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의 명언과 영어공부(38) | ||||||||
오펜하이머 | ||||||||
수천 개의 태양이 한번에 폭발해 그 섬광(방사능)이 전능한 하느님의 영광인 하늘로 날아간다면… 나는 죽음의 신이요, 세상의 파괴자다. (‘바가바드 기타’를 인용하면서) -오펜하이머(1904~1967) : 미국 핵물리학자, 맨해튼 계획 책임자- 오펜하이머(Julius Robert Oppenheimer)가 이 말을 언제 했는지는 정확히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히로시마의 원폭투하 전의 일인 것은 확실합니다. 아마 핵폭탄 개발이 성공할 수 있다는 100%의 확신을 가졌거나 핵실험을 직접 목격하면서 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이 명언은 가공할 위력의 핵폭탄에 대한 언급이면서 핵개발 계획에 참가한 자신을 후회하고 저주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 사막에서 역사적인 첫 핵실험이 실시됐습니다. 실험이 성공하는 모습을 본 오펜하이머는 그 위력에 놀라 정신을 거의 잃은 채 멍하게 하늘을 쳐다보면서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We knew the world would not be the same(이 세상은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을 알았다).” 부연 설명하자면 핵폭탄의 발명으로 이제 지구는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이야기죠. 소개한 명언에는 “I am become…”과 같이 문법적으로는 맞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명언에는 자주 등장합니다. 그리고 고어(古語)도 등장합니다. 그렇다고 몰라볼 정도는 아니고요. 또 영국식 철자도 있습니다. ‘Splendour’가 그렇습니다. ‘Splendor’로 고칠 수도 있지만 그냥 놔두는 게 좋을 것 같고 공부에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The foolish man seeks happiness in the distance ; The wise grows it under his feet. 어리석은 사람은 먼 곳에서 행복을 찾고 현명한 사람은 가까운 발끝에서 행복을 키운다.” 그리고 “The optimist thinks that this is the best of all possible worlds ; the pessimist knows it. 낙천주의자는 ‘모든 가능한 세상에서 이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데 비해 염세주의자는 그걸 알 뿐이다.”이라는 명언도 있습니다. 두 번째 명언은 생각하는 것(think, 믿는다는 것)과 아는 것(know, 단순히 알고 지나쳐 버린다는 것)을 비교해서 음미하면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거룩한 자의 노래’라는 뜻의 바가바드 기타는 힌두교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애송되는 경전입니다. 권위로 따진다면 우리가 잘 아는 ‘베다’나 ‘우파니샤드’ 같은 계시서가 우위에 있지만 대중들에게 끼친 영향력 면에서는 이들 경전을 능가합니다. 인류의 고전으로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의 영감의 원천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음에 기회 있을 때 설명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함석헌 선생이 직접 번역한 책이 있습니다. 핵폭탄을 둘러싸고 구설수가 가장 많은 학자입니다. 또 개인적으로 아주 불행한 인생을 산 과학자이기도 합니다. 사실 핵폭탄과 같은 대량살상무기, 아니 그 이상으로 모든 것을 죽이고 파괴하는 무기를 개발한 장본인의 마음이 편안하겠습니까? 더구나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폭탄으로 엄청난 사람이 희생되고 고통 받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라면 아무리 철면피라도 가슴이 아플 겁니다. 오펜하이머는 그 유명한 미국의 핵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계획(Manhattan Project)을 선두에서 지휘한 장본인이기 때문에 받은 충격은 더 했을 겁니다. 어쨌든 그는 핵폭탄으로 받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계획에 참여했던 그의 동료 여러 명도 이 같은 충격으로 인해 고민과 좌절감에 휩싸여 비관적이고 불우한 생활을 보내다가 생을 마감합니다. 핵이 인간에게 준 업보(業報)가 아니라 인간의 업보가 핵을 만든 겁니다. 핵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죄가 있다면 핵을 만든 인간입니다. 예견했던 대로 이차대전이 핵폭탄 2개로 간단히 결론이 나자 이 계획에 참가했던 웰스는 비관적인 나날을 보내다가 이듬해인 1946년 8월에 삶을 마감합니다. 그리고 핵폭탄 개발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주장하며 앞장섰던 질라드도 핵의 위력에 충격을 받아 전공을 핵물리학에서 생물학으로 아예 바꿔 시카코 대학에서 생물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됩니다. 그러나 페르미와 텔러는 수소폭탄 개발에도 착수해 1952년 성공합니다. 오펜하이머는 유명한 영웅이 됩니다. 그러나 핵폭탄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는 트루먼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내 손에는 아직도 피가 묻어 있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 말을 들은 트루먼 대통령은 주위 참모들에게 “다시는 저 얼간이를 내 옆에 오지 못하게 해”라면서 화를 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In some sort of crude sense, which no vulgarity, no humor, no overstatement can quite extinguish, the physicists have known sin ; and this is a knowledge which they cannot lose.” 해석하자면 “야비함, 유머, 그리고 허풍과 같은 기본적인 감성 속에서도 물리학자는 죄가 무엇인지를 안다. 이것은(죄를 안다는 것) 물리학자가 잃어버릴 수 없는 중요한 지식이다.” 과학의 윤리에 대해서 언급한 것 같습니다. 맨해튼 계획에는 내로라하는 4천500명이 넘는 과학자들이 참여했습니다. 아마 독일, 일본, 이탈리아를 비롯한 이차대전 동맹국을 제외한다면 전 세계 유명한 물리학자, 화학자들은 전부 참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심지어 동맹국에서 탈출해 미국으로 망명한 뒤 이 프로젝트에 참가한 학자들도 있습니다. 페르미가 대표적이지요.
