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의 명언과 영어공부(66)
리처드 파인만(5)
▲ 칼텍에서 열강하고 있는 파인만. 유명 전도사의 모습이다.  ⓒ
“철학자는 정말 싫어!”

현대 지식인의 초상으로 불리는 버트란트 러셀의 이야기입니다. “I think we ought always to entertain our opinion with some measure of doubt. I shouldn’t wish people dogmatically believe any philosophy, not even mine.”

“나는 우리가 언제나 어느 정도 의심의 잣대를 갖고 우리의 견해(철학)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람들이 어떤 철학(종교를 포함해서)을 도그마로(맹목적으로) 믿기를 바라지 않는다.”

20세기 위대한 지성인으로 알려진 철학자 러셀경은 독단적인 종교와 철학을 경계했습니다. 물론 과학에 대해서도 경계했지만 과학을 힐난하는 철학자와 종교에 대해 과학을 변호하면서 따끔한 충고를 서슴지 않고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그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러셀 경은 과학적인 지성을 통해서 인간의 지혜를 완성할 수 있다고 믿어 왔으며 자신도 수학자였습니다. 철학과 수학뿐만 아니라 역사, 경제, 정치 등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지식을 소유한 20세기 최고의 지성인이라고 불립니다.

그의 과학적인 체취가 드러나는 재미있는 명언입니다. “Aristotle could have avoided the mistake of thinking that women have fewer teeth than men, by the simple device of asking Mrs. Aristotle to keep her mouth open while he counted.”

“(치아의 수를) 셀 동안 아내에게 입을 벌려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간단한 장치만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자가 남자보다 치아의 수가 적다라고 생각한 실수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은하의 아름다운 모습. 파인만은 물리학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말했다.  ⓒ
무슨 말인가요? 입을 벌리게 하는 장치가 뭔가요? 집을 떠나 공부만 하고 아내에게는 무관심했기 때문에 입을 벌려달라고 부탁조차 할 수 없었다는 것 같네요. 간단한 장치란 아내에게 베푸는 조그마한 관심, 애정표현 아닌가요? 그래서 러셀 경이 위트가 번쩍이는 명언을 남긴 것 같습니다.

“따지고 간섭하는 사람은 저리 가시오”

어쨌든 파인만에게는 이것 저것 따지는 철학자는 질색이었습니다. 인간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종교인들도 마찬가지로 질색이었습니다. 간섭 받는 걸 아주 싫어했죠. 또 간섭하는 것도 싫어했고요. 또 철학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종교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도 싫어했습니다.

그러면 파인만은 종교가 없었냐고요? 자유자재로 살면서 경계가 없는 사람에게 무슨 종교가 필요하겠습니까? 도통(道通)한 사람에게 무슨 가르침이 필요하겠습니까? 아마 듣기 좋고 교훈적인 철학서나 교육적인 모음집을 남겼다면 아마 교주(敎主) 한자리를 이미 꿰찼을지도 모릅니다.

요즘 이 과학자를 따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언론도 파인만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의 과학적 업적이 아니라 그의 삶과 살아온 흔적을 말입니다. 그의 기괴한 행적들이 아름답게 변하면서 점차 전설과 신화 속의 인물로 부각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하면서 철학자들을 꼬집습니다. “Philosophers say a great deal about what is absolutely necessary for science, and it is always, so far as one can see, rather naive, and probably wrong.”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과학에 대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수없이 많이 떠들어댄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한, 그것은 무책임(어리석은)하며 대부분 잘못된 지적들이다.”

“철학이 과학을 가르치려 드는 것은 불쾌해”

▲ 파인만은 방송에서도 인기였다.  ⓒ
파인만은 과학을 두고 이래라 저래라 하며 간섭하는 철학자들의 이야기가 귀찮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사실 과학자와 철학자를 두고 볼 때 철학은 종교를 포함해 과학에 대해 간섭하기를 좋아합니다. 과학이 아무리 좋다고 하지만 그로 인해 휴머니즘이 상실되고 있다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죠.

하긴 최근 DNA 유전자 비밀이 벗겨지고 복제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접어들면서 생명과학에 대한 윤리와 도덕의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윤리와 도덕의 문제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또 여론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는 주장도 필요합니다.

철학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탐구하는 학문이며, 과학은 목표를 달성하는 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이야길 좋아합니다. 그래서 과학은 철학이라는 학문을 인간으로부터 뺏어간다는 말을 종종 합니다. 물론 과학은 인생의 수단이 돼야 합니다. 목표가 돼서는 안 되는 거죠.

파인만의 전공 양자물리학은 순수과학으로 과학의 윤리와 도덕이라는 문제와는 거리가 먼 학문입니다. 어쨌든 과학에 대한 이러쿵저러쿵 하는 이야기도 한두 번 듣는 게 좋지 자주 듣는다면 그것도 귀찮은 일일 겁니다.

더구나 경계가 없이 자유자재의 길을 걸어가는 파인만이 이런 소리를 들으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겠지요? 또 그런 이야길 듣고 참고 인내할 사람도 아니지요.

“과학자들도 철학자만큼 통이 큰 사람이외다”

“A philosopher once said,‘it is necessary for the very existence of science that the same conditions always produce the same results’. Well, they do not. You set up the circumstances, with same conditions every time, and you cannot predict behind which hole you will see the electron.”

