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의 명언과 영어공부(29)
로잘린드 프랭클린
▲ 로잘린드 프랭클린.  ⓒ
Science and everyday life cannot and should not be separated. Science makes explanations based on truth, experiences and experiment.

과학과 일상생활은 분리될 수 없고 분리돼서도 안 된다. 과학은 진실, 경험 그리고 실험에 바탕을 둔 설명을 준다.
- 로잘린드 프랭클린(1920~1958) : 영국 여성과학자 -

이 짧은 말은 로잘린드 프랭클린(Rosalind Franklin)이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시절, 기독교에 대한 신앙심이 아주 깊은 아버지의 의견에 반대하면서 아버지에게 쓴 편지 내용 가운데 한 토막입니다. 아버지의 사후(死後)의 삶에 대한 고집에 프랭클린이 반대 의견을 제시한 겁니다.

“아버지께서는 과학을 인간을 타락시키는 발명품으로 생각하고 계십니다. 과학이란 삶과 분리된 것이며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려서 막아야 하는 것이고 일상생활과 분리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죠. 그러나 과학과 일상생활은 분리할 수 없고 분리해서도 안 됩니다. 과학은 제게 삶을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사실과 경험, 실험에 근거한 설명을 줍니다.

인생에서 성공하려면 신앙이 중요하다는 아버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제 생각에는 신앙을 갖기 위해 필요한 것은, 최선을 다하면 성공에 다가갈 수 있고 인류문명을 향상시키기 위한 우리의 목표를 이루는 데 충분히 얻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신념뿐입니다.”

“There is probably no other woman scientist with as much controversy surrounding her life and work as Rosalind Franklin(인생과 업적을 둘러싸고 로잘린드 프랭클린만큼 논란이 많은 여성과학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역사는 강자의 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프랭클린은 강자의 역사 속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사라진 여성입니다. 그래서 많은 동정을 받습니다. 또 지나치게 동정을 받다 보니까 오히려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죠?

프랭클린이 생명과학의 열쇠를 제공한 ‘DNA 이중나선구조(double helix)’를 발견했는데 왓슨과 크릭이 그 발견을 훔쳤습니다. 그래서 노벨상을 받은 거죠.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왓슨과 크릭에게 지나치게 비난을 하고 있다는 주장도 합니다. 뚜렷한 공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프랭클린을 너무 부풀린다는 이야기입니다.

분명한 것은 프랭클린은 세포생물학의 위대한 개척자(Pioneer Molecular Biologist)이고, 위대한 과학자였고, ‘DNA 이중나선구조’를 발견한 장본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영국 정부는 비운의 여성과학자를 기리기 위해 ‘로잘린드 프랭클린 상’을 제정해 해마다 우수하고 업적이 탁월한 여성 과학자들에게 상을 수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벨상을 프랭클린에게 돌릴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하나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타인의 한 지식인이 이런 이야기를 한 게 기억이 납니다. “자살폭탄(suicide bomb)은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후의 무기다. 죽음을 좋아하는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겠는가? 그들은(이스라엘) 핵무기까지 보유하고 있다. 우리는 흔한 박격포도 없다. 그들은 부녀자는 물론 어린애까지도 죽인다. 지금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팔레스타인은 역사에서 지워질 것이다.”

팔레스타인이든 이라크든 간에 자살폭탄은 종교에 미친 사람들의 행동이 아닙니다. 그들은 영국에서 미국에서 공부를 한 인텔리들입니다. 종교적인 신념에 빠져 자살을 택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미쳐 순교를 선택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물론 자살폭탄을 변호하는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

우리나라 안중근 의사는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해 죽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사형을 당합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수상(총리대신) 가운데 유일하게 미국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은 미국통이고 인텔리입니다. 미국 예일 대학은 그에게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합니다. ‘미개한 한국인을 잘 다스렸다’는 공로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세계 역사에서는 잔혹한 테러리스트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안 의사에게 총을 맞은 이토 총독은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누가 쏘았는가”라고 묻자, 옆에 있던 의사가 “한국 사람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토 총독은 “바보 같은 한국 놈”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면서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한국을 ‘조센징’이라고 욕을 하지만 일본의 지식인들은 ‘반도인’이라고 하며 한국을 폄하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동네 골목대장이 되는 게 아니라 양복에 넥타이를 맨 말쑥한 차림으로 그들을 대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때 일본은 한국을 더 무서워할 겁니다. 친일청산을 위해 친일사전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일본은 한국을 새롭게 볼 겁니다. 주제가 빗나간 것 같네요.

