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의 명언과 영어공부(28) | ||||
소피 제르맹 | ||||
누가 이상(진리)에 먼저 도달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이상(진리)이 어느 정도냐 하는 것이다. -소피 제르맹(1776-1831): 프랑스 수학자, 물리학자- 소피 제르맹(Sophie Germain)은 여성 과학자입니다. 별로 들어본 적이 없죠? 프랑스가 낳은 걸출한 최고의 천재 여성과학자로 칭송을 받습니다. ‘천재가 선천적이냐? 아니면 후천적이냐?’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답변을 할 수 없습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학문에 대한 ‘끼(madness)’는 타고 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선천적이라는 이야기죠. 더구나 여성의 신분으로 과학자의 대열에 오르기 위해서는 타고난 자질이 있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프랑스 파리에는 소피 제르맹가(街)라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거리에 소피 제르맹이라는 호텔도 있습니다. 총명하고 대단한 수학자이면서 불우하게 살다간 그녀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입니다. 문화국가의 자존심을 갖고 있는 프랑스가 낳은 위대한 수학자입니다. 소피 제르맹은 혁명의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1776년은 미국혁명(독립혁명)이 시작된 때입니다. 13년 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납니다. 여러 면에서 그녀는 세계의 흐름이라는 사조 속에서 혁명이라는 영혼을 잉태하고 태어났는지 모릅니다. “Sophie Germain was born in an era of revolution. In the year of her birth, the American Revolution began. Thirteen years later the French Revolution began in her own country. In many ways Sophie embodied the sprit of revolution into which she was born.” 그녀는 중산층의 자제로 정규교육을 받았습니다. 13살 되던 해 우연히 아버지의 서고에서 수학의 역사에 관한 서적을 읽던 중 아르키메데스의 죽음에 관한 일화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수학이라는 학문이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에 대한 공포마저 잊게 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크게 감탄하였다고 합니다. “She spent a great deal of time in her father’s library, and one day she ran across a book in which the legend of Archimedes’ death was recounted. Legend has it that ‘during the invasion of his city by the Romans Archimedes was so engrossed in the study of a geometric figure in the sand that he failed to respond to questioning of a Roman Soldier. As a result he was speared to death.’” 위 영문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녀는 많은 시간을 아버지의 서재에서 보냈다. 그리고 어느날 아르키메데스의 죽음에 대한 책을 접하게 됐다. 그 일화는 ‘로마 군사들이 침입한 가운데서도 아르키메데스는 의문에 대한 대답을 연구하기 위해 모래 위에서 도형을 그리고 있었다’는 것.” 그러나 로마 병사는 단칼에 그의 목을 칩니다 이를 계기로 그녀는 수학을 공부하려는 욕망에 불탔지만 아버지가 강렬하게 반대합니다. 그러나 소피는 수학에 대한 집념을 누를 길이 없어서 매일 모든 가족들이 잠든 심야에 일어나 남몰래 수학공부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하도 피곤하여 책상에 엎드려 날이 밝도록 깊은 잠에 빠져버린 것이 아버지에게 발각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버지가 그 열성에 감탄하여 수학공부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 후 소피는 독학으로 수학공부를 계속합니다. 특히 1794년에 파리공과대학(Ecole Polytechnique)이 나폴레옹에 의하여 개교하게 되자 수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가 하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공과대학에서는 여학생의 입학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르맹의 꿈은 부서지고 맙니다. 과거 서양에서도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남녀차별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보통은 우리나라에만 차별이 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영화나 소설에도 중세시기에 남성과 여성의 불륜은 자주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백작인 남성과 또 다른 백작의 아내가 ‘바람 피우는 것’은 자주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상류계층에서의 ‘불륜과 바람’은 허용이 됐지만 하층 계급에서의 ‘불륜과 바람’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바로 사형이죠. 우리가 이야기하는 신사(gentleman)와 숙녀(lady)라는 고상한 개념은 고급 상류층만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유럽은 지금의 빈부 양극화를 넘어 5%의 귀족과 95%의 천민이었습니다. 천민은 노예죠. 제가 말씀 드리는 거는 유럽의 ‘사랑의 자유’는 5%의 귀족의 소유였고 평민들의 소유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이야기가 빗나간 것 같네요. 입학허용이 안 된 제르맹은 궁여지책으로 이 대학의 수학 교수인 라그랑제(Lagrange, 1736~1813)의 강의록을 손에 넣고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리고 강의록에다 주석을 달고, 또 잘 납득이 되지 않는 곳에 대해서는 의문점을 지적해 직접 라그랑제에게 보내곤 하였습니다. 그녀의 실력에 감탄한 라그랑제 교수는 그녀의 집을 방문하여 크게 격려하고 많은 수학자들에게 그녀를 소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녀가 25세 되던 해(1801)에 독일의 대수학자 가우스(Gauss)가 ‘정수론 연구(整數論硏究)’를 발간합니다. 그녀는 역시 이 책을 통하여 정수론 연구에 몰두합니다. 가우스와의 접촉을 통하여 제르맹이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은 그 유명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Fermat’s Last Theorem)’를 증명하는 데 공헌한 겁니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19세기에 들어서 정수론을 하는 수학자들로 하여금 도저히 풀리지 않는 난해한 문제로 악명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소피 제르맹이 충격적인 발표를 함으로써 페르마의 유실된 증명을 재현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 졌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수학공부를 하는 여인들을 별로 달갑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이런 편견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연구를 계속해 수학의 역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긴 여류 수학자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소피 제르맹이 있습니다. 소피 제르맹은 혁명적인 인물입니다. 독신으로 평생을 보낸 그녀는 수학자가 되기 위해 시대의 편견과 싸웠고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설움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그녀는 정수론(number theory)으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탄성론(theory of elasticity)에서의 업적도 대단합니다. “Sophie Germain was a revolutionary. She battled against the social prejudice of the era and lack of formal training in order to become a celebrated mathematician. She is best known for her work in number theory, bur her work in the theory of elasticity is also very important to mathematics.” | ||||
/김형근 편집위원 hgkim54@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