한 철학자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같은 조건 하에서는 항상 같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 바로 과학의 존재가 필요한 이유다.’ 글쎄, 그런 게 아닙니다. 매번 같은 조건들이 갖춰진 환경을 설정해 보세요. 그러나 어느 구멍을 통해야 전자를 볼 수 있을지 짐작할 수 없을 겁니다.”

이 이야기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일정한 조건(상태) 하에서 같은 결과가 나온다는 말은 맞을 수도 있다. 일정한 조건들이 갖춰졌다고 해서 또 일정한 환경이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환경은 무궁무진하게 변하고 그에 따라 결과도 무궁무진하게 나타난다.”

파인만을 대변해 보겠습니다. 철학자는 과학, 또는 과학자에 대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트륨(Na)이 염소(Cl)와 결합하면 Na+Cl=NaCl(소금)이 되고, 물은 100도가 되면 끓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공식은 어디서나 변하지 않기 때문에 일정한 거고, 일정한 것이기 때문에 과학의 존재이유라고 생각합니다.

20층짜리 옥상에서 부피가 일정한 물체를 떨어뜨리면 땅에 도달하는 시간은 항상 같을 것으로 철학자들은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절대 조건, 절대 환경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물체를 떨어뜨릴 때마다 다 다릅니다.

만약 철학자들의 생각이라면 인공위성은 쏘아 올릴 수 없습니다. 우주인이 달이나 다른 위성에 갈 수도 없습니다. 과학자는 절대조건을 가정해서 가설을 세울 수 있지만, 항상 절대조건만을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얼음은 영도에서만 어는 게 아니라는 건 이미 밝혀진 사실입니다. 물이 100도가 된다고 꼭 끓어서 수증기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과학자는 물이 100도가 되면 끓는다는 명제만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100도가 돼도 왜 끓지 않는가?를 연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과학자는 그러한 절대적인 명제라는 도식 속에서만 사는 속 좁은 인간이 아니라 당신들 철학자보다 더 큰 사고와 사상 속에서 연구하고 있으니 과학자들을 얕보지 말라라는 이야기입니다. 대변을 잘 했는지 모르겠네요.

정부관료님들, 계획서는 왜 그렇게 좋아합니까?

▲ 파인만을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 과학이 아니라 그의 삶이다.  ⓒ
철학자들은 꼬치꼬치 따지길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게 아니라 따져야 합니다. 철학이라는 학문의 성격이 아닌가요?

자신을 둘러싼 자연과 사회에 대해 수많은 질문을 하고, 그래서 인생에 대해 하나 둘씩 해답을 발견해 나가는 것을 전공으로 삼는 철학자의 머리 속에는 항상 의심과 회의로 가득 차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알아내려면 이것저것 꼬치꼬치 묻고 간섭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런데 파인만은 그게 질색이었죠. 세상에 뭘 그렇게 이러쿵저러쿵하면서 꼬치꼬치 따지면서 사느냐? 좀 대충 넘어가면서 살자, 정말 피곤하다, 뭐 이런 철학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그래서 암으로 사경을 헤매는 가운데서도 벌떡 일어나 “정말 죽는 것도 피곤한 일이군”이라는 일갈을 하고 이승을 떠난 게 아닐까요? “인간들아, 좀 아옹다옹하면서 다투고 질투하면서 살지 말아라. 쫀쫀하게 살지 말라, 제발. 지겹지도 않아?” 이러면서 저승으로 간 게 아닐까요?

그는 계획을 원래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계획서 같은 것도 싫어했고 정부가 추진하는 각종 프로젝트에 따르는 거창한 계획서 같은 거는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습니다.

“The real question of government versus private enterprises is argued on too philosophical and abstract a basis. Theoretically, planning may be good. But nobody has ever figured out the cause of government stupidity and until they do (and find the cure) ideal plans will fall into quicksand.”

“정부와 민간기업 사이에 쟁점이 되는 사항을 보면 너무나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면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론적으로 볼 때, 계획은 매우 훌륭할 수 있다. 그러나 정부의 계획이 얼마나 멍청한지를 누구나 알지 못하며, 알았을 때(해결책을 찾았을 때)는 그 이상적인 계획은 모래늪으로 빠져들어 갈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아시죠? 계획은 훌륭하지만 너무 이상에 치우치다 보면 알맹이가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그리고 특히 민간기업과 달리 정부의 프로젝트는 소리만 요란할 뿐 알맹이는 없는 경우가 너무 많고, 지나치게 관료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 맨하탄프로젝트의 동료들. (왼쪽으로부터) 닐스 보어, 오펜하이머, 파인만, 페르미.  ⓒ
과학자의 옷, 교수의 가면을 완전히 벗어 던져

이 이야기는 정부도 마찬가지고 과학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하는 철학자들도 마찬가지로 이상에 대해서는 아주 유창하고 멋지게 이야기하면서 현실적이거나 가능성 있는 이야기는 별로 없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을 감추는 위선의 옷들을 전부 벗어버리고 자연인으로 살자는 이야기도 됩니다.파인만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과학자라는 무거운 옷을 벗어 던졌고 교수라는 지식인의 탈도 벗어 던졌습니다.

좋은 것은 하고 싫은 것은 하지 않는 것이 그의 철학이고 인생관입니다. 그가 이룬 업적도, 물리학도 필요하면 벗어 던질 준비가 돼 있습니다. 싫을 때는 하지 않는 겁니다.

“Physics isn’t most important thing. Love is. 물리학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니다.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 정말 대단한 과학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김형근 편집위원  hgkim54@hanmail.net


2007.06.07 ⓒScience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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