 수 있고 아시아적 입장에서는 조상을 욕하는 일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분노는 치정(痴情)에 의해 일어납니다. 이는 사랑과 질투, 그리고 그에 따른 증오심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감정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유로 살인과 같은 살벌한 범죄도 일어납니다. | ||||
/김형근 편집위원 hgkim54@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