로스 알라모스 과학자들은 두 가지 방법에 의해 핵폭탄을 만들었습니다. ‘홀쭉이(little boy)’라는 핵폭탄은 긴 관의 양끝에 우라늄 235를 분리해 넣은 것이고, ‘뚱뚱이(fat man)는 속이 빈 둥근 공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홀쭉이는 루스밸트 대통령을, 뚱뚱이는 처칠 수상을 상징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차대전은 이미 연합군 쪽으로 기울었고 종식을 확신했기 때문에 상당한 여유가 있었던 탓이겠지요.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운명의 날 1945년 8월 6일. ‘에놀라 게이’라는 B29 폭격기가 최초의 핵폭탄인 홀쭉이를 산업도시 히로시마에 투하함으로써 핵의 위력을 세계에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우라늄으로 만든 4.5톤의 홀쭉이는 반경 3km를 완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14만 명의 목숨을 순식간에 앗아갔습니다. 지금까지 핵폭탄으로 죽은 사람은 20만 명. 당시 히로시마 인구의 3분의 2가 사망한 겁니다. 플루토늄으로 만든 5톤의 뚱뚱이는 3일 후인 8월 9일 나가사키에 떨어져 7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핵폭으로 인류 전쟁사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참혹한 대학살이 일어난 거죠. 일본은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했고, 이로써 20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간 맨해튼 계획의 대장정이 막을 내리고 미국과 영국은 샴페인을 터뜨리며 기쁨에 젖습니다. “When you see something that is technically sweet, you go ahead and do it and you argue about what to do about it only after you have had your technical success. That is the way it was with the atomic bomb.” 해석해 보면, “기술적인 면에서 아주 흥미로운 것을 보았다면 실행에 옮겨라. 그래서 기술적으로 완전히 성공한 뒤에 자기 주장을 펴라. 원자폭탄에 대해서도 그렇다.” 오펜하이머는 이차대전이 끝난 후 미국 정보기관의 감찰대상으로 요주의 인물이었습니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할 만한 형편은 아닙니다만 우선 그의 핵에 대한 반감과 수소폭탄 개발에 대한 집요한 반대 등 그의 충성심과 신뢰성, 공산주의에 대한 편력 때문입니다. 1936년 스페인 내전에 잠시 참가했던 그는 그곳에서 공산주의 학생들에게 매료돼 친숙하게 지낸 적이 있습니다.
로스 알라모스 소장직에서 물러난 이후 오펜하이머는 프린스턴 고등과학원(IAS) 3대 원장이 됩니다. 그러나 그는 죽기 전 수년간을 핵물리학 연구보다 지식윤리와 도덕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이에 대한 글을 많이 썼습니다. 1967년, 식도암으로 세상을 하직합니다. (After he retired from Los Alamos, he held the post of director of the Institute of Advanced Study at Princeton, and in the last years of his life, he thought and wrote much about the problems of intellectual ethics and morality. He died of throat cancer in 1967.) “이휘소 박사는 한국의 오펜하이머?(Bejamin Lee is Korea’s Oppenheimer?)” 핵폭탄, 오펜하이머 이야기만 나오면 이휘소 박사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는 핵개발에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핵개발에는 ‘농축 우라늄’에 대한 깊은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기술과 제조방법도 말입니다. 그리고 혼자 힘으로 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대답은 “Absolutely not!”입니다. 이 박사는 핵을 거부한 위대한 평화주의자입니다. 아인슈타인도 핵무기 개발을 미국정부에 건의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핵개발을 선두 지휘했고요. 한국이 낳은 물리학자 이 박사는 그래서 이들보다 더 위대합니다. 이 박사를 두고 핵개발 능력의 실력을 보유한 위대한 학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핵을 거부한 위대한 학자로 평가해야 합니다. 그게 그 분을 존경하는 일입니다. 오펜하이머가 마지막으로 외친 말이 있습니다. “Science is not everything, but science is very beautiful.” “과학이 결코 전부가 아니다. 그러나 과학은 아름다운 것이다.” 순수과학 물리학을 통해 우주의 원리와 사물의 이치연구에 매달리고 싶었던 천재 물리학자 오펜하이머. 인간적인 학자인 그에게 핵폭탄은 견디기 힘든 무거운 업보였겠지요? | ||||||||
/김형근 편집위원 hgkim54@hanmail.net | ||||||||
2006.11.23 ⓒScience Tim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