▲ DNA 이중나선구조.  ⓒ
프랭클린의 업적에 대해 제동을 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프랭클린은 분명하게 DNA 구조를 밝혀내는 데 공헌한 대단한 공로자입니다. “A debate about the amount of credit due to Franklin continues. What is clear is that she did have a meaningful role in learning the structure of DNA and that she was a scientist of the first rank(프랭클린의 공로에 대한 논의는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DNA 구조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고 그 분야에서 최고였다는 것이다).”

제임스 왓슨, 프랜시스 크릭, 모리스 윌킨스 세 사람은 1962년 12월, 스웨덴 스톡홀름의 노벨상 수상대에 나란히 섰습니다.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힌 것이 수상 이유였습니다. 그들은 생명의 비밀을 밝힌 주역으로 지금까지 명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또 왓슨은 이중나선을 밝히기까지의 숨가쁜 여정을 소개한 ‘이중나선’의 출간으로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르고 돈도 많이 법니다.

그러나 비운의 여성과학자는 그들이 노벨상을 받기 4년 전 난소암으로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합니다. 당시 프랭클린이 이중나선 발견에 결정적 역할을 한 주역이라는 사실을 언급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프랭클린은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진 과학의 중심에서 홀로 싸운 외로운 선구자였습니다.

그녀는 DNA가 이중나선일 가능성이 있다는 결정적 증거를 제공하는 X선 사진을 얻어냈습니다. 그러나 확증이 없는 것은 모두 가설에 불과하다는 과학자적 믿음으로 연구를 계속합니다. 하지만 동료인 윌킨스는 아무런 사전 허락도 없이 그의 사진들을 분석했고 그것들을 왓슨과 크릭에게 보여주었습니다. 프랭클린은 자신의 연구기록이 유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서 특허등록이 중요한 겁니다.

프랭클린은 다크 레이디(Dark Lady)로 통했습니다. 말 그대로 ‘검은 여자’입니다. 흑인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머리 색이 까맣죠. 머리 색이 노랗거나 하얀 전형적인 영국인은 아니었습니다. 원래 다크 레이디는 ‘fair lady’의 반대 개념으로 머리와 피부 빛이 검은 여자, 예쁘지 않은 여자, 무식한 여자를 말하며 특히 차별 받는 유대인 프랭클린을 지칭한 말입니다.

최근에 조명 받기 시작하면서 그녀에 대한 책들도 발간됐습니다. ‘로잘린드 프랭클린과 DNA(원제 The Dark Lady of DNA)’도 그 중 한 번역서입니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그녀의 이름은 20세기 과학사의 가장 위대한 발견에서 부당하게 지워져 버렸다. 그녀가 잃어버린 것은 사실 노벨상이 아니라 그녀의 생명이었다.”

프랭클린의 업적이 제자리를 찾는 데까지 반세기가 넘게 걸렸습니다. 프랭클린의 업적은 다시 한 번 재평가되고 있습니다. 영국 BBC 방송은 그녀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를 제작했고, 영국 전통유산회 등 많은 단체에서 그녀를 기념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프랭클린은 ‘말 없는 살인자’라고 불리는 난소암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습니다. 아기를 낳을 수 있는 가능성에 종지부를 찍는 자궁적출까지 했지만 태연하게 연구를 계속합니다. 죽기에는 너무 바쁜 시간을 보냅니다. 자신이 이룩한 발견과 삶이 뿜어낸 생명력이 그녀의 원천이었습니다.

1958년 4월 16일 그녀는 세상을 떠납니다. 사망신고서에 적힌 짧은 기록은 몇 마디로 아주 많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연구과학자, 독신녀, 은행가 엘리스 아서 프랭클린의 딸’. 그녀는 위대한 과학자입니다. 진실의 역사는 강자에 의해 묻혀지는 것만도 아닙니다. 진실은 투명하고 항상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김형근 편집위원  hgkim54@hanmail